공부는 왜 하는가? 청년의 공부는 환경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넓혀가기 위함이다. 범위가 넓어지면서 생기는 지식이 쌓여서 만들어진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롭고 참 멋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멋을 배우는 것이다. 멋은 낭비 없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이것저것 넣지 않고 맛있는 찌개를 만들고 단 몇 번의 손길로 예쁜 화장을 하고, 고상하고 간결하게 이야기하고 몇 마디 하지 않고 호소력 있는 詩를 쓰듯이. 그러니 경제성이다. 멋을 내는 것은 멋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멋은 맛이다. 사람이 맛이 있어야 한다. 맛이 평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를 왜 하는가?
공부를 하면 깊고 넓은 지식이 쌓이고 지식이 쌓이면 경제적이 되고 따라서 멋있게 되고, 그러면 인생이 맛이 있어진다. 인생이 맛있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아킬레스근
아킬레스근 하면 약점, 상처받을 수 있는 부위, 콤플렉스, 예민한 주제, 사람의 가장 미약한 부분으로 잘 겨냥된 화살로 쏘아 마치 전복되는 탑처럼 심리적으로 좌절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두루두루 쓰인다.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아킬레스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물에 포획된 도시의 성문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아폴로가 쏜 화살이 그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관통했다. 그는 심한 고통으로 신음소릴 내며 마치 전복된 탑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그녀의 아들 아킬레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지옥의 강 스틱스에 담갔다. 일단 지옥의 강처럼 강한 스틱스에 한번 담겨지면 담금질되어 강해졌을 텐데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잡고 담가야 했기에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담겨지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테티스가 손으로 잡았던 부위인 발뒤꿈치뿐이기에 이를 잘아는 아폴로는 아킬레스의 오직 약한 발뒤꿈치를 명중하였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부분이 각기 다르더라도 테티스가 잡은 부분은 있기에 어딘가 누구나 아킬레스근이 있기 마련이다. 신체적으로도 누구나 힘이 들면 발병하는 부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이 병이나고 어떤사람은 간이나 소화기관이 병이나고 나는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허리병이 난다.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근이고 치료자는 우선 이 아킬레스근을 찾아 건드려 치료를 시작한다.
크라카우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사제생활을 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교황이 되자, 아우슈비츠를 찾아 첫 미사를 올리고 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하면서도 20일간 건강하셨던, 그리고 결국 지하 감옥에서 목이 잘린 콜베신부님을 성인반열에 올리므로 성지가 된 이곳을 내가 찾기 두 주전, 5월 28일엔 새 교황이 되신 독일 출신의 베네딕트 교황님도 오셔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오랜 동안 마음 한 구석을 떠나지 않았던 역사를 만나고 결국 나를 만나게 되는 자아발견이 바로 여행의 목적인 듯하다. 특히 이번 여행은 그러하다. 어떠한 유적지도 마음을 닫아 놓은 사람에게는 속내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열고 아우슈비츠의 슬픔을 같이 하기 위하여 64년 전의 빅터 프랭클과 함께 2만kw의 전류가 흐르는 가시철망으로 둘러싸인 죽음의 문을 통과했다. 바로 이곳 2층 벽돌로 된 막사 앞에 세워진 교단에는 유대인 중에서 뽑힌 악사들이 불어대고 두들겨대는 행진곡에 발맞추어 유대인의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희극적인 표정을 띤 게스타포의 두 번째 손가락이 잔인하게 삶과 죽음을 구별하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다. 그날도 서 있었고 오늘도 하늘로 팔을 뻗쳐 들고 쭉 늘어 서 있는 미루나무가 이처럼 공포에 질려 말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없다. 저 미루나무는 그날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면서 말 못했고 오늘도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하여 벙어리가 된 듯 저들의 바람소리는 싸늘했다.
울타리와 공간
아이들은 초등학교 상급학년이 되면서 사춘기로 접어들고 아이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어른의 관심을 받게된다. 이 아이들의 행동이 비행일 경우는 성인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원인을 진단하고 치료책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은 왜 반사회적행동을 하는것일까?
청소년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희망은 부모관심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관심을 다시 조명 받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가정의 해체나 부모사이의 불화가 있을 경우 아이의 정신구조에 아주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 공격적인 생각과 충동이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고, 부모의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삶의 틀을 혼자 떠맡게 된다. 그 결과 충동성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욕구충족으로 자발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되어 불안해진다.
지금까지 초자아의 발달로 발달된 죄책감은 부모의 자아지원이 철수되면 짐이 된다. 실상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무엇을 할 만큼 충분히 힘이 강하지 않기에 순응한다. 이것이 실망의 중립적 상태인데 자아는 희망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환경이 개선되면 다시 희망을 갖고 희망 안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때 반사회적 행동 경향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사람들에게 시간이나 관심 또는 돈 등을 요구하는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도벽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두 번째는 구조적 강력함과 조직화에 대한 기대를 하고 아이가 쉴 수 있고 긴장을 풀며 안정을 느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에 대한 기대를 하거나 또는 강력한 관리를 요구 하는 파괴행동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자아지원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실망의 중립적 상태가 되기 전에 생긴 극도의 불안이나 혼란에 대한 공포를 원상태로 돌릴 수 있는 희망을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갖는다.
자아 지원이 박탈된 아이의 대다수가 가정에서 회복될 수 있다. 자아 지원의 박탈로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아이의 부모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아이의 좀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행동도 허용하면서 정신적 아기 돌봄이라고 생각하고 심적 상처로부터 회복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상대적 박탈은 신뢰를 형성하고 내적 실체를 풍성하게 한다.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르는 시기에 적절한 도움이 이루어져야 2차적 부산물(Secondary gain)이 우세하지 않도록 되며 그렇지 않으면 도움을 받으려는 청소년의 충동을 방해한다. 청소년이 비행을 하는 충동은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치료되지 않는 비행으로 발전되어 상습적이 된다.
청소년의 비행은 비타협적 방식으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이다. 청소년의 미성숙 안에 신명 나는 창조적 사고가 있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과 새로운 삶을 위한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나에게 긴장을 주는 것들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를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를 싫증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긴장은 우리의 에너지를 쓰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장된 표현을 싫어합니다. 과장된 몸치장이나 과장된 화장도 싫어합니다. 과장은 역겨움을 주는데 역겨움이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에 사람의 손길이 간 것도 싫어합니다.
자연에 사람의 손길이 간 것은 우리를 긴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우리의 산천에도 사람의 손길이 덧칠된 것을 많이 봅니다. 논밭도 새마을사업으로 바둑판 모양을 한 것이 많습니다. 옛날 구불구불한 논밭이 그립습니다. 구불구불한 논밭은 또 하나의 관광자원입니다.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고 여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꾸미지 않은 농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 묻힌 노끈을 같은 높이에서 양쪽으로 잡아 당겼을 때, 그 끈이 만드는 선은 일직선이 아닙니다. 중력에 의해 만들어진 약간의 동머리선입니다.
인위적이거나 기하학적 선이 아닌 자연이 연출한 선입니다.
이 선이 바로 자연스러운 선입니다.
우리의 고궁이나 산사의 기와지붕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궁이나 절의 지붕의 선이 과도하게 꺽인 중국이나 지나치게 직선인 일본의 절보다 아름답고 자연의 연출을 닮은 선이 편안함을 줍니다. 사람들은 그저 절에 가면 편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주는 교감인 줄 모르고 말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아름답습니다. 병풍같이 둘러싸인 산속에 사뿐히 앉은 절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절이 있어서 절대 자연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위적이지만 목표는 자연스러움입니다. 북한산과 인왕산 앞에 다소곳 앉은 경복궁이나 청와대 사진을 외국 사람들은 포토샵 한 것이냐고 물을 정도로 완벽한 구도라고 합니다.
여인들이 머리에 브릿지를 넣는 것도 인위적이지만, 획일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은 했을망정 옷과 분위기와 어울리는 또 다른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먹거리도 자연스러운 것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담백하게 쪄낸 옥수수나 약간의 소금을 넣어 찐 감자는 영원히 우리의 기호식품입니다. 절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기름에 튀겨 느끼하거나 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루 세끼 일 년 열두 달 매일 어떻게 싫증이 나서 밥을 먹느냐고 묻습니다.
이 밥에 허브양념이나 올리브오일이 가미된 것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나겠지요. 우리의 밥은 염기나 당분이 가미되지 않은 단백한 맛이기에 구수하기까지 합니다. 자연스러운 먹거리는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30년 전 같이 지내던 이웃집 친구한테서 30년 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를 되돌려 들었습니다. 옆집에서 가끔 만들어 주는 담백한 빵을 받으며 “우리는 자연 그대로라면 싫증이라는 것을 몰라요”라고 제가 그랬다고 합니다. 싫증이 난다는 것은 긴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인공이 가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공이 가미되었더라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내가 사는 획일적 아파트도 나를 긴장시키고, 바로 옆 공사장에서 들리는 브레이크의 돌 깨는 소리는 나의 신경을 거슬리며, 체육관에서 떠드는 여자들, 남자들 소리도 귀를 긴장시키고, 코를 마비시키는 여인의 향수도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특히 지하철에서 크게 떠드는 소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모든 자극은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참자기와 거짓자기
우리 주위에 보면 자기 생활을 제대로 잘하지 못해서 현실에서 낙오도 하고 갈등도 갖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본인만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될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경계선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애매한 경계선에 있기에 경계선적 장애라고 하고 그렇다고 반사회적 문제는 일으키지 않기에 경계선적 성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본인 뿐 만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엉거주춤 치료를 못 받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정신 분열증이나 정신병적 우울증처럼 망상이나 환상을 갖지 않고 정신 상태는 정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현실 생활 적응에서 문제를 갖는다. 그렇다고 사람을 만나는데 몹시 어려움을 갖거나 불안하고 겁을 먹는 등의 신경증 증세를 가지면서도 어느 정도 이상 하긴 해보여도 겨우 겨우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적응 문제의 정도가 약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은 특히 가족들은 속을 썩지만 정신병자로까지는 안보고 정신 차리면 되겠지 하며 시간을 허송세월한다. 경계선적 성격장애는 어떤 사람들인가? 대개는 지능도 좋고 능력도 있으며 어느 정도 사회적 수준도 유지 하는 수준에서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고 현실감을 갖지 못하며 일과 사랑에 문제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일과 사랑은 삶을 만족시키는 기본 조건이다. 대학에 가서 꼭 공부가 어려워서라기보다 공부하기 위하여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낙제를 하거나 낙제할 것 같으면 휴학을 하고 힘들면 결석 하고 미리 실패의 이유를 만들어 간다.
Y의과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한 R은 졸업하는데 10년 걸렸다. 힘들면 휴학하고, 결국 낙제하고 10년 만에 졸업하더니 전문의를 안 한다고 팽개치고 고립되어 살면서 그래도 성장하려는 욕구로 취직도 해보지 않고 부모의 도움으로 결혼하였다. R은 대학 1학년 때 겪은 실연을 세상에 끝이라고 인식하고 몇 년을 헤매었다. 이것이 거짓자기의 방어이다. 예쁘게 생긴 J는 가난한 집의 3남매의 막내딸로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나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10년간 가난한 부모에게서 용돈을 타 쓰다 신학교에 진학 했다. 신학교에 간 후에는 외국에 선교 간다고 부모는 물론 결혼한 오빠에게도 당당히 용돈을 달라고 요구하며 부잣집 딸 행세를 하고 있어 가족들이 골치라고 생각하나 엄마는 물론 작은 오빠도 J에게 절절매고 있다. J는 70세가 다 된 엄마가 제사상을 차려도 내다보지 않고 부모를 돕지 않으며 당당히 옷이며 용돈을 달래고 안주면 깡패처럼 떼쓰며 아르바이트는 힘들어서 못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모 형제의 종교를 자신이 믿는 기독교로 바꾸게 하는 등 집에서 서열이 가장 높다. 위에서 말한 R이나 J는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경우이므로 대단한 문제로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경계선적 성격 장애이다. 경계선적 성격장애는 오디프스 전 단계에서 일어나는 참자기의 발달 정지 때문이다.
참자기와 거짓자기는 부모자녀관계를 통하여 발달한다.
