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갤러리2

아킬레스근

  아킬레스근 하면 약점, 상처받을 수 있는 부위, 콤플렉스, 예민한 주제, 사람의 가장 미약한 부분으로 잘 겨냥된 화살로 쏘아 마치 전복되는 탑처럼 심리적으로 좌절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두루두루 쓰인다.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아킬레스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물에 포획된 도시의 성문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아폴로가 쏜 화살이 그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관통했다. 그는 심한 고통으로 신음소릴 내며 마치 전복된 탑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그녀의 아들 아킬레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지옥의 강 스틱스에 담갔다. 일단 지옥의 강처럼 강한 스틱스에 한번 담겨지면 담금질되어 강해졌을 텐데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잡고 담가야 했기에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담겨지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테티스가 손으로 잡았던 부위인 발뒤꿈치뿐이기에 이를 잘아는 아폴로는 아킬레스의 오직 약한 발뒤꿈치를 명중하였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부분이 각기 다르더라도 테티스가 잡은 부분은 있기에 어딘가 누구나 아킬레스근이 있기 마련이다. 신체적으로도 누구나 힘이 들면 발병하는 부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이 병이나고 어떤사람은 간이나 소화기관이 병이나고 나는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허리병이 난다.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근이고 치료자는 우선 이 아킬레스근을 찾아 건드려 치료를 시작한다.

해리포터의 배경인 옥스포드대학식당

케르베로스

 저승사자 케르베로스는 늪지대의 호숫가에서 저승을 지키는 문지기 개이다. 케르베로스는 저승사자한테 붙잡혀 온 사람들 중 누굴 저승에 잡아둘지 아닐지 정확히 알고 있다. 누구든지 감히 다시 되돌아가려고 하기만하면 그 자리에서 그들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그래서 케르베로스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험악한 문지기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문턱을 지키는 괴물이라는 뜻이다.
 우리사회에서 문턱을 지키는 대부분의 사람은 여성이다. 이들은 사장님방 앞 비서실에서 방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영접하는 것뿐만 아니라 겁을 주기 위해서 고용된다. 이러한 케르베로스를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무의식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내면의 파수꾼, 즉 자아의 심판관이 되어 방어기제로 자신을 지킨다. 이 파수꾼은 불청객이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특히 무의식의 암흑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오는 것을 감시한다. 파수꾼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의식은 의식의 세계로 드나드는데 이것이 꿈이고, 때로는 심리치료사가 파수꾼 게르베로스를 달래면 무의식의 파편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 무의식의 파편을 심리치료사가 딱잡아 물어주면 저승으로 돌아가려던 파편이 의식화되어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케르베로스는 무의식의 안전장치이다.
불교에서는 아침에 도(道)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안전장치가 풀려야 도를 깨치게 된다. 케르베로스가 잠자거나 무력하게 만들어 자신을 탐구하도록 만드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道닦는 것이고 자기 발견이다

나는 아리아드네가 되고 싶다.

자신의 꿈이나 영상 속에 감금된 환자들이 무의식의 미로 속에서 자아가 수시로 유아기로 퇴행하고 있을 때 자신을 통제 할 수 있고 정돈된 현실로 되돌아 올 수 있게 손을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심리 치료사이다.
아리아드네는 연인 미노타우로스를 배반하고 아테네의 청년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어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빠져나올 때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선물로 준다. 
아리아드네는 미로 입구에 실타래 끝을 매듭지어 묶고 테세우스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실타래를 손에서 놓지 말라고 당부한다. 현실로 돌아오려는 의지를 내려놓지 말라는 것이다.
화가 난 미노타우로스가 미로의 한 가운데서 테세우스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밤새 지키다가 깜빡 잠들어 버렸다. 테세우스는 잠자는 미노타우로스를 기습하여 이마를 정통으로 찌르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아리아드네가 준 실타래의 도움으로 미로를 찾아 다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미로 속으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현실과 연결해주는 끈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길을 잃지 않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건강해질 수 있다. 여기서 미노타우로스는 현실의 의식이다.
그 현실이 건강하다면 몰라도 그 현실이 병리적 환경이라면 병리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이 노이로제이다. 건강한 현실에 적응 못하고 미로를 헤매다가도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의미를 깨닫고 현실로 돌아오려는 의지로 원래의 적응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이 회복력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건강한 생활을 한다. 심리학자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카너먼은 망하는 회사는 회복력이 없는 회사라고 말하였듯이 개개인도 가족도 회복력이 없으면 다시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다. 개인도 가족도 회사도 누구나 적응에 문제를 가질 수 있다. 누구나 문제를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회복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개인이나 가족이나 회사를 평가할 때 현재 문제가 있느냐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력이 있느냐를 진단해야 한다. 이 회복력은 물론 구성원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관계성을 통하여 가족의 레질리언스를 강화시키며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리아드네이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려는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빅터프랭클이 생각난다.
빅터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닥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 수도 있었고 살려고 한다고 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생을 포기할수도 있었다. 이때 프랭클은 왜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찿으므로 살아 돌아올수있었고 그는 훗날 생의 의미를 못 찾아 헤매는 정신과환자의 안내자인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아킬레스근