참자기는 참된 부모자녀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거짓자기는 거짓된 부모자녀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참된 부모자녀관계는 모든 대상관계 즉 세상과 삶, 하물며 신적 대상을 포함하여 참된 관계를 맺게 하는 토대가 되고 거짓된 부모자녀 관계는 모든 대상관계를 거짓된 것으로 만든다. 인격안에 자리 잡은 거짓된 관계를 참된 관계로 변화시키려면 새로운 부모자녀관계의 경험을 하여야 한다. 치료자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충분히 좋은 어머니 역할을 해주며 튼튼한 치료적 울타리가 제공 될 때 환자는 전이를 나타내고 전이 안에서 퇴행한다. 이 때 치료자가 안아주고 공감해주고 반영해주고 버티어 준다면 참자기를 발달시킨다.
참자기의 목적은 현실 과제를 수행하며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있고 거짓자기의 목적은 현실과제에 대처보다 방어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데 있다. 거짓자기의 수행은 적응이 아니라 방어 이고 고통스런 감정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적을 위해 현실 숙달이 희생된다.
나 자신을 험담하지 말라(의사소통)
앙드래 말로는 자기 자신을 험담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못 부르는 것을 그대로 놔두지 말라. 내 자신이 남이 잘 못 부르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주문에 걸린 듯 나의 무의식이 착하기에 그대로 행동해준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별명을 붙이면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지 하고 포기하거나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니라고 적극 반응해야한다.
특히 엄마는 내 아이라고 또는 귀엽다고 수캐니, 돼지니, 여우니, 여시니 강아지니 아무렇게나 부른다. 내 아이가 사람이 아니고 수캐, 돼지, 여우, 개새끼면 정말 괜찮은가?
내 아이가 귀엽다고 다 큰딸과 큰 아들을 아가니 베이비니 하면 영원히 엄마에게는 크지 말고 애기 짓만 하라는 것인데 그 아이가 어떻게 젖 떨어져 의젓해지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만들었듯이 엄마의 말이 자녀를 만들고 내말이 나를 만든다.
프랑스 소설가 샤를 페로(1628-1708)가 유럽에 전해오는 전래동화를 상드리용(cendrillon)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 쓰다는 뜻으로 항상 부엌 아궁이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일을 하는 여자라는 의미이다. 신데렐라 동화는 계모와 이복언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마음씨가 착해서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구전동화로 전래된 이 프랑스 동화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면서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매스터슨(James Masterson)은 모자 관계인 대상관계에서 자신의 친 엄마를 나쁜 계모로 느끼는 것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명명하였다. 사실은 모든 유아의 엄마가 계모가 아닌데 모든 유아는 자신의 엄마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나쁜 계모로 여긴다는 것이다. 모든 엄마가 항상 다 좋은 엄마일 수 없다. 엄마가 잘해주면 좋은 엄마이고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나쁜 엄마로 보는 유아는 제1 분리개별화기(18개월-36개월)에 대상을 좋은 엄마 나쁜 엄마로 자아분화(ego spiriting)한다. 대상이 한 가지가 좋으면 모두 좋은 사람이고, 한 가지가 나쁘면 모두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로 자아분열 방어기제이다. 모든 사람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데 나한테 잘해주면 모든 것이 좋고 나쁜 면을 보지 않으려는 all good. 나한테 잘 못해주면 all bad로 보려는 방어기제는 대상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물론 잘못된 방어기제이다.
감성이 세련된 사람
나의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곳은 아주 산이 높아 그 곳에서는 봉의산도 낮게 보이고 소양강물도 발 아래 보인다. 내 동생은 아버지 장례를 지내고 앉아서 “아버지, 이 곳에서는 소양강도 보이고 세상이 다 내려다보이니 아버지는 좋겠네요!”라고 했다.
많은 묘지가 높은 산에 있지만 보통은 공동묘지이기에 길을 잘 닦아놓아 오르는데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묘지는 단독묘지라 길을 어느 누가 먼저 낫을 들고 닦지 않으면 길이 없어져 원시림이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여름날 미국에서 공부하던 아버지의 손녀딸을 데리고 묘지를 오르려다 길을 잃고 고생만 하다 돌아올 정도로 문명이 없어진 길이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는 자연과 문명을 걸쳐서 살아야 하기에 끊임없이 길을 닦지 않으면 문명이 완성되지 않고 원시 비문명으로 되돌아간다.
길을 닦는 것이 무엇일까? 한자로 道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쉽게 교육의 목적을 이성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교육을 받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이성적 인간위에 감성적으로 세련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감정이 순화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지적인 사람이 아니고 정적인 사람 말이다.
희로애락이 상황에 들어맞는 사람 말이다. 상황이란 시간과 장소이다.
희로애락이 발현될 때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들어맞으면 조화롭다. 때에 맞으면 시중이고 시중은 시간 속에 사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공부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진 찍는 아내가 남편에게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 같이 보며 격려도 하고 조언을 해 주는 것이 상황에 어울리는 조화로운 상황이고 조화로운 和의 관계이고 감성이 발달된 사람이다. 감성이 발단된 사람은 주위를 기분 좋게 하여 和를 만든다. 어제 찍은 여의도 불꽃놀이 사진을 보라고 하면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홱 돌리고 어제 T.V.에서 다 봤다고 한다. 그러더니 아니 땐 밤중에 홍두깨라고 잘 때 문 열고 반쯤 눈감은 얼굴로 “여보, 사랑해!”하는 것은 무슨 상황인가?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사랑스러운 얼굴로 타이밍을 맞춰야 말이 힘이 있고 정말 사랑하는 기가 전달된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개그 장면이다.
노자는 주어진 인간의 상황에 들어맞게 희로애락을 발현하는 것이 조화이고 이것을 중용이라고 했다. 상황에 맞게 감정적으로 바르게 발현하는 사람이 중용을 지키는 사람이고 군자이다.
아무 때나 어울리지 않게 이성적으로 “사랑해” 하지 않고 타이밍을 맞춰 또 상대가 원하는 수준에 맞춰 귀찮더라도 언행일치의 감정으로 그 때 그 때 달라는 관심을 가져주면 이런 사람이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면 이 사람이 바로 감성이 세련된 사람이 되고 도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정이 없다면 의미 없는 관계이다. 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외롭고 우울하다. 사람이 갖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외로움과 우울함이다. 우울함은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의 슬픔과 다른 것이다. 감성이 세련되지 않고 시중이 아니면 외롭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울함은 요즈음 항우울제로 치료한다고 하고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 항우울제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 항우울제로 우울이 걷힐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 왜 약으로 치료받던 사람들이 결국엔 자살을 할까? 우울은 약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 속에서 공감해줌으로서 우울은 슬픔이 되어 치료가 되면 날라가 버리는 것이다.
지난겨울 부부동반을한 열차를 운행하는 노동자 일행들과 같이 파리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가 큰맘 먹고 루이비통 가방을 하나씩 다 사들고 돌아왔다. 철도 노동자라 할지라도 월급이 많아서 별 부담 없이 샀을런지 몰라도 그 가방에 들어간 남편들의 노동이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가? 특히 그 가방을 들고 다니면 모조품으로 알 테니 걱정이다. 명품은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 마무리로 사용하면 고상하게 진가를 발휘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떨어진 명품은 가짜로 둔갑된다. 진가를 나타낼 때만 명품으로 사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명품을 나도 갖기만 하면 부티나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달라 보일 것 이라는 명품이라는 미신을 믿고 있어 잘못된 이 미신의 명품을 갖기 위해 도둑질도 하게 만들고 남자친구 선택의 잣대가 되고 못가지면 불행하게 느끼게까지 만들고 있다.
잡신을 맹신적으로 믿는 것보다 보이는 미신이니 생각이 없는 사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명품에 매달리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병든 사회의 일면이다.
엄마 배는 많이 먹어서 부른 것이야!
사람이 원래 욕심을 갖고 있고 이것이 본능이다. 본능 중 사랑받고 싶은 본능이 식욕 다음일 것이다. 식욕은 특히 생명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욕심도 생명과 관계가 있다. 26개월 된 아이가 임신 9개월 된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해서 엄마가 동생이 뱃속에 있어 너를 안으면 배가 아프다고 이야기를 하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보다. “아니야 엄마가 많이 먹어서 배가 아파!”라고 야무지게 동생의 존재를 부정한다. 아이는 자기가 많이 먹으면 배가 볼록해지니까 엄마의 배도 많이 먹어서 불렀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아이는 요즈음 어른들이 하는 이야길 비판하고 자기 생각대로 정리를 하는 경향이 있다. 코트를 입고 나가자고 하면 “코트가 아니고 잠반데!”라든지 아빠 만나러 가자고하고 식당엘 가면 “아빠 만나러 온 게 아니네, 밥 먹으러 왔네!”라고 한다. 그리고 아빠가 식당에 나타나면 자신이 판단했던 것을 수정하는 눈치다. 엄마가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 것을 인정할망정 엄마 뱃속에 동생이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쟁자가 나타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동생이 나오고 엄마배가 가라앉으면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받아들이고 수정할 것이다. 동생이 나타나는 것은 남편이 애인을 데리고 안방에 나타나는 것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인류최초의 살인이 형제의 살인이 아니겠는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형제간의 갈등을 줄여주는 방법은 물론 도덕교육을 포함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각각의 파이를 부모는 충분히 주는 것인데 부모가 충분히 줄 능력이 없으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동생이 나오면 장난감도 주고 잘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 이것은 내 것이야 한다. 그리고 좀 있다가 "동생이 장난감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엄마가 어떻게 말하나 보려고 유도질문을 한다.
"그러면 동생에게 갖고 놀라고 주어야지"라고 하면 "아니야 이것은 내 것이야!"라고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며 새로 나올 동생을 경계한다. 그러나 아이는 실상 동생이 나오면 아주 조그만 주먹만 한 아이라고 하며 불쌍해서 잘 해주어야겠다고 동생에게 자기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줄 것이다. 자기는 실컷 갖고 놀았고 이제는 흥미가 없거나 필요가 없어졌으니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어린 동생으로 돌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주지 않겠다던 필요 없는 장난감을 주게 된다. 이것은 이만큼 정서적 성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이의 정서적 성숙은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이렇게 동생이 있어서 경쟁해보고 불안을 경험했던 사람이 외동딸이나 독자보다 더 정서적 성숙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깨어있다.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북쪽으로 난 창문에 비추이는 가을 하늘의 구름이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답다.
머그컵에 담긴 향기로운 커피도 마실 시간이 아까워 그대로 내버려둔채 밖으로 나섰다.
저 구름이 흩어져 가버리기전에 얼른 쫓아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뭉개구름이 어느새 새털구름이 되고 또 남이섬 가까이오니, 또 다시 티벳의 고원에서 본 아주 커다란 뭉개구름이다.
남이섬에서 건너다본 강원도 골짜기는 그림같이 아름다워 강가를 따라 가보니 멀리서 본 그것이 아니었다. 상상속의 그림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혼 전에 본 아내와 결혼하고 난 후 아내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결혼전에 그사람의 모습을 못보았던 것일까?
나는 결혼한지 40년이 지났다. 우리부부는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잘지내지 못한다.
우리부부 두 사람이 기본은 서로하고 있으니 잘 지내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두사람 모두 놀지 않고 돈 벌고, 건전하게 생활한다고 할까? 사행심을 일으키는 도박도 안하고 도덕적으로 바람안피고 거짓말 안하고 사치낭비 안하고 살았으니 기본은 한것 같다.
그러나 가끔 서로 가진 특질을 비난하며 상처를 살짝살짝 주기도 했다. 성생활이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다느니 또는 사람이 지저분하다느니 하면서...
또 깊은 대화를 하다보면 분석적이고 비판적이고...
특히 나는 남편이 더럽게 밥을 먹고 지저분한 것 때문에 평생 구박을 많이 했다. 한편 많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전에 이것을 알았던 것이다. 데이트하던 시절 밤늦게 만났는데 그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나타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고무신이 검은 고무신이 아니고 흰 고무신이 때가 묻어 검은 고무신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훗날 내 시어머니가 되신 그의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귀찮아서 고무신을 닦지 않으셨구나 하고 너그럽게 봐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새까만 고무신을 아무렇지 않게 신고 나온 지금의 내 남편이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시어머니에게 투사했다. 나의 무의식은 그 사람이 내 기준에 의하면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콩까풀이 씌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끔 나의 느낌을 눈멀게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을 결혼 전에는 몰랐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여자는 결혼하고 나서보니 시가쪽이 경제적인 빚이 많고 매우 힘든 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은 결혼 전에 은행종합신용보증서를 요청했을때 남자쪽에서 소식을 끊은 일이 있었다. 그 후 그런 서류까지 요구하니 자존심이 상할수도 있겠구나하고 없던일로 하고 그냥 넘어간적이 있었다. 그것이 탈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결혼하기위하여 남자의 자존심을 봐주면서 합리화를 했던것인데 무의식은 “뭔가 이상하다”라고 알고 있었다. 또 결혼생활하면서 욕을 잘해 힘들어하는 어떤 아내는 남편이 첫 만남때 대통령을 향해 xxx xxx쌍욕을 하는 것이 좀 남다르고 남자답고 멋있다라는 착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욕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너무 곱게 자랐나? 저렇게 말하니까 멋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욕을 아주 잘하는 남자라는 것을 첫 만남때 알았었다.
결혼해보니 시부모님도 욕을 잘하고, 시누이도 욕을 쉽게 하는 것을 보며 남편이 욕을 잘하는 것이 이 집안의 가풍처럼 보이며 정떨어지게 싫어하고 있다.
안아주기
엄마는 아기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에 살그머니 깨워 정신이 몸에 없을 때 몸 위치가 변함으로 생기는 엄청난 공포를 경험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정신이 미처 돌아오지 않아 공포를 느끼면, 유아는 땀을 흘리거나, 체온이 싸늘해지고, 창백해질 수 있고, 먹은 젖을 토 할 수 있다. 몸과 정신의 통전은 적극적으로 적응해주는 충분히 좋은 엄마의 충분히 좋은 안아주기 없이는 아기 혼자 내부로부터 작업이 어렵게 된다.
바늘구멍
옛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바늘구멍이라는 골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동지방에서의 교통수단은 오늘날 관광자원으로나 볼 수 있는 낙타이다. 부자의 낙타는 살이 찌고 짐도 많이 싣고, 장식도 주렁주렁 달았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나 가난한 사람의 낙타는 말라 비틀어졌을 뿐 아니라 장식도 없고 실을 짐도 많지 않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잘 빠져 다녔다고 하여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을 비천하고 뒤쳐지고 오갈 데 없는 자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비유했다.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의 고대도시 패스의 매디나 시장골목은 정말 바늘구멍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좁고 미로 같았으나 낙타들이 오늘날도 그 바늘구멍 같은 좁은 골목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낙타가 짐을 싣고 빠져 나갈 때 나는 벽 옆에 종잇장 같이 달라붙어 길을 내주었다.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은 권세와 간교함으로 검은 돈을 모았거나 깨끗한 돈이라 할지라도 강박적인 증세로 부자가 되었을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관심이 소유하는 쪽에 쏠리어 신보다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물질보다 이웃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오히려 가난한 것은 사회제도의 피해자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발달과정 속에서 특히 여섯 살부터 열두서너 살 때까지 근면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부모의 근면한 생활태도를 보고 자라면서 근면한 생활태도를 익혔을 때 큰 부자는 못 될망정 중산층의 작은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게으름은 자아의 에너지 소멸상태이고, 자아의 에너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기에 가난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 가난한 사람들이 나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도 있다. 나이 쉰 살이 다된 남동생이 25년 만에 무일푼으로 나타났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멀쩡한 사지와 좋은 머리 갖고 그 동안 돈을 하나도 못 모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누나들은 이렇게 재산을 모았는데 너는 뭐했냐고 물으니 가족이 없으니 돈을 모아야겠다는 목표가 안생기고 의지도 안 생겼다고 한다. 결국 돈도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으는 것이다.
요즈음 이기적 자본주의의 피해가 늘어나면서 자본주의를 이기심에 충실한 제도로 이윤이 생기면 승자 독식하는 자본주의는 물러가라고 뉴욕의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고 있다. 기업은 이윤독식을 하면 안 된다. 기업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기업의 가치실현을 위하여 나누어야 한다. 이것을 실천하는 기업을 요즈음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는데 모든 기업은 사회적 기업이어야 되고 자본주의 역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자본주의 일 때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가난한자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쉬워진다. 왜냐하면 곡간에서 인심나기에 부자는 맘만 먹으면 훨씬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자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불쌍하고 연민스러워하는 사람은 권력과 금력을 모두 거머쥐고도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7,80년 지나다 보니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극도로 심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그대로 좋은가하는 논의가 일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적 사회주의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본주의가 그대로 발전하려면 좀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인데 자본주의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는 민주주의의 철학이고 더 올라가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 기본적 가치를 망각하고 기업은 이윤만 추구하였다. 그 가치는 모든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고 최소한 동등한 기회를 갖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이다. 그리고 사회는 책임을 갖고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
사람이 귀해서 좋다
청자 같은 글을 쓰는 피천득 수필가는 이른 아침 등교하는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을 보며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고 표현했다.
나도 평생 배워도 못 다 배우는 것이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 이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이가 나를 위해 살면서도 내가 귀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에 함부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같다. 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을 모를 진데, 그런데 하물며 남이 귀하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기에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십대의 비행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있지 않나 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을 사랑이라고 뭉뚱그려 말 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왜 사랑해야 하느냐 물어 들어가면 결국은 사람이 귀중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과부도, 늙은이도, 어린이도, 동성애자도 모두 귀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내게로 오라, 하늘의 나는 새도 걱정을 안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왜 걱정을 하느냐고 하지 않았던가? 내게로 오라가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로 바뀌지 않았을까? 2011년 지난해는 온 나라가 복지 전쟁이었다. 무료급식 전쟁으로 서울 시장이 바뀌더니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복지를 화두로 방패와 탄약 삼아 복지전쟁을 하는 것을 보며 이제는 복지를 국가가 책임진다니 神도 부처도 하느님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될듯 싶다.
神이 온 세상을 만들고 마지막 전날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이들에게 온 세상을 주지 않았는가? 닷새 동안 만든 온 세상보다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물론 사람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평생 배우며 배운 것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멋있는 사람의 삶인 것 같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배우는데 왜 이리 힘든 것일까? 평생 배워도 실천을 못하고 있으니……. 이 지구상에 70억 인구가 살고 있다.
사람이 많은 사회 일수록 사람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는 사회도 있는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도 붙잡아 별주부전에나 나오는 이야기처럼 간을 빼가고 신장도 빼가고 눈알도 빼가서 한국 사람한테 팔아넘기면 그것을 좋다고 사서 자동차 부속품처럼 끼고 다닌다는 괴담도 종종 들린다. 괴담에 지나지 않길 바란다. 사람이 사는 사회가 겁나지 않고 안정이 되려면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평생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도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제일의 가치가 아닌가?
메리케이 코스메틱 사장인 메리케이 에쉬는 회사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사람을 극대화하는 것은 자신이 대우 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직원을 대할 때 상대방이 “나는 존중받고 싶다”라고 쓰인 목걸이를 차고 있다고 생각하고 대한다고한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북적대는 방에서도 그 방에 둘만 있는 것처럼 대하며 모든 것을 무시하고 상대방만 쳐다보고 고릴라가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경청을 한다고 한다.
인간존중을 기본철학으로 하는 사회복지현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대상자가 “나는 존중받고 싶다”라는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고 생각하고 대하면 좀 더 인간존중의 실천이 쉬어지지 않을까? 일본의 사회복지현장에선 사회복지에서 사용하던 Client (의뢰인)라는 말을 안 쓰고 이용자라는 말을 쓴다고 하며 이는 경제 원리로 그들은 사회복지이용자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원래 Client (의뢰인)라는 용어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존귀한 시민이라는 뜻이다. 사회복지이용자라는 용어보다도 인간존중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단어이다. Client (의뢰인)가 내포하는 의미대로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면 된다.
인간존중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2000년에 사회복지사 선서식을 수원여대에서 처음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최초로 만든 예식이다.
사회복지사 선서식에서 우리가 가슴에 달고 있는 리본은 황금색과 자주색이다. 황금색은 고귀함을 뜻한다.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갈매기는 왜 이혼할까?
사람이 이혼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개인 다 다르기에 복잡할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단순하다. 개개인은 살아가면서 피차 억울하지 않아야한다. 어느 누구라도 억울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아리스토테렐스는 정의는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사이에 받을 것을 받지 못하면 억울하여 이혼하고 싶어진다.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로 복잡해지면서 이혼이 늘고 있고 농경사회로 갈수록, 원시사회로 갈수록, 개발도상국일수록 이혼율이 낮은 것을 보면 도시산업화, 지식정보화 되면서 사람이 육체적 힘을 덜 써도 되는 직업이 늘어나면서 따라서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이혼의 요인들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여성이 직업을 갖고 여러 가지 역할을 떠맡아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결혼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고 더더욱 혼자 살 수 있는 경제력뿐 아니라 심리적 자신감을 가지며 용단을 내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이혼 제기자의 70%가 여성인 것을 감안해보면 그러하다.
따라서 경제력이 없는 여성은 아무래도 이혼을 망설이게 되나 나라의 복지정채이나 친척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건만 되면 본인이 경제능력이 없는 것과 상관없이 결혼관계를 끝낼 용기를 갖게 된다. 이혼을 함에 있어 결혼에 대한 가치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경제력이 있고 이혼하고 싶다 할지라도 다시한번 재고하겠지만 이것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래서 참고 살았다. 참을 가치가 있을 때 참는 것이다.
이혼이 현대인의 이성적인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물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동물이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동물적인 것이라고 해서 감정적 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현실적일런지 모른다.
이혼율이 세계적으로 볼 때 미국, 스웨덴에 이어 한국이 세 번째로 높다. 2011년 세계은행이 조사한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이 $42000, 스위스 $37000, 영국 $33000 우리나라가 $21000이다.
미국, 스웨덴을 제외한 우리나라보다 GNP가 높은 나라들보다 왜 이혼율이 높은 것인가? 남자들보다 여자들 편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데 왜 한국의 여자들은 이혼을 제기하는 것인가? 그냥 살자니 억울해서이다. 이혼녀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까지……. 물론 이에 대한 편견도 많이 희석되었다. 이 논의 원인을 동물적인 시각으로 풀어야 할 것 같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이혼을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배우자가 출세를 못해서 이혼하는 것도 아닐테고, 돈을 못 벌어오고 그래서 재산을 못 모았다고 이혼하는 것도 아닐테고, 사람들처럼 가치관이 틀려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얼굴이 미워서 또는 성격이 싫어서 이겠지. 우리가 동물들을 볼 때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 답은 나온다. 성격이 싫거나, 안 맞거나 하기 때문이겠지. 조류학자들의 추적연구에 의하면 갈매기의 30%가 다음해에 이혼을 한다고 한다. 갈매기 부부가 같이 새끼들을 품어 부화시키고, 키우며 물고기를 잡아오는 역할을 서로 교대로 분담하는데 집안일보다 밖으로 나가는 일을 서로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면 집에서 새끼들을 돌보는 일이 밖에 나가 먹이를 잡는 것보다 위험에 노출되는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매 새끼한테도 힘을 못 쓰는 어미아비 갈매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날아가 먹이를 물고 돌아 왔을 때 배우자가 빨리 교대해주지 않고 새끼를 끼고 시간을 끄는 배우자에게 내가 새끼를 돌볼 테니 빨리 나가 꾀부리지 말고 일하라고 꾁-꾁 거리며 상공을 비행한다. 이 비행하는 시간이 긴 갈매기 쌍일수록 다음해에 오자마자 다른 갈매기와 짝짓기를 한다는 보고이다. 전체 갈매기 중 꾀부리는 갈매기 30% 가 이혼을 당한다는 정확한 조사이다.