  아킬레스근 하면 약점, 상처받을 수 있는 부위, 콤플렉스, 예민한 주제, 사람의 가장 미약한 부분으로 잘 겨냥된 화살로 쏘아 마치 전복되는 탑처럼 심리적으로 좌절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두루두루 쓰인다.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아킬레스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물에 포획된 도시의 성문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아폴로가 쏜 화살이 그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관통했다. 그는 심한 고통으로 신음소릴 내며 마치 전복된 탑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그녀의 아들 아킬레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지옥의 강 스틱스에 담갔다. 일단 지옥의 강처럼 강한 스틱스에 한번 담겨지면 담금질되어 강해졌을 텐데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잡고 담가야 했기에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담겨지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테티스가 손으로 잡았던 부위인 발뒤꿈치뿐이기에 이를 잘아는 아폴로는 아킬레스의 오직 약한 발뒤꿈치를 명중하였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부분이 각기 다르더라도 테티스가 잡은 부분은 있기에 어딘가 누구나 아킬레스근이 있기 마련이다. 신체적으로도 누구나 힘이 들면 발병하는 부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이 병이나고 어떤사람은 간이나 소화기관이 병이나고 나는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허리병이 난다.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근이고 치료자는 우선 이 아킬레스근을 찾아 건드려 치료를 시작한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 

참새가 세 마리 앞마당에 날아왔다. 참 겁도 없이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더니.... 왜 그럴까? 뻔한 이치다. 날이 추워지니 날아다니는 날벌레도, 기어다니는 애벌레도 땅속으로 꼭꼭 숨었을테니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겁이 없이 용감해질 수 밖에....
 방글라데쉬의 호랑이 밀림지역 순나르반스에선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사는 밀림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겁도 없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어느날은 반대로 호랑이가 굶어 죽지 않고 살려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지붕위에 웅쿠리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새가 날이 추워지면 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해 잡힐 각오까지는 안하더라도 겁을 먹으며 사람들 앞으로 나오듯이 이 지역에서는 사람도 호랑이도 겁을 먹으며 서로 침범을 한다. 그래서 사람한테 막대기로 맞아서 다리를 다친 어미 호랑이가 다리를 절며 갓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했고, 사람도 호랑이한테 머리를 물려 머리통이 찌그러진 큰 상처를 갖고 살거나 팔다리를 호랑이한테 물려 한 개씩 뜯긴 사람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 호랑이굴 앞에서 물고기를 잡아 우리 돈으로 하루 7000원에서 9000원 정도 번 돈으로 대 여섯식구가 몇일을 연명해야 하는 방글라뎃시 사람들을 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은 자제능력으로 종족보존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겁을 극복하고 고통을 견디며 경쟁사회에서 자기스스로 살아남는다. 종족보존의 성향으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는 그 유전자를 유전받고 그 유전자가 성공하게 만든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라 희생하지 못하나 살아남기 위해 희생을 조율해가며 성공한다. 자녀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견디는 자제력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이를 이기적 희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파랑새 증후군도 있다. 마테를링크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힘들면 직장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통을 피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본인들은 더 많은 돈과 인기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직장을 옮긴다고 하지만 결국 직장을 옮겨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능력이 확장되여야하고 능력확장을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노력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나면 저절로 능력확장이 되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게된다. 
조급하게 본인은 노력하지 않고 이리저리 직장과 때로는 직업까지 바꾸어가며 방황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세익스피어의 마을