갈매기 부부관계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인간도 역할을 반반 상호 분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부부는 싸우다가 결국 이혼 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는 네쌍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 우선 갈
바늘구멍
옛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바늘구멍이라는 골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동지방에서의 교통수단은 오늘날 관광자원으로나 볼 수 있는 낙타이다. 부자의 낙타는 살이 찌고 짐도 많이 싣고, 장식도 주렁주렁 달았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나 가난한 사람의 낙타는 말라 비틀어졌을 뿐 아니라 장식도 없고 실을 짐도 많지 않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잘 빠져 다녔다고 하여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을 비천하고 뒤쳐지고 오갈 데 없는 자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비유했다.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의 고대도시 패스의 매디나 시장골목은 정말 바늘구멍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좁고 미로 같았으나 낙타들이 오늘날도 그 바늘구멍 같은 좁은 골목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낙타가 짐을 싣고 빠져 나갈 때 나는 벽 옆에 종잇장 같이 달라붙어 길을 내주었다.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은 권세와 간교함으로 검은 돈을 모았거나 깨끗한 돈이라 할지라도 강박적인 증세로 부자가 되었을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관심이 소유하는 쪽에 쏠리어 신보다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물질보다 이웃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오히려 가난한 것은 사회제도의 피해자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발달과정 속에서 특히 여섯 살부터 열두서너 살 때까지 근면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부모의 근면한 생활태도를 보고 자라면서 근면한 생활태도를 익혔을 때 큰 부자는 못 될망정 중산층의 작은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게으름은 자아의 에너지 소멸상태이고, 자아의 에너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기에 가난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 가난한 사람들이 나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도 있다. 나이 쉰 살이 다된 남동생이 25년 만에 무일푼으로 나타났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멀쩡한 사지와 좋은 머리 갖고 그 동안 돈을 하나도 못 모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누나들은 이렇게 재산을 모았는데 너는 뭐했냐고 물으니 가족이 없으니 돈을 모아야겠다는 목표가 안생기고 의지도 안 생겼다고 한다. 결국 돈도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으는 것이다.
요즈음 이기적 자본주의의 피해가 늘어나면서 자본주의를 이기심에 충실한 제도로 이윤이 생기면 승자 독식하는 자본주의는 물러가라고 뉴욕의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고 있다. 기업은 이윤독식을 하면 안 된다. 기업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기업의 가치실현을 위하여 나누어야 한다. 이것을 실천하는 기업을 요즈음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는데 모든 기업은 사회적 기업이어야 되고 자본주의 역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자본주의 일 때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가난한자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쉬워진다. 왜냐하면 곡간에서 인심나기에 부자는 맘만 먹으면 훨씬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자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불쌍하고 연민스러워하는 사람은 권력과 금력을 모두 거머쥐고도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7,80년 지나다 보니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극도로 심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그대로 좋은가하는 논의가 일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적 사회주의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본주의가 그대로 발전하려면 좀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인데 자본주의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는 민주주의의 철학이고 더 올라가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 기본적 가치를 망각하고 기업은 이윤만 추구하였다. 그 가치는 모든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고 최소한 동등한 기회를 갖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이다. 그리고 사회는 책임을 갖고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
말귀를 알아들을 때,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나의 18개월이 된 손녀가 말은 못하지만 말귀를 거의 다 알아듣는다. 말귀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전체로 뜻하는 숨은 의미이다. 가족들 틈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걷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고, 어구적 어구적 거려서 “너 똥 쌌니?” 라고 조용하게 아이들 말로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 빨리 알아듣고 그렇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 뜻인지 알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얘가 둔한 애인가 보다. 똥을 쌌으면 징징대야지” 라고 하자 애 아범이 “아니야요. 믿음이 있어서 그래요” 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아, 맞아! 징징대지 않아도 언제고 갈아주겠지 라는 믿음이 있으니 징징댈 필요가 없었구나! 참 잘 키웠다.” 라고 하며 둔한 애로 판단한 것은 실수였다고 덧붙였다.
이 애가 바로 안정 애착 상태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생후 18개월까지 생리적 욕구에 양육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면 유아는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믿으니까 기다릴 줄 알게 된다. 배고플 때 젖 주고, 기저귀가 젖었을 때 갈아주고, 안아달라고 할 때 안아주고, 졸릴 때 재워주고, 같이 놀아 달라고 할 때 놀아주면 아기는 양육자를 믿게 된다. 믿으니까 양육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양육자가 잘해주는 이 세상을 좋은 세상이라고 또 좋은 세상에 사는 좋은 사람이 잘해주는 자기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양육자는 아기에게는 세상이다. 양육자가 잘해주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고 양육자가 못해주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오디 셀러
우리는 옛날을 그리워한다. 왜 그리워할까? 옛날이 좋아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옛 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리 상황을 오디셀러라 한다. 2011년도 다 가는데 TV나 매스메디아는 회상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특히 지금은 잘 살고 있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조그만 행복을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보릿고개는 있을망정 간식이라고 없던 시절의 까만 갱엿이 그립고, 막과자나 뻥튀기가 그립고 까만 고무신을 그리워한다. 또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다다미 소리를 그리워한다. 이미 우리는 풍요 속에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에 맘 놓고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그때의 갱엿이 그립고 개떡이 그립고 앉은뱅이 썰매를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
이번 방학에 북인도에 다녀왔다. 인도에도 상류층문화는 있겠지만 인도의 대중문화는 하층문화이다.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나고 집은 도시를 벗어나면 옛날 우리 뒷간 같은 것이 주택이고 쓰레기와 오물 속에 악취는 진동하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그러니까 1950년 6.25 동란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산적은 없었다. 가난할망정 더럽지는 않았다. 내가 우리 아이가 철없을 때 가난한 친척집에 데리고 가면 엄마친척들이 못살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못사는 친척집에 가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나는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싫다.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나는 청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만큼 살아온 것이 대견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다. 인도에서 단기간 짧은 시간에도 대중 속에 섞여 여행하는 것이 호기심은 있었지만 편치 않았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지 정말 가난하고 힘들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디셀러는 단지 그리운 감정이다. 그리운 감정은 추억할 것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게 한다.
바늘구멍
옛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바늘구멍이라는 골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동지방에서의 교통수단은 오늘날 관광자원으로나 볼 수 있는 낙타이다. 부자의 낙타는 살이 찌고 짐도 많이 싣고, 장식도 주렁주렁 달았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나 가난한 사람의 낙타는 말라 비틀어졌을 뿐 아니라 장식도 없고 실을 짐도 많지 않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잘 빠져 다녔다고 하여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을 비천하고 뒤쳐지고 오갈 데 없는 자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비유했다.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의 고대도시 패스의 매디나 시장골목은 정말 바늘구멍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좁고 미로 같았으나 낙타들이 오늘날도 그 바늘구멍 같은 좁은 골목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낙타가 짐을 싣고 빠져 나갈 때 나는 벽 옆에 종잇장 같이 달라붙어 길을 내주었다.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은 권세와 간교함으로 검은 돈을 모았거나 깨끗한 돈이라 할지라도 강박적인 증세로 부자가 되었을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관심이 소유하는 쪽에 쏠리어 신보다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물질보다 이웃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오히려 가난한 것은 사회제도의 피해자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발달과정 속에서 특히 여섯 살부터 열두서너 살 때까지 근면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부모의 근면한 생활태도를 보고 자라면서 근면한 생활태도를 익혔을 때 큰 부자는 못 될망정 중산층의 작은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게으름은 자아의 에너지 소멸상태이고, 자아의 에너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기에 가난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 가난한 사람들이 나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도 있다. 나이 쉰 살이 다된 남동생이 25년 만에 무일푼으로 나타났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멀쩡한 사지와 좋은 머리 갖고 그 동안 돈을 하나도 못 모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누나들은 이렇게 재산을 모았는데 너는 뭐했냐고 물으니 가족이 없으니 돈을 모아야겠다는 목표가 안생기고 의지도 안 생겼다고 한다. 결국 돈도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으는 것이다.
요즈음 이기적 자본주의의 피해가 늘어나면서 자본주의를 이기심에 충실한 제도로 이윤이 생기면 승자 독식하는 자본주의는 물러가라고 뉴욕의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고 있다. 기업은 이윤독식을 하면 안 된다. 기업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기업의 가치실현을 위하여 나누어야 한다. 이것을 실천하는 기업을 요즈음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는데 모든 기업은 사회적 기업이어야 되고 자본주의 역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자본주의 일 때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가난한자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쉬워진다. 왜냐하면 곡간에서 인심나기에 부자는 맘만 먹으면 훨씬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자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불쌍하고 연민스러워하는 사람은 권력과 금력을 모두 거머쥐고도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7,80년 지나다 보니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극도로 심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그대로 좋은가하는 논의가 일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적 사회주의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본주의가 그대로 발전하려면 좀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인데 자본주의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는 민주주의의 철학이고 더 올라가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 기본적 가치를 망각하고 기업은 이윤만 추구하였다. 그 가치는 모든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고 최소한 동등한 기회를 갖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이다. 그리고 사회는 책임을 갖고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
잠
내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대라면 나는 당연히 잠을 잘 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잠을 많이 잔다는 의미가 아니다.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잠을 적게 잤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다보면 자동차로 떠나는 국내여행이든 비행기로 떠나는 외국여행이든 출발점에서 떠나는 것조차 모르고 잠이 든다. 고속버스가 터미널을 언제 떠났는지 모르게 곯아떨어지고 비행기에서도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맨다. 잠이 들었을 때 벨트를 매라고 승무원이 깨우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나는 잠이 쉽게 들고 그렇다고 잠에서 깨는 것이 괴로운 편은 아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참 괴로웠다. 나의 아버지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새벽형 인간이셨기에 날이 밝으면 큰소리로 책을 읽으셨고 집안 마당은 물론 골목길까지 귀신이 쓸어놓은 것처럼 큰 길까지 매일 깨끗이 쓸어놓으셨다. 특히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은 더욱 일찍이 그러하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는 것이 당연히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새벽같이 나를 단잠에서 깨우셨고 그때 참말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가 나를 깨워놓으면 나는 동생 방으로 가서 발만 들여 밀고 또 단잠을 잤다. 그러다 내가 세수하러 나오지 않으면 이방 저방 둘러보시고 찾아내어 또 깨우셨고 나는 동생 방에서 끌려 나와서는 또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일어나시고 밥그릇을 묻어 놓기 위해 깔아놓은 조그만 포대기를 이불삼아 덮고 나는 또 단잠을 잤다. 거의 매일아침 아버지와 나는 잠 때문에 숨박꼭질을 하다시피 한 전쟁이 나의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짜증나는 기억이다.
왜 그랬을까? 인생을 돌아보건대 나는 잠을 많이 잔 것 같지는 않다. 소녀시절엔 그 당시에는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 1m는 넘는 큰 궤착의 오디오 세트는 있었기에 한국 가곡과 팝송을 즐겨 들었지만 밤에는 책 읽는다고 잠을 못 잤던 것 같다. 12시가 되면 끊어지는 사설 전깃불 때문에 호야 불을 키고 책을 읽다보면 기름이 떨어질 때는 새벽녘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겠다고 춘천여중 때는 도서위원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춘천서점에서 외상으로 한 달에 열권씩은 샀으니까 시간이 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이 월급날 25일이면 외상술값이 아니라 외생책값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커서는 번역되지 않은 소설책을 영어로, 독일어로 읽는 재미에 잠을 최대한 줄였던 것 같다. 평생 잠을 실컷 못 잤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나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버릇이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닌가한다. 젊어서는 공부하고, 일한다고 나이 들어서는 일하며 운동하려니 잠을 줄일 수밖에. 감기가 들려다가도, 슬픔에 빠지려다가도,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인간관계로 화가 나다가도 잠만 자고 나면 거뜬해지니까 잠은 내게 가장 좋은 보약이었다.
그래서 한때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세레~피아” 라는 광고의 카피가 너무나 다른 세상이야기 같았다. 잠을 누가 못 자게 할까? 물욕과 권세욕과 애정욕과 질투와 미움이 아닐까. 요즈음 남편이 옆방에서 틀어놓은 T.V.나 아파트 밖에서 떠드는 아이들 소리에 잠이 깨는데 물욕이 생겨서 인가? 아니면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늙어서인가? 늙어서 무슨 욕심이 생겼을까? 나의 노욕은 못 보아도 남의 노욕은 보인다. 요즈음 정치권이 시끄럽다. 세대교체의 싸움인 것 같기도 한데 늦은 가을 힘없이 핀 한 송이 장미가 아름다워 보이는가?