그림자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는 빛이 시작되는 새벽에 작업을 한다고 한다. 빛이 있으므로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전에 당연히 아무것도 안보여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빛이 생기어 물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그림자이다. 콤플렉스가 공간이 열리는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내 정신의 그림자이다.
내가 내 육신의 그림자를 본지도 꽤 오래됐다. 어렸을 때 큰댁에 가서 자정 무렵 제사를 지내고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우리가족은 10리 길을 걸어 왔다. 그때건 지금이건 제사를 자정에 지내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사를 일찍 지내도 귀신은 귀신같이 알고 일찍 올 텐데 귀신을 믿는 사람들이 귀신을 못 믿고 귀신이 나온다는 자정이 되어서 제사를 지내니 얼마나 아이러닉한 이야기인가? 그 옛날 아주 어두운 밤인데도 어둡게 느끼지 않고 달빛이 매우 푸르고 매우 밝다고 느꼈다. 그래서 산모퉁이의 조그만 물체의 움직임도 다 느껴졌다. 제일 긴 아버지의 그림자와 다음에 엄마 그림자, 내 그림자 그리고 제일 작은 동생의 그림자를 비교해가며 그림자를 늘리려고 앞으로 갑자기 뛰어 나서기도 하고 동생과는 그림자를 서로 밟고 밟히지 않으려고 도망도 다녔다. 훗날 나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우리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 산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묘지자리를 구해서 그렇게 했다. 특히 우리자매가 커가는 모습을 보시며 같이 아파하고 같이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그 후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 그림자가 비취면 무서운 귀신 생각이 들어 놀라곤 했는데... 요즈음은 밤이라도 불빛이 사방에서 비추어져 그림자가 뚜렷하지가 않다. 내 정신의 그림자도 뚜렷하지가 않아 답답하다. 내 그림자란 내 몸뚱이만큼 내육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어두운 그늘이다. 어렸을 때 이 그늘이 내 일부인 것 같아 늘리려 했고 밟히지 않으려 했었다. 그림자도 나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육체의 그림자 외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그림자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질투하며 화를 낸다.
 어떤 군인 아내는 남편이 진급에서 누락되자 남편은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여인의 마음이다. 아내는 자신이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정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고 상대방의 특징으로 보고 상대방을 미워한다.
내 정신의 그림자는 내 콤플렉스가 빛을 막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의식속에 있는 바로 나이다. 
친정에서 부모역할을 하며 집안을 돌보던 아내가 늘 불행했다. 그래서 남편이 결혼함으로서 구해줬는데 친정이 멀리 이사하고 아내는 가축을 돌보며 아내가 행복해 하니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줄 일이 없어졌다. 남편은 아내가 불행으로부터 구원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여긴다. 남편이 구원자가 되려면 아내가 불행해야 하고 아내가 불행하려면 남편이 술이라도 먹어야 불행해지므로 술을 안 먹던 사람이 술을 먹게 된다. 남편은 처음 아내를 만날 때 아내로부터 기대받는 역할을 착실히 하려고 한것이다. Jay haley는 이 때 친정이 멀리 갔으므로 남편의 역할이 없어졌으면 이 때 아내가 남편에게 불행으로부터 구원해주길 기대하는 역할을 끊게 하는 것이 치료라고 했다. 기대하는 역할이 내 그림자이다. 남편의 그림자는 아내가 남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다. 내 그림자가 상대방이 기대한다고 착각한 그림자일 수 있는데 이 때 내 그림자를 과감히 버리어야 한다. 정신의 그림자인 나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난 후 빛 앞에 당당해 지는 것이다.

<자기표상>

모든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세상사를 보는 눈의 각도가 다르고 보는 대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를 본다면 어떤 사람은 만든 원리가 무었인지 보려고 한다.
대상표상의 세계에 각인된 과거의 경험이 세상사와 사물에 대한 준거 틀이 된다. 성인이 되어 의식의 세계에서 이미지의 질을 결정해야 할때 영아가 커서 어른이 되어도 표상의 세계에 설치되어 있는 감별기능을 하는 여과기를 거쳐 어렸을 때 그 사물을 본 엄마가 결정한 결정대로 지금 성인이 된 사람이 결정한다면 어떠할까? 그런데 그렇다.
결정을 잘못하여 문제를 만들어 내는 머릿속의 귀신이 바로 양육자의 이미지이다. 영아시절의 이미지의 상 즉 파지와 용전과 향전에 인색했던 이미지를 치료자가 새로운 파지와 용전과 향전을 통해 새로운 함입과 감별. 통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치료다.
더 이상 자괴감에 의한 자학적 사고와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 항구성을 정립할 수 있는 자아의 현실거래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치료다.
향전의 우회는 공향을 일으킨다.
 영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 안에 원하는 만큼 주는 것이 용전인데 그렇게 하지 않을때 용전의 왜곡이 생긴다.
용전의 왜곡은 자신을 못 믿는 불신의 씨가 된다.
비판보다는 지지를, 거절 보다는 수용을, 좌절 보다는 희망을 갖도록 왜곡을 바로 잡는것이 치료다. 치료는 지지와 수용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파지란 한알의 밀알이 썩어 한말의 밀알이 나올 수 있는 새싹이 되듯이 부모가 썩어 그 힘으로 아이가 새싹처럼 자랄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다.
아이가 속썩인다고 할 것이 아니라 부모는 썩어주어 좋은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를 속썩이는 것은 영양분을 달라는 것이다.
파지의 결핍은 사람을 오그라들게 하는 두려움을 야기한다.부모가 썩으며 즐겁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파지이고 그러면 아이는 그 에너지를 받아 잘 자랄수 있다. 동식물이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잘 자라듯이 말이다.

영국 체스터거리의 육교

아킬레스근

  아킬레스근 하면 약점, 상처받을 수 있는 부위, 콤플렉스, 예민한 주제, 사람의 가장 미약한 부분으로 잘 겨냥된 화살로 쏘아 마치 전복되는 탑처럼 심리적으로 좌절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두루두루 쓰인다.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아킬레스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물에 포획된 도시의 성문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아폴로가 쏜 화살이 그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관통했다. 그는 심한 고통으로 신음소릴 내며 마치 전복된 탑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그녀의 아들 아킬레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지옥의 강 스틱스에 담갔다. 일단 지옥의 강처럼 강한 스틱스에 한번 담겨지면 담금질되어 강해졌을 텐데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잡고 담가야 했기에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담겨지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테티스가 손으로 잡았던 부위인 발뒤꿈치뿐이기에 이를 잘아는 아폴로는 아킬레스의 오직 약한 발뒤꿈치를 명중하였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부분이 각기 다르더라도 테티스가 잡은 부분은 있기에 어딘가 누구나 아킬레스근이 있기 마련이다. 신체적으로도 누구나 힘이 들면 발병하는 부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이 병이나고 어떤사람은 간이나 소화기관이 병이나고 나는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허리병이 난다.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근이고 치료자는 우선 이 아킬레스근을 찾아 건드려 치료를 시작한다.

케르베로스

 저승사자 케르베로스는 늪지대의 호숫가에서 저승을 지키는 문지기 개이다. 케르베로스는 저승사자한테 붙잡혀 온 사람들 중 누굴 저승에 잡아둘지 아닐지 정확히 알고 있다. 누구든지 감히 다시 되돌아가려고 하기만하면 그 자리에서 그들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그래서 케르베로스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험악한 문지기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문턱을 지키는 괴물이라는 뜻이다.
 우리사회에서 문턱을 지키는 대부분의 사람은 여성이다. 이들은 사장님방 앞 비서실에서 방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영접하는 것뿐만 아니라 겁을 주기 위해서 고용된다. 이러한 케르베로스를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무의식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내면의 파수꾼, 즉 자아의 심판관이 되어 방어기제로 자신을 지킨다. 이 파수꾼은 불청객이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특히 무의식의 암흑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오는 것을 감시한다. 파수꾼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의식은 의식의 세계로 드나드는데 이것이 꿈이고, 때로는 심리치료사가 파수꾼 게르베로스를 달래면 무의식의 파편들이 수면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 무의식의 파편을 심리치료사가 딱잡아 물어주면 저승으로 돌아가려던 파편이 의식화되어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케르베로스는 무의식의 안전장치이다.
불교에서는 아침에 도(道)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안전장치가 풀려야 도를 깨치게 된다. 케르베로스가 잠자거나 무력하게 만들어 자신을 탐구하도록 만드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道닦는 것이고 자기 발견이다