<컴퓨터 중독>
오늘 9시뉴스에 중학교 2학년부터 컴퓨터게임을 하던 학생이 학교도 중퇴하고 매일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한밤중에 복면을 하고 편의점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사건이 나왔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임상적으로 말하면 컴퓨터 중독이란 아이가 엄마와 대상관계에서 대상결핍이 만든 현상이다. 무슨 뚱딴지 같이 컴퓨터가 좋아서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이지 어떻게 대상결핍이 되어서 그런것이냐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밥도 굶고 학교도 안가고 돈도 잃어가며 비현실의 세계에 빠져 정신착란을 일으키기까지하며 죽게까지 하는 원인이 단순히 게임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독성 성격은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이 가지는 이차적 문제이다. 중독자들의 사고에 의해 나오는 행동은 원시적인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정상을 일탈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중독성 특성을 갖고 있으며 그 특성은 초기 인간관계의 실패에 의한 자구책이다. 인간관계를 실패한 이들의 문제해결은 상실된 양육자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복원해 주는 것이다. 충족 되지 못한 대상 에너지를 다시 공급 받아 대상과 관련된 느낌이 포만감을 갖게 함으로써 대상결핍에 의한 문제로서 나타난 컴퓨터 중독현상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대상관계에서 주도권은 대상에게만 있다. 아이는 다만 환경이 바뀌면 좋아하거나 슬퍼하거나 즐겁거나 할 뿐이다.
나쁜 대상에 의해 양육된 영아는 자폐기, 공생기를 힘들게 괴롭게 보내며 격리개별화기에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에디프스 갈등기를 잘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것이 청소년기에 자폐증, 정신분열증, 우울증을 앓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은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만족스러움에 의한 것이고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도 또한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부족함에 의한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인가 공급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분 또는 괴로운 기분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의 필름에 영상이 맺힌다. 그 영상화된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자신의 느낌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느껴진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의 느낌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갖고 평생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마음, 성격, 운명이 이미 타고났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나의 어머니의 것이다. 그래서 하려고 해도 안 되고, 하면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마음대로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참을 수 있으며 해서는 안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다. 자아의 원형이 결정되는 시기에 엄마가 영아를 아무렇게나 다룬다면 영아의 자아는 엄마가 영아를 아무렇게나 다룬 것처럼 자신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대하는 자아를 갖게 된다. 이 자아가 반사회적이거나 병적인 자아가 되어 아이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아무렇게나 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아무렇게나 대하게 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아무렇게나 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아무렇게 대하며 컴퓨터 중독에 빠지거나 비행을 저지른다. 새로운 대상관계에서 귀하게 대함으로서 아이가 자신을 귀하게 대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컴퓨터 중독된 청소년을 위한 치료방법이다.
돈쓰는 애
벌써 이번학기도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다.
나의 가족복지 마지막시간은 전이의사소통 실습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 어느곳에서도 나의 이런 수업을 하는곳은 없을 것이다.
나는 팀별로 장난감보따리를 풀어 그속에서 각자의 가족을 표현할수 있는 캐릭터를 선택하게 하고 앞에 나와 자기가족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물론 의무는 아니지만 용기를 갖고 자기가족을 소개하는 지원자에게는 많은 점수를 준다. 그래도 40명 중 15명은 요지부동 플러스 점수를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25명만이 가족구성원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갖고 가족을 이삼분간 설명한다. 열다섯명은 가족의 비밀을 공개할 자신감이 없어서이다.
2~3분간 이러한 방법으로 내놓는 정보는 치료자가 최소한 30분 이상 혹은 열 번 이상 질문해야 나올수 있는 정보량이다. 그리고 각자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족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에 치료자 입장에서는 일거양득으로 쉽게 가족의 문제에 접근하기 쉽다.
이 전이의사소통을 통하여 가족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이미 죽은 사람도 빼놓을 수 없거나 빼놓기 싫어 표현하기도 하고, 동거가족을 이야기하며 집나간 사람을 이야기하고 이혼하거나 별거는 당연히 나타나고 심지어 조그만 쥐새끼가 있는 집에서는 쥐새끼나 또는 강아지나 큰개도 표현된다.
어떤 친구는 자신을 뺀 나머지 가족을 다 표현하고 나서 “나의 존재는 없어요.” 라며 끝낸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
참새가 세 마리 앞마당에 날아왔다. 참 겁도 없이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더니.... 왜 그럴까? 뻔한 이치다. 날이 추워지니 날아다니는 날벌레도, 기어다니는 애벌레도 땅속으로 꼭꼭 숨었을테니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겁이 없이 용감해질 수 밖에....
방글라데쉬의 호랑이 밀림지역 순나르반스에선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사는 밀림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겁도 없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어느날은 반대로 호랑이가 굶어 죽지 않고 살려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지붕위에 웅쿠리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새가 날이 추워지면 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해 잡힐 각오까지는 안하더라도 겁을 먹으며 사람들 앞으로 나오듯이 이 지역에서는 사람도 호랑이도 겁을 먹으며 서로 침범을 한다. 그래서 사람한테 막대기로 맞아서 다리를 다친 어미 호랑이가 다리를 절며 갓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했고, 사람도 호랑이한테 머리를 물려 머리통이 찌그러진 큰 상처를 갖고 살거나 팔다리를 호랑이한테 물려 한 개씩 뜯긴 사람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 호랑이굴 앞에서 물고기를 잡아 우리 돈으로 하루 7000원에서 9000원 정도 번 돈으로 대 여섯식구가 몇일을 연명해야 하는 방글라뎃시 사람들을 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은 자제능력으로 종족보존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겁을 극복하고 고통을 견디며 경쟁사회에서 자기스스로 살아남는다. 종족보존의 성향으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는 그 유전자를 유전받고 그 유전자가 성공하게 만든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라 희생하지 못하나 살아남기 위해 희생을 조율해가며 성공한다. 자녀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견디는 자제력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이를 이기적 희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파랑새 증후군도 있다. 마테를링크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힘들면 직장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통을 피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본인들은 더 많은 돈과 인기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직장을 옮긴다고 하지만 결국 직장을 옮겨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능력이 확장되여야하고 능력확장을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노력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나면 저절로 능력확장이 되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게된다.
조급하게 본인은 노력하지 않고 이리저리 직장과 때로는 직업까지 바꾸어가며 방황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그림자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는 빛이 시작되는 새벽에 작업을 한다고 한다. 빛이 있으므로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전에 당연히 아무것도 안보여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빛이 생기어 물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그림자이다. 콤플렉스가 공간이 열리는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내 정신의 그림자이다.
내가 내 육신의 그림자를 본지도 꽤 오래됐다. 어렸을 때 큰댁에 가서 자정 무렵 제사를 지내고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우리가족은 10리 길을 걸어 왔다. 그때건 지금이건 제사를 자정에 지내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사를 일찍 지내도 귀신은 귀신같이 알고 일찍 올 텐데 귀신을 믿는 사람들이 귀신을 못 믿고 귀신이 나온다는 자정이 되어서 제사를 지내니 얼마나 아이러닉한 이야기인가? 그 옛날 아주 어두운 밤인데도 어둡게 느끼지 않고 달빛이 매우 푸르고 매우 밝다고 느꼈다. 그래서 산모퉁이의 조그만 물체의 움직임도 다 느껴졌다. 제일 긴 아버지의 그림자와 다음에 엄마 그림자, 내 그림자 그리고 제일 작은 동생의 그림자를 비교해가며 그림자를 늘리려고 앞으로 갑자기 뛰어 나서기도 하고 동생과는 그림자를 서로 밟고 밟히지 않으려고 도망도 다녔다. 훗날 나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우리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 산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묘지자리를 구해서 그렇게 했다. 특히 우리자매가 커가는 모습을 보시며 같이 아파하고 같이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그 후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 그림자가 비취면 무서운 귀신 생각이 들어 놀라곤 했는데... 요즈음은 밤이라도 불빛이 사방에서 비추어져 그림자가 뚜렷하지가 않다. 내 정신의 그림자도 뚜렷하지가 않아 답답하다. 내 그림자란 내 몸뚱이만큼 내육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어두운 그늘이다. 어렸을 때 이 그늘이 내 일부인 것 같아 늘리려 했고 밟히지 않으려 했었다. 그림자도 나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육체의 그림자 외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그림자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질투하며 화를 낸다.
어떤 군인 아내는 남편이 진급에서 누락되자 남편은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여인의 마음이다. 아내는 자신이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정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고 상대방의 특징으로 보고 상대방을 미워한다.
내 정신의 그림자는 내 콤플렉스가 빛을 막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의식속에 있는 바로 나이다.
친정에서 부모역할을 하며 집안을 돌보던 아내가 늘 불행했다. 그래서 남편이 결혼함으로서 구해줬는데 친정이 멀리 이사하고 아내는 가축을 돌보며 아내가 행복해 하니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줄 일이 없어졌다. 남편은 아내가 불행으로부터 구원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여긴다. 남편이 구원자가 되려면 아내가 불행해야 하고 아내가 불행하려면 남편이 술이라도 먹어야 불행해지므로 술을 안 먹던 사람이 술을 먹게 된다. 남편은 처음 아내를 만날 때 아내로부터 기대받는 역할을 착실히 하려고 한것이다. Jay haley는 이 때 친정이 멀리 갔으므로 남편의 역할이 없어졌으면 이 때 아내가 남편에게 불행으로부터 구원해주길 기대하는 역할을 끊게 하는 것이 치료라고 했다. 기대하는 역할이 내 그림자이다. 남편의 그림자는 아내가 남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다. 내 그림자가 상대방이 기대한다고 착각한 그림자일 수 있는데 이 때 내 그림자를 과감히 버리어야 한다. 정신의 그림자인 나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난 후 빛 앞에 당당해 지는 것이다.
오디 셀러
우리는 옛날을 그리워한다. 왜 그리워할까? 옛날이 좋아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옛 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리 상황을 오디셀러라 한다. 2011년도 다 가는데 TV나 매스메디아는 회상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특히 지금은 잘 살고 있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조그만 행복을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보릿고개는 있을망정 간식이라고 없던 시절의 까만 갱엿이 그립고, 막과자나 뻥튀기가 그립고 까만 고무신을 그리워한다. 또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다다미 소리를 그리워한다. 이미 우리는 풍요 속에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에 맘 놓고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그때의 갱엿이 그립고 개떡이 그립고 앉은뱅이 썰매를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
이번 방학에 북인도에 다녀왔다. 인도에도 상류층문화는 있겠지만 인도의 대중문화는 하층문화이다.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나고 집은 도시를 벗어나면 옛날 우리 뒷간 같은 것이 주택이고 쓰레기와 오물 속에 악취는 진동하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그러니까 1950년 6.25 동란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산적은 없었다. 가난할망정 더럽지는 않았다. 내가 우리 아이가 철없을 때 가난한 친척집에 데리고 가면 엄마친척들이 못살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못사는 친척집에 가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나는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싫다.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나는 청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만큼 살아온 것이 대견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다. 인도에서 단기간 짧은 시간에도 대중 속에 섞여 여행하는 것이 호기심은 있었지만 편치 않았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지 정말 가난하고 힘들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디셀러는 단지 그리운 감정이다. 그리운 감정은 추억할 것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게 한다.
무기탄
해마다 10월이면 여의도 불꽃놀이가 서울의 큰 축제다.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캐나다, 싱가포르,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최소한 세 나라가 불꽃경쟁을 하고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파는 불꽃쇼이다. 아름다운 불꽃을 만드는 화약판매경쟁이다. 본질이 어떻든 불꽃놀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환호와 함께 체증이 다 내려갈 정도로 탄성을 지르게 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올해도 120만 명이 모였다니 서울시민 열 명중 한명은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강변에 모여 불꽃놀이를 즐긴 셈이다. 모인 사람 중에는 전날부터 구경하기 좋은 자리 잡고 텐트치고 기다렸다는 사람, 아침부터 사진 찍기 좋은 자리 잡고 삼각대 펼쳐놓고 있는 사람, 또 최소한 한 두시부터는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해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흩어지는 시간은 오후 8시 반 정도인데 한 밤중에 조명등도 없는데 120만 명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아수라장이 되어 큰 사고라도 날까봐 걱정되는 순간이다.