나는 아리아드네가 되고 싶다.

자신의 꿈이나 영상 속에 감금된 환자들이 무의식의 미로 속에서 자아가 수시로 유아기로 퇴행하고 있을 때 자신을 통제 할 수 있고 정돈된 현실로 되돌아 올 수 있게 손을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심리 치료사이다.
아리아드네는 연인 미노타우로스를 배반하고 아테네의 청년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어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빠져나올 때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선물로 준다. 
아리아드네는 미로 입구에 실타래 끝을 매듭지어 묶고 테세우스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실타래를 손에서 놓지 말라고 당부한다. 현실로 돌아오려는 의지를 내려놓지 말라는 것이다.
화가 난 미노타우로스가 미로의 한 가운데서 테세우스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밤새 지키다가 깜빡 잠들어 버렸다. 테세우스는 잠자는 미노타우로스를 기습하여 이마를 정통으로 찌르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아리아드네가 준 실타래의 도움으로 미로를 찾아 다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미로 속으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현실과 연결해주는 끈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길을 잃지 않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건강해질 수 있다. 여기서 미노타우로스는 현실의 의식이다.
그 현실이 건강하다면 몰라도 그 현실이 병리적 환경이라면 병리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이 노이로제이다. 건강한 현실에 적응 못하고 미로를 헤매다가도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의미를 깨닫고 현실로 돌아오려는 의지로 원래의 적응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이 회복력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다시 건강한 생활을 한다. 심리학자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카너먼은 망하는 회사는 회복력이 없는 회사라고 말하였듯이 개개인도 가족도 회복력이 없으면 다시 건강해질 수 없는 것이다. 개인도 가족도 회사도 누구나 적응에 문제를 가질 수 있다. 누구나 문제를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회복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개인이나 가족이나 회사를 평가할 때 현재 문제가 있느냐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력이 있느냐를 진단해야 한다. 이 회복력은 물론 구성원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관계성을 통하여 가족의 레질리언스를 강화시키며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리아드네이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려는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빅터프랭클이 생각난다.
빅터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닥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 수도 있었고 살려고 한다고 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생을 포기할수도 있었다. 이때 프랭클은 왜 살아야하는지 의미를 찿으므로 살아 돌아올수있었고 그는 훗날 생의 의미를 못 찾아 헤매는 정신과환자의 안내자인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christ church