불꽃이 까만 하늘에 수만 가지 동물이며 꽃이며 여러 가지 형상으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손잡고 한강변에 나왔다. 아이들이 아름다운 심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나왔으니 참 좋은 부모들이다.
그러나 이 때 어떤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새치기를 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또 망신을 당하면서도 목적달성을 하는 부모를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사회는 어느 정도 성숙하여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대다수인데 그렇지 못한 부모의 모습을 보는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다. 새치기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새치기를 하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성품으로 자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노자도 거리낌이 없는 무기탄은 소인배의 짓이고 군자는 군자답게 시중이어야 한다고 했다. 기탄이 있어야지 무기탄이면 두려움이 없는 것이고 시간의 부정이다. 사람은 정해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인생의 목표이고 천명이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부름이라고도 하고 소명이라고도 하고 직업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기탄을 갖고 두려움을 갖아야 하는데 새치기 하는 아버지는 오늘 하루는 빨리 갔을망정 아이의 기탄없는 심성이 만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듯이 부모는 아이의 미래다.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40년 전 기적(미라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게도 살아가면서 저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했다.
기적 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에 총알은 귀밑을 지나가고 혼자 살아남는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기적의 순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젊었을 때는 그 기적의 순간을 기적인지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기적이고 은총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내일 눈을 뜨면 기적이 일어나 있었으면 좋겠다. 기독교 모임에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며 하다못해 아름다운 빛나는 태양을 주심에 감사하고 날씨가 따듯함에 감사하고 우리 모두 이렇게 모이게 해주심에 감사하고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해주심에 감사한다는 감사기도를 들을 때 별것을 다 감사한다니 참 웃긴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오만덩어리였다.
나는 이 나이까지 병원에 누워있지 않고 건강하여 내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느낀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요양 서비스를 받겠다고 건강보험 등급판정을 신청한 사람들을 판정하며 나라고 그런 상황에 놓이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내가 건강한 것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일찍 엄마 잃고 서울에 올라와 교수까지 하며 건강한 몸으로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나는 이것이 기적이고 은총인데 얼마 전까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이 건강하다고 내가 건강한것이 당연한 것, 다른 사람은 건강하지 못할망정 나만은 건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오만이었고,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은총이고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아이가 그 스트레스 많은 청소년 시절에 미치지 않고 일류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떤 지인이 고마워하라며 모든 부모가 나만큼은 다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고마워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내 아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제 보니 신께 감사하고 기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이 세상 좋은 일은 모두 기적이었다. 하찮은 병으로 치료받다가도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교통법규를 잘 지키며 안전운전을 하는 사람도 음주 운전자에게 받혀 장애를 가질 때 운이 나쁘고 실수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 처지가 아님이 기적이다. 아이들이 늦게나마 제자리를 찾아 사회구성원으로 잘 살고 있음을 그 동안의 노력으로 보아 당연시 할 수 있으나 지금 내 마음엔 기적이 일어났었다고 믿는다. 우리 아이들과 내게 기적이 일어나 잘 되었던 것이다. 이 순간에도 잘 되고 있는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기적이다. 그 기적은 지나고 보면 아닐 수 도 있는데 아슬아슬한 순간에 내게 일어났던 것이다. 기적은 끊임없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옛날 내가 모방송국에서 야간에 생방송을 하고 아침 등교 길에 나는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한참을 달렸다한다. 반대편 차선의 트럭이 멈추고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내 차가 트럭 앞에서 멈춘 일도 있었다. 내가 오늘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다. 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자고 졸라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니 내려올 승객의 줄이 길어 예약된 서울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 버스가 출발한지 30분 만에 대관령 입구에서 충돌사고로 우리가 끊었던 좌석의 1,2번 승객이 저 세상으로 갔다. 우리에게 표를 끊어주신 친정아버님 친구 분은 우리가족이 죽은 줄 알고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 적이 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닌가! 또 어려운 실업난에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직장에 들어간 것도 기적이고 건강한 것도 기적이고 착한 배우자 만난 것도 기적이고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난 것도 기적이다. 기적은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크라카우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사제생활을 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교황이 되자, 아우슈비츠를 찾아 첫 미사를 올리고 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하면서도 20일간 건강하셨던, 그리고 결국 지하 감옥에서 목이 잘린 콜베신부님을 성인반열에 올리므로 성지가 된 이곳을 내가 찾기 두 주전, 5월 28일엔 새 교황이 되신 독일 출신의 베네딕트 교황님도 오셔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오랜 동안 마음 한 구석을 떠나지 않았던 역사를 만나고 결국 나를 만나게 되는 자아발견이 바로 여행의 목적인 듯하다. 특히 이번 여행은 그러하다. 어떠한 유적지도 마음을 닫아 놓은 사람에게는 속내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열고 아우슈비츠의 슬픔을 같이 하기 위하여 64년 전의 빅터 프랭클과 함께 2만kw의 전류가 흐르는 가시철망으로 둘러싸인 죽음의 문을 통과했다. 바로 이곳 2층 벽돌로 된 막사 앞에 세워진 교단에는 유대인 중에서 뽑힌 악사들이 불어대고 두들겨대는 행진곡에 발맞추어 유대인의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희극적인 표정을 띤 게스타포의 두 번째 손가락이 잔인하게 삶과 죽음을 구별하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다. 그날도 서 있었고 오늘도 하늘로 팔을 뻗쳐 들고 쭉 늘어 서 있는 미루나무가 이처럼 공포에 질려 말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없다. 저 미루나무는 그날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면서 말 못했고 오늘도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하여 벙어리가 된 듯 저들의 바람소리는 싸늘했다.
폴란드의 군대막사 28개동이 있는 아우슈비츠까지 오는 긴 여정에서 유대인의 반은 배고프고 목마르고 병들어 죽었고 살아남은 유대인중 늙고 병들고 약하고 어린 70퍼센트 유대인은 긴 여행에서 지쳐있을 때, 그들은 목욕물이 식으니 빨리 옷 벗고 들어가라는 명령에 따라 속아서 가스실로 들어가 학살당하였고 살아남은 자의 30퍼센트 유대인은 맹물 같은 밀가루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견디며 노동을 하다 쓰러지는 죽음의 공포에 익숙해지며 살아남아야 했다. 30퍼센트의 유대인 중에 끝까지 살아남아 그날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아무리 가혹한 환경일지라도 인간의 내적 자유는 앗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프랭클은 1942년부터 3년간을 아우슈비츠에서 보내면서 시련의 이유를 알면 고통은 멈추고 시련의 이유가 삶의 진정한 의미이고, 삶의 의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깨닫고 잠재능력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논리의 ‘의미치료’ 창시자가 되었다.
어느 여행가는 ‘세계는 한권의 책이고 여행하는 사람은 그중의 한 페이지를 읽는다’ 라고 했다.
읽고 싶던 한 페이지, 꿈에 그리던 한 페이지를 찾아가서 오래 사모하던 연인을 만나듯 나는 아우슈비츠 250만의 유대인을 만났다. 오늘날 아우슈비츠에는 세계 각지로부터 추모행렬이 이어지는데, 독일인들이 유대인 다음으로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여행을 많이 하는 일본인들의 방문은 아주 보기 힘들다는데,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서대문 형무소나 독립 기념관을 찾고 있는 것인지…….
미루나무! 너는 다 보았지?
지금부터 38년 전 사람이 왜 사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주 인간적인 정신과의사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빅터 프랭클(Viktore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포켓북이었다. 그 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죽음의 수용소로 부터 받은 감명을 생생하게 전했고 그 현장을 언제인가는 찾아가서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추모하리라고 다짐했었다. 이번 여름 드디어 프랭클이 37세 나이에 삶의 의미를 갖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250만 명이 학살당하고 소각당한 현장에서 몇 안 되는 생존자로 살아남아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생생한 기록을 이 세상에 알린 폴란드 크라카우(krakau)로 향했다. “폴란드의 수도도 아니고 바르샤바에서 300km나 떨어진 크라카우에 왜 유대인 수용소가 생겼을까?”라는 의문부터 생겼다. 파란 땅이라는 의미의 폴란드는 대한민국 국토의 세배가 되는데 전국토의 80퍼센트가 해발 200m 이하의 구릉지로 끝없는 들판이 이어지고 평화롭게 보이기까지 하는 농업국가로 유럽의 가장 중심에 위치했다. 폴란드는 1989년 사회주의에서 민주화가 되었으나 실업자가 3년 전 18퍼센트에서 현재는 3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농업경제는 정보화 국가에 밀리고 있고 GNP 5,000달러로 EU에 보고되고 있는 나라이다. 국민성도 순하여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족이 노예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슬라브(Slave)족이라고 명명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까?
크라카우는 현재 인구 80만의 폴란드 제3의 도시로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동쪽으로 위치한 도시이다. 크라카우는 독일 발음이며 폴란드 현지 발음으로는 크라코프(krak'ow)로 불리는데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각지에서 유대인을 강제 이동시킬 수 있는 철도 요지였으므로 유대인 최고 밀집지역이 되었고 여기에서 50Km 떨어진 현지발음으로 오시비엥에 오시비엥침 세구역이 설치되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곳이다.
이름과 자아정체성
이름은 사람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인생각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르기 쉽게 임시로 이름을 지은 경우 종종 뿌리 없는 느낌을 받거나 자아정체감을 부인한다.
미국에서는 여자는 결혼하므로 원가족의 성을 버리고 난 후, 아주 다른 가계의 사람처럼 변할 수 있고, 스페인에서는 자녀는 아빠의 성에 엄마의 성을 덧붙이게 되므로 자녀는 두 가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특히 여성 학자들 사이에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모두 붙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또한 요즈음 신혼부부에게 유행하는 태명이나 별명, 애칭, 놀림이름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준다.
만일 어떤 별명이 어린이를 비현실적이거나 비정상적으로 각본화한다면 결과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외모 때문에 생긴 뚱보, 키다리, 점순이, 땅딸이, 면장님(얼굴이 길다는 뜻) 등 별명이 부정적 영향을 주고 괴물, 얼간이, 시골뜨기, 천사, 호랑이 등 행동적 특징은 성인이든 아이든 그렇게 살도록 한다. 딸아이가 아기를 갖았다. 축복이고 기적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다 갖는 아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즈음은 세 쌍에 한 쌍이 자연임신이 안된다고 하는데 내 딸이라고 세 쌍 중 한 쌍에 해당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뱃속의 아기가 엔젤이란다. 천사가 왔다. 기쁜 소식을 항상 전하길 바란다.
키커라는 별명을 아버지가 붙여준 아이는 맘에 안 들거나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을 때 이 아이는 옆에 아이를 차버리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의 별명으로 공격적으로 행동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셈이다.
아이에게 화가 나면 차버리라는 식의 각본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인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 람은 자기이름을 람지라고 소개했다. 우리가 인도 말을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이름 람에 선생님이라는 존칭어 지를 붙여 람지라고 부르게 하였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인도인의 자긍심처럼 느껴져 밉지 않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진 않았어도 자신은 매번 존경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난겨울 부부동반을한 열차를 운행하는 노동자 일행들과 같이 파리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가 큰맘 먹고 루이비통 가방을 하나씩 다 사들고 돌아왔다. 철도 노동자라 할지라도 월급이 많아서 별 부담 없이 샀을런지 몰라도 그 가방에 들어간 남편들의 노동이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가? 특히 그 가방을 들고 다니면 모조품으로 알 테니 걱정이다. 명품은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 마무리로 사용하면 고상하게 진가를 발휘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떨어진 명품은 가짜로 둔갑된다. 진가를 나타낼 때만 명품으로 사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명품을 나도 갖기만 하면 부티나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달라 보일 것 이라는 명품이라는 미신을 믿고 있어 잘못된 이 미신의 명품을 갖기 위해 도둑질도 하게 만들고 남자친구 선택의 잣대가 되고 못가지면 불행하게 느끼게까지 만들고 있다.
잡신을 맹신적으로 믿는 것보다 보이는 미신이니 생각이 없는 사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명품에 매달리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병든 사회의 일면이다.
유행은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나 다음계절에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다. 유행은 기원이라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브랜드는 반드시 기원을 갖는다.