니를 치료하는 묘약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묘약이 있다. 남에게 쓰는 묘약이 아니고 나를치료하는 묘약을 갖고있다. 어떤 사람의 묘약은 소금이라고 한다. 힘들면 울고 또 힘들면 땀이 나도록 일하고 더 열심히 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바닷가에 가서 바다에게 걱정거리를 다  말하고 걱정거리를 바다에 다 처넣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흘리는 눈물이나 땀이나 바다나 모두 소금기가 있기에 소금이란다. 
나는 말이다. 나는 힘들면 하느님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을 주신다고 목사 친구가 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 친구는 한번 했을 뿐일 텐데 내가 이렇게 평생 상비약으로 써 먹는 줄은 모를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미리 알아서 주지도 않고  견딜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도의 고통만을 주신다고 한다. 신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나는 이 정도는 견디어야 된다고 여겨지어 이 고통을 내게 주는 것이니 당연히 견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훨씬 가벼워지고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을 갖는 수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어떤 고통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없고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부모가 보면 부모가 보고 느끼는 대로 아이들은 이해도 못하고 견딜 수도 없다. 반대로 부모가 보기에  아이들이 충분히 견딜 능력이 있다고 보면 아이들은 부모가 보고 느끼고 믿는대로 충분히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신이 보기에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어 견디듯이 부모가 보기에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이라고 보면 아이들은 잘 견딘다. 견딜 수 있다고 보는 바로 그것에 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을 빙자하여 자신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싣는 것이다.
그 후에는 걱정 할 필요 없이 견디면 된다. 걱정한다고 걱정거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해결되는 것도 절대 아니다. 걱정해서 해결된 적이 있었는가? 내식대로 지나가게 두면 나는 어느새 고통을 견디고 빠져나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맞이하는 나의 마음은 고통을 끌어안고 수용하기에 그 고통이 더 번지지 않고 사그라진다. 살아가면서 맞는 고통도 마음이 만들어내고 마음이 받아들여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 같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이 스트레스를 견디고 살 수 밖에 없다. 이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받고 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스트레스를 견디며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 각자는 모두 다르고 경험도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은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너무 스트레스가 많으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하며 시간만 가면 해결된다고 믿는 것이다. 시간이 가다보면, 어떤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조차 기억이 안날 정도로 지나버렸다. 항해도중 풍랑이 지나가듯이.. 그리고 “피치 못할 일이라면 아름답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영악하여 쉽게 합리화를 하기도 하고,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는 꼬투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아끼는 글귀이다. 피치 못할 일은 아름답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다양하겠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내 시간을 절약하고 아껴쓰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물리적인 시간은 하루가 스물 네 시간이지만 시간은 쓰기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것도 안한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지만 뭔가를 많이 한날은 하루가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제는 겨울방학 끝자락에서 방문하지 않은 실습지에 가서 기관장과 수퍼바이저, 실습학생을 만나고, 보고싶던 아들을 만나 맛있는 설렁탕을 먹고 출산을 앞둔 며느리에게 고기를 한덩어리 사주고 정말 깜찍하게 애교를 떠는 손녀딸 재롱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긴 하루였다. 시간은 똑같은 스믈네시간인데 왜 길게 느껴질까? 나는 오늘 꽤 긴 시간을 살았음에 틀림없다. 시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막 쓰다보면 오늘 죽으나 10년후에 죽으나 같은 것이다.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은 내가 주빈이 아니고 내가 꼭 가지 않아도 되고 들러리가 된다면 안 쓰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시간은 쓰기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
그래서 나는 결혼식에는 가지 않는 편이다.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우선 시간적으로 하루를 다 소비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신랑신부가 있으면 결혼식은 치러질 수 있는 것이고 그 결혼이 내가 꼭 있어야 뜻 깊어진다면 몰라도 아마 그런 자리는 내 아이들이나 내 친조카(3촌 이내)정도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초상집은 자주 찾는다. 이유는 우선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내가 편한 시간에, 교통이 잘 소통되는 시간에 골라서 찾아가고 잠깐 조의를 표하면 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관리상 내 자신의 희생을 결혼식보다는 덜 강요하기 때문에 그러하기로 작정하고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내 아이들 결혼 때도 타인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내어 주기를 강요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정해진 스물 네 시간을 이리 뺏기고 저리 뺏기고 나면 피곤과 짜증과 불만뿐이고, 항상 서둘러야 된다. 특히 직업을 가진 여성은 높은 수입과 높은 자긍심을 위하여 일을 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함인데 주어지는 아내역할, 어머니역할을 잘 하지 못할 정도로 시간관리가 안된다면 불행하게 된다. 그래서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시간 관리에서 주빈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여유를 갖게 된다. 시간과의 관계에서 주도적 입장에 서면 스트레스가 덜 생긴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을 때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짜투리 시간을 활용한다. 남을 기다리는 시간에 간단한 요가도 할 수 있고 짜투리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항상 준비한다. 물론 밀린 전화도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다보니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과 함께 시간이 빨리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의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아니다. 경험이 쌓이면 정보의 처리량과 그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일처리량이 많은날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처럼. 압축이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평범한 하루가 되기에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적어지며 시간이 빨리간다고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갔으면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느껴진다. 매일 어떤 것으로 오늘을 채울지 오늘을 잘 관리하면 바쁘게 쫓기지 않는다. 나이들수록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배움으로 시간을 채우면 시간이 쏜살같이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도 푸짐해질 것이다. 
내가 평생 아낀 것을 대라면 시간과 물을 아꼈다고 말할 것이다. 흔히 생각하기에 시간과 물은 돈도 안주고 살 수 있고 흔해빠진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는게 시간이고 막쓰는 것을 물처럼 쓴다고 할 정도로 아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 할 텐데 내게는 시간과 물이 그리 귀하게 여겨질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자는 시간도 아까워 최대한 적게 자려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그것이 몸에 밴 것 같다. 그리고 물도 마시는 물은 최대한 많이 마시고 그 밖의 샤워하는 물까지 아끼며 살았다. 환경 운동가도 아니건만 물 부족 국가에서 최소한의 애국이라고 믿고 실천했다.