전통이라는 가치와 유행이라는 순간의 빛, 상반된 두 개념 사이를 오가는 외줄타기를 하는 이 어려운 감각이 체질화한 브랜드만이 슈퍼 브랜드가 된다.
“소비 욕망은 문화적 유전자가 되어 여자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시대를 뛰어넘어 생존한다.” 이 명품에 대한 욕망을 상위 0.1%만이 가지면 된다. 문제는 명품에 대한 욕망이 일반화 되는 것이 문제다. 일반화된 욕망이 많은 출혈을 통하여 맹신적으로 목적을 달성했을지라도 어울리지 않을 때 이것이 낭비다. 옷을 사보지 않은 사람이 옷을 못 고르듯이 명품의 감각이 체질화되지 않은 사람이 가짜가 아닌 진짜 명품을 둘러도 아무도 명품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명품의 감각이 체질화된 사람은 모조품도 명품으로 둔갑시킨다. 그래서 서울시내에는 루이비똥 백은 3분마다 볼 수 있다고 하여 3분백도 나타나고 청소부 아줌마도, 수영장 아르바이트생도 사모님도 다 같은 로고의 명품 모습을 한 백을 들고 다닌다. 명품일지라도 이미 명품이 아니다. 명품을 들고 나 아닌 돈 많고, 권력 있고 품위 있는 남의 인생을 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명품은 따로 논다. 나를 명품으로 둔갑시키지 못한다. 명품이 나를 고귀하게 변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명품을 가짜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명품
명품은 가장 고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명품! 여성이면 누구나 명품을 좋아한다고 하면 틀린 이야기일까? 루이비통이 본토 불란서보다도 또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비똥은 국민가방으로 불릴 정도다. 한국의 명품시장은 매년 12%씩 성장하여 2010년에 45억 달러(5조원) 규모라 한다. 가계소득에서 명품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5%로 일본의 4%를 넘어섰다. 명품소비 1위는 미국이고 2위는 일본이다. 1억2000만 인구가 명품의 23%를 소비한다니 한때는 엔고를 무기로 유럽을 누비며 명품을 싹슬이 하여 명품업계를 회생시키더니 그 뒤를 이어 한국이 회생시키고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명품이라는 상표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상품의 가치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상표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명품중의 명품 샤넬. 한 사람의 여성, 하나의 이름, 하나의 전설, 아우라.
“유행 그것은 나다”라고 불길처럼 나타난 인간 가브리엘 샤넬을 생각해본다. 샤넬이 만들어낸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브랜드 때문에 가짜 브랜드가 생기었다.
정품의 품질은 조악한 싼 물건이 있을 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반상품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명품의 희소성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가브리엘 사넬이 내놓은 검은 수트나 인조보석을 상용하고 있다. 이미 사넬의 모조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고 모조품 존재자체가 브랜드 정품의 값어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얼마나 갖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들을 위하여 모조품도 인기가 있느냐 말이다. 명품에 대한 모조품은 명품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은 모조품은 이미 우리는 그것이 사넬의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일반화하고 있다. 이때는 미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지니지 않은 현시적 낭비가 명성에 버금가는 이유는 그것이 금전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금전적 능력이 명성과 명예에 지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명품이 성공과 탁월한 힘을 입증하기 때문이고 중세나 근대사회의 명가의 명예대신에 오늘날은 돈이 말해주는 세상이 왔다. 돈으로 산 명품이 중세의 명예에 버금가는 능력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치하지 않게 세련되게 자신의 고귀함을 말해준다.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건만 1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를 찼을 때 그의 명성을 다시 보게 된다. 이것이 명품의 역할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원래 명예도 돈으로 매매되었다. 재력이 있는 부르주아는 작위는 물론 족보를 사서 진짜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양반이 되고 싶어 맹진사 같은 가짜 양반이 나타났다. 구라파에서도 가짜귀족이 출현했으나 어딘가 어색했다. 가짜귀족들은 선조의 문장을 찾을 만한 문장원에 드나들며 찾은 문장을 마차나 그릇에 커다랗게 새기고 재고 다녔으며 가구에 조각해 넣었다. 가짜문장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차 앞에는 커다란 문장이 위엄을 떨치고 있는 모습을 영화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오늘날 로고를 과시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루이비통은 단지 루이비통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 루이비통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가방과 같은 액세서리에 붙는 로고가 옷에서는 목 뒤에서 가슴팍으로 옮겨왔고 심지어 소매 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속빈 현대인은 로고의 노예가 되어 돈을 쓰고 있다. 운동화도 로고 자체가 디자인이다. 운동화의 기능이 아니라 로고 값으로 값이 매겨진다.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인간명품 만드는 법)
풍수지리에 의하면 명당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땅의 장점을 찾아 정을 주면 명당이 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이다. 개개인의 장점을 찾아 인간 명품은 만드는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자기 새끼는 본능으로 잘 키우는 것 같다. 그러나 동물 중에 어떤 어미는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중도에서 새끼를 잃을 수도 있고, 새끼를 잘 양육하지 못 해 야생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 도 있다.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육체적으로 건강해야하고 주위의 더 힘센 야생으로부터 민감하고 이기지 못하면 피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말하듯이 인간도 건강하게 태어나야하고, 건강하게 태어나서도 잘 커야 한다.
태어난 후에는 신체적 건강과 정서적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로 신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해도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신체적 건강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때로는 폭력이 되고 무기가 된다.
그래서 모든 모성은 새끼의 신체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에 더욱 민감해야 모성으로서 책임을 다 할 기초가 되어야 한다.
어떤 모성은 아이를 위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그 모성이 직장까지 그만두고 직장에 있어야 할 그 시간에 집에서 무엇을 할까? 과연 아이를 위해서 그만두었는지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경제활동을 접고 집에만 있으면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 오히려 아이 때문에 희생했다는 억울함이 모성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된다.
집에서 집안일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둔 것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위해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지도 않다. 엄마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 또 아이가 행복하라고, 아이가 꼭 먹어야 하는 시금치와 브로콜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아이는 그 반찬이 먹기 싫다고 아이는 엄마에게 빵점을 주었다.
아이가 빵점 준 반찬을 강제로 먹이려니 엄마와 아이는 실랑이를 할 수 밖에 없고, 그나마 엄마가 직장을 나갔으면 아홉 시간이나마 아이들이 엄마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온 종일 한 공간에서 통제를 하니 아이들은 감시 속에 자유를 잃고 독립심이 없어지는 노예로 사육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자립심을 잃었으니 언제까지나 엄마의 통제 속에 있어야 하고 자율성을 잃었으니 혼자 성장할 수 없다. 아이가 세상에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닐지라도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난다. 그런 아이가 자기 인생을 위하여 성장할 수 없다. 아이는 오직 성장 할 수 있는 능력만 갖고 태어났는데 말이다.
모성기능
좋은 엄마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아이가 안 먹는다고 속상해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 음식이 아기 성장에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아기가 해롭게 느끼고 안 먹는 것이 잠시 동안임을 잘 안다. 좋은 엄마는 얼마 후에 아기는 잘 먹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야단법석 떨며 그것이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강제로 아기 입에 집어넣으려 하며 아기에게서 인정받으려하지 않는다.
현실은 아기가 상상하는 세상과 다르며 엄마는 아기의 상상은 아기가 사는 세상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엄마는 유아에게 대상제공을 해야 한다. 아이의 관심의 능력을 발달시키고자 필요한 기회를 제공하며 아무리 작은 것 이라고 할지라도 성취 뒤에 재능보다는 아기의 노력을 평가하는 수용과 인식이 아이의 미성숙을 허용하고 자발성을 질식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엄마는 자신의 가치와 사회의 가치를 전달한다. 아이가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하고 작곡하기 위해서는 배변 활동과 나팔 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기가 처한 대상 환경은 아기의 변화하는 욕구에 적응하면서 그 자체로 성장한다. 아기는 절대적 의존에서부터 상대적 의존을 거쳐 독립을 향한다. 엄마와 융합된 상태에서 분리되는 상태로 가는 것은 엄마가 촉진기능을 할 때 가능하다. 엄마가 젖을 떼야 아기는 젖이 떨어진다.
모성기능의 첫 번째 기능은 유아에게 전능경험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모성기능의 두 번째 기능은 적응에서 벗어나기이다. 적응의 틀은 새 정신기능을 사용하는 아기의 능력을 순간순간 감지할 수 있는 엄마의 기능으로 적응의 틀을 벗어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유아의 욕구에 모든 것들이 계속 존재하여 충족된다면 아기는 통제를 획득할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창조적인 몸짓, 울음, 항의, 엄마의 행동을 일으키는 행동이 필요 없게 되어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지 못하고 작은 신호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은 엄마로 보이지만 유아를 거세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차례 상을 보자마자 먹을 것이 많아 좋아하는 2살 된 아이에게 차례를 지낸 후에 다 줄 것이니 손대면 안 된다고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24개월이면 말귀를 다 알아 듣는다. 그리고 이 아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를 주었더니 빨대를 껴서 주어야 한다며 차례 상에서 관심을 끊었다. 이러한 일은 유아에게 적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 이 가르침이 내재되어 아이를 인내하게하고 통제하게 하는데 이것이 내통제(자기통제)이고 자율성의 획득이다. 이는 분리개별화기에 꼭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4개월 전만 해도 차례 상에 관심을 갖던 28개월 된 아이는 차례 상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고 어른들이 절을 하면 같이 절을 하고 쉬었다가 다시 절을 할 때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소파에서 얼른 내려와 또 어른들을 따라 절을 한다. 그리고 미끄럼을 탈 때 4개월 전 깔아준 방석을 기억하고 방석부터 깔아야 된다고 방석을 옮기는 것은 어른들의 행동 하나 하나는 아기의 기억 속에 알알이 박혀 아이의 정신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성은 아기에게 전능경험을 주기 위하여 아기의 재능보다는 아기의 노력을 평가함으로서 자발성을 질식시키지 않고 두 번째로 아기가 적응의 틀을 벗어나게 함으로서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이는 자기통제와 자율성 획득의 계기가 된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상적인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엄마가 만드는 충분히 좋은 인간환경, 즉 아기의 욕구에 따라 곧바로 적절하게 반응하는 인간 환경에서 보통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위니컷은 1949. BBC. 방송의 PD 이가 베니기(Iga Bengie)와 9회에 걸친 방송대담 프로그램의 제목을 “헌신적인 보통의 엄마”로 정하게 되었다. 헌신적이기에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헌신적인 보통의 엄마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엄마의 사랑은 원초적이고, 소유욕이 있으며 식욕, 심지어 저주까지 있다. 그 안에 관용이 있으며 겸손뿐 아니라 힘도 있다.
위니컷은 자신 안의 어디엔가 자신의 아이를 미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아기는 엄마의 생활을 방해하고 엄마를 노임을 주지 않는 하인처럼 다루고 아기의 흥분된 사랑은 타산적 사랑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오렌지 껍질처럼 던져 버린다. 엄마가 만족시킨 것을 알지 못하고 엄마의 미움을 허용 못하고 의심이 많고 엄마가 만든 좋은 음식을 거절하며 엄마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헌신적 엄마여야 한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의사나 보육사보다 아기와 관계에 구체적으로 참여한다.
헌신적 보통 엄마요소는 모든 아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으로 아기의 초기의 심리적 성장과 정신과 신체의 성장. 또는 미숙한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아기의 성격의 성장과정을 촉진시키는 긍정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기는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자신의 값을 결정해 버린다. 아기는 있는 그대로 받아줄 때 정체성을 찾으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완벽한 엄마는 오히려 자녀의 열등감과 무능감을 만든다. 좀 부족하더라도 네가 최고라고 해주는 엄마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아이의 장점을 찾고 높이 평가하고 독특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보통의 엄마의 중요한 역할이다. 아이가 돌아온 탕자일 때 품을 수 있으나 체벌은 일관적이고 수치감을 갖지 않도록 엄마는 자기감정을 통제하여야 한다.
아기와 좋은 관계를 위하여 아이의 수줍음을 건드리지 말고 옆에 머믈러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을 가치 있게 느낀다. 아이는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엄마를 원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들어주는 엄마를 원한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허용적이지 말고 아이와 거리를 유지하며 받아주고 허용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권위 있는 엄마여야 한다. 울타리란 법이나 제도, 양심. 예절이다.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엄마의 기운을 먹고 자라도록 자신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헌신적인 보통의 엄마다. 보통의 엄마는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위니컷이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는 엄마노릇하지 않는 엄마를 말한다. 유아가 질문하면 바로 바로 대답하고 실수해도 면박안주고 면박을 주면 수치심이 생기며 자신감이 없어진다. 물론 따라서 열등감이 생긴다. 그리고 아이가 없는 곳에서 흉 안보고 "아니야 안 돼" 라는 소리 안하고 "참 잘한다. 그래 그래" 하며 지지하며 기다려 주는 엄마이다. 칭찬해주면 칭찬의 말은 근면성의 기초가 되고 비난은 열등감의 기초가 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지체 없이 당장 주었을 때 충분히 받았다고 느끼도록 용전을 만들어 주는 엄마이다.
그래서 충분히 좋은 엄마는 완벽을 요구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며 지식이나 재능보다 인성을 중요시 하는 엄마이다. 조건부 사랑을 하지 않고 잘할 때는 기뻐하고 못할 때는 안타까워하며 아이와 함께 성숙해가는 엄마다.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창조적 능력을 키워주려고 노력하는 엄마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무엇을 하도록 절대 유도하지 않고 같이 있어주며 뒤따라가는 엄마이다. 엄마가 유도하면 아이의 창조성이 생기지도 않는다. 아이의 부적절한 행동에 과민 반응하지 않고 수용한다. 인내모드, 사랑모드가 필요하다. 아이가 울 때는 아이가 나를 화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는데 절제를 배우지 못했다고 느끼며 자녀를 믿어주는 엄마이다. 아이가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할 때는 모든 것이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아이가 기죽을까 상처 받을까 걱정되어 손을 들면 이 아이는 타인에게서 상처받게 된다. 아이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비하하지 말고 아이마음에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키워주는 엄마이고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는 보통의 엄마가 충분히 좋은 엄마다. 이런 엄마의 태도와 엄마의 불쾌, 쾌의 느낌이 아이에게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반복되면서 습관이 되고 이것이 아이의 성품이 된다. 따라서 충분히 좋은 엄마는 성품이 좋은 아이를 만들게 된다. 따라서 성품이 좋은 아이는 행복한 어린이로 성장한다.
대상관계에서 현실적 부모자녀관계에 관심을 가진 위니캇은 처음에는 자녀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으며 차츰 상대적 의존기를 거쳐 상호적인 관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자녀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동안에 자녀에게 충분히 좋은 대상이 되어 줄 수 있을 때 자녀는 참자기(true self)를 형성하고 건강할 수 있다고 했다.
충분히 좋은 대상이란 안아주고 공감해주고 반영해주고 버티어 주는 어머니이다.
안아주는 어머니는 출생 후 아기 존재의 연속성을 위하여 자궁 같은 환경을 제공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아는 해체 불안을 경험한다. 안아줌으로로써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과 편히 쉴 수 있는 능력,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의 토대가 마련된다.
공감적으로 적응해주는 어머니는 유아에게 공감을 해줌으로 자신의 환상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게하며 이 경험은 자신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전능환상을 갖게 한다. 따라서 힘 있는 자신감과 창조성의 토대가 된다. 공감을 못 받으면 환멸을 느끼며 환상세계를 상실하고 거짓 방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여 동심과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어른 같은 아이, 약삭빠른 아이로 발달하며 창조성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반영 해주는 어머니가 중요한 것은 유아는 반영 받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살아 있는 자기감정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버티어 주는 어머니가 필요한 이유는 유아는 건강한 인격 발달을 위해서 공격성이 억압되지 않고 인격 안에 통합될 필요가 있다. 공격성을 마음 놓고 경험 할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공격성을 보복하지 않고 버티어 줄 때 공격성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공격성의 사용을 통해서 환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발달한다. 이러한 네 가지 요소를 갖춘 대상이 유아기의 부모자녀관계에서 충분히 좋은 보통의 엄마이다. 부모자녀관계에서 수줍어할 때 수줍음을 건드리면 아이는 달팽이처럼 오그라든다. 더 넓은 대상과도 수줍어하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기다린다. 다시 잘하리라고 믿는 엄마가 좋은 엄마이다.
충분히 좋은 엄마
좋은 엄마는 아이를 행복한 아이, 행복한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엄마이다. 이는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목표이고, 행복한 아이, 행복한 성인은 대상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많은 대상관계이론 중 부모와 자녀가 갖고 있는 내적 대상관계를 강조한 멜라니 클라인이나 오토 컨버그와 실제로 경험을 통하여 초기의 부모와 자녀관계에서 현실적 대상의 역할을 강조하는 도널드 위니캇은 영국 대상관계학파의 축으로서 대상관계이론의 기초를 구축했다.
부모자녀관계라고 하면 될 것을 기필코 대상관계(object relationship)라고 하는 이유부터 말해야겠다.
대상관계는 실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한 개인이 모든 사람들, 모든 사물들과 갖는 관계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부모자녀관계에 기초한다. 한 개인은 인간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인간관계가 나쁘면 불행하다. 그러므로 부모자녀관계가 행복해야 모든 인간관계가 좋고 행복하다.
특히 대상관계이론에서 유아기 부모자녀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유아기 이후의 부모자녀관계는 유아기 동안의 부모자녀관계 경험에 의존하고 연속되기 때문이다.
무당에게 정말 아기씨 귀신이 왔을까? 그들이 밥줄이 달렸는데 사실을 실토 하겠는가! 그날 사람들이 만원, 이 만원 쥐어 준 돈만해도 20만원은 족히 될 것이다.
누가 돈을 꺼낼까?
답답한 사람이 꺼내겠지. 딸이 대학을 가야하는데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아무리 무식한 무당도 서쪽에 명문대학이 있는 것쯤은 아는지라 “서쪽으로 가지 말고 동남쪽으로 가야 붙어, 걱정하지 마!”라고 안심시킨다. 불안한 사람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돈을 쓴 것을 무당은 다 안다. 무당은 항상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지시한다. 두리뭉실 얼마나 기막힌 답인가?
돈 갖다 쥐어주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옷차림은 돈 만원을 우습게 볼 처지들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오죽 답답하면 막 갖다 쥐어줄까? 답답한 사람에게는 돈 만원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무당이 처음보는 아무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뭐라고 하는지 궁금했고 답답한 것도 좀 있기에 용기를 내어 지갑을 열었다.
만약 내가 지갑을 열지 않았다면 돈은 안 나갔을망정 무당의 허튼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 소릴 듣고 시집보낼 새로운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말조심해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하게 된 것이다. 지갑은 잘 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옛부터 돈 싸들고 무당을 찾는 것이지. 원시사회일수록 신기를 믿는다. 그런데 우리 딸이 공부 많이 하는 애 인줄 어떻게 알았을까? 내게서 느껴지는 것이었을까? 무당이 하는 이야기는 만백성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두루뭉실 누구에게 해도 해석하기 나름이다. 하다 못해 성격검사를 하고 똑같은 해설지를 똑같이 열명에게 주었는데 신촌에 있는 명문대생들이 자기성격에 90%이상 맞는다고 대답하는 실험현장을 본 적이 있다.
심리검사건 무당이건 누구에게나 찍어다 붙이면 되는 것만 이야기되고 또 어떤 것이든 자신에게 찍어다 붙여 해석하면 다 맞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약한 답답한 우리는 실오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심리검사도 하고 무당도 찾는다.
아기씨 당굿판
살구꽃과 은행나무숲이 우거진 나즈막한 산 밑에 질펀한 들판이 있어 옛부터 진퍼리라고 불리는 곳에 북쪽에서 나라를 잃고 시녀들과 임진강을 건너 피난 온 다섯 공주 중 첫 번째 공주아기씨를 모셨다는 아기씨당에서 열셋굿거리를 한다고 한다.
언제나 무당이 굿을 하는 날은 비가 부슬부슬 오거나 비온 뒤 맑게 개이지 않아 날씨가 꾸물거린다. 그래야 귀신이 나오기에 분위기도 맞고 어떻든 어울린다.
굿을 한다고 하니 한 5~60명은 족히 모인 것 같은데 방송국에서도 나오고 교수들도 소개 한 사람만 네명은 되니 나같이 밝히지 않은 교수도 있을테고, 쓰잘데없이 정치꾼들도 모여들었다.
아직은 시월인데도 날씨는 매우 한기를 느끼게 만든다. 내가 오늘 간 아기씨당은 이조말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기 전부터 왕십리 마을 동네의 안녕과 복을 빌기 시작하면서 굿이나 제를 올렸던 곳이다. 옛 부터 왕십리 처녀는 타동네로 시집을 가더라도 신랑이 처가에서 삼년이상 살다가 첫 아기를 낳은 후에 신랑신부가 같이 시집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인 후 풍파가 있어 다시 왕십리로 돌아와서 살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관동지방에도 널리 퍼져 있다. 또 왕십리에서 태어나 부자가 되어 타동네에 가서 살면 평탄치 않은 생활을 하게 되므로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아기씨당에 와서 참배를 하고 가야 순탄했다고 하는데 곧이 들리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왕십리에서 태어난 사람은 젊어서는 객지에서 살지언정 늙어서는 다시 왕십리로 돌아와서 살았다고 하니 이것은 왕십리의 다섯 아기씨들이 왕십리에서 태어난 사람 누구나 타동네에 나가서 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어느새 굿이 시작되었다.
아기씨당의 당주 김옥엽이라는 무당이 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사당에 등장하더니 탱화앞에 큰절을 하고 꽃단장을 하기 시작한다. 사당에 웬 화장대가 놓여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화장대 앞에 닥아 앉아 분을 뽀얗게 바르고 눈썹을 둥글게 정말 무당처럼 그린다. 두 사람이 달라붙어 루즈를 이것저것 권해도 싫다고 애기처럼 몸을 비비꼬더니 뜯지도 않은 새 루즈를 꺼내주니 좋다며 새빨갛게 바르고 약지로 조금 묻혀 이마와 양 볼에 연지곤지를 찍는다. 그리고 남색치마를 입고 연꽃을 양손에 치켜들고 빨간 보자기를 연꽃위로 씌우고 대문간으로 갔다가, 우물가로 갔다가, 제단으로 갔다가 하며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때 무당 앞에 아무도 못서게 하는 폼이 아기씨 귀신을 부르는 예식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예식(13굿거리)이 서울의 무형문화재 33호라고 한다. 무당 김옥엽씨가 일흔셋이라 그런지 껑충껑충 뛰는 일도 없고 조금 흔들다가 주저리 주저리 떠들고, 조금 흔들다가 타령식으로 이야기하는 형태이다.
무당이 아기씨가 왔다고 하니 어느 중년남자가 돈 만원을 무당에게 쥐어준다. “장가 언제 갈 것 같으냐고?” 그것을 묻는 것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자 “올해도 장가 못 간다.”라고 대답한다. 후에 옆 사람에게 알아보니 정말 장가를 안간 쉰이 다 된 남자였다. 무당이 정말 뭐를 알고 한 말일까, 아니면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닐까? 나도 굿을 몇 번 구경 간 적이 있고 떡도 얻어먹기도 했었다. 이번엔 구경꾼이 아니라 굿판을 벌린 주인이 되고 싶었다. 이왕 굿을 주관한 사람은 지자체이니까. 그래서 사당에 쌀이나 떡이나, 초, 미나리, 과일, 과즙, 정종, 고기 등을 바치진 않았지만 돈 만원을 꺼내 무당에게 건넸다. 돈을 받자마자 무당은 내게 “사돈이나 친정집과 내년 1, 2월에 말이 얽킬 것이니 입조심 해야 돼. 내년 1, 2월에 친척들과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아니 우리 딸 때문이라고 하니 “그 애는 시집을 갈 생각하지 않고 공부 더 한대!.”라고 해서 “박사 끝났는데 무슨 공부를 더 하겠어요. 본인이 시집 가려고 하는데요.”라고 해도 “그 애는 공부해야지 시집 못 가.”라고 한다. 그래서 머리 박박 깍고 양단으로 바지, 저고리 입은 여자 보고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물으니 “굿을 하세요. 동지 지나자마자 입춘되기 전에 굿을 하면 추석되기 전에 시집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