나에게 긴장을 주는 것들

나에게 긴장을 주는 것들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를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를 싫증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긴장은 우리의 에너지를 쓰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장된 표현을 싫어합니다. 과장된 몸치장이나 과장된 화장도 싫어합니다. 과장은 역겨움을 주는데 역겨움이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에 사람의 손길이 간 것도 싫어합니다.
자연에 사람의 손길이 간 것은 우리를 긴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우리의 산천에도 사람의 손길이 덧칠된 것을 많이 봅니다. 논밭도 새마을사업으로 바둑판 모양을 한 것이 많습니다. 옛날 구불구불한 논밭이 그립습니다. 구불구불한 논밭은 또 하나의 관광자원입니다.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고 여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꾸미지 않은 농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 묻힌 노끈을 같은 높이에서 양쪽으로 잡아 당겼을 때, 그 끈이 만드는 선은 일직선이 아닙니다. 중력에 의해 만들어진 약간의 동머리선입니다.
인위적이거나 기하학적 선이 아닌 자연이 연출한 선입니다.
이 선이 바로 자연스러운 선입니다.
우리의 고궁이나 산사의 기와지붕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궁이나 절의 지붕의 선이 과도하게 꺽인 중국이나 지나치게 직선인 일본의 절보다 아름답고 자연의 연출을 닮은 선이 편안함을 줍니다. 사람들은 그저 절에 가면 편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주는 교감인 줄 모르고 말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아름답습니다. 병풍같이 둘러싸인 산속에 사뿐히 앉은 절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절이 있어서 절대 자연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위적이지만 목표는 자연스러움입니다. 북한산과 인왕산 앞에 다소곳 앉은 경복궁이나 청와대 사진을 외국 사람들은 포토샵 한 것이냐고 물을 정도로 완벽한 구도라고 합니다.
여인들이 머리에 브릿지를 넣는 것도 인위적이지만, 획일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은 했을망정 옷과 분위기와 어울리는 또 다른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먹거리도 자연스러운 것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담백하게 쪄낸 옥수수나 약간의 소금을 넣어 찐 감자는 영원히 우리의 기호식품입니다. 절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기름에 튀겨 느끼하거나 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루 세끼 일 년 열두 달 매일 어떻게 싫증이 나서 밥을 먹느냐고 묻습니다.
이 밥에 허브양념이나 올리브오일이 가미된 것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나겠지요. 우리의 밥은 염기나 당분이 가미되지 않은 단백한 맛이기에 구수하기까지 합니다. 자연스러운 먹거리는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30년 전 같이 지내던 이웃집 친구한테서 30년 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를 되돌려 들었습니다. 옆집에서 가끔 만들어 주는 담백한 빵을 받으며 “우리는 자연 그대로라면 싫증이라는 것을 몰라요”라고 제가 그랬다고 합니다. 싫증이 난다는 것은 긴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인공이 가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공이 가미되었더라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내가 사는 획일적 아파트도 나를 긴장시키고, 바로 옆 공사장에서 들리는 브레이크의 돌 깨는 소리는 나의 신경을 거슬리며, 체육관에서 떠드는 여자들, 남자들 소리도 귀를 긴장시키고, 코를 마비시키는 여인의 향수도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특히 지하철에서 크게 떠드는 소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킵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모든 자극은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누가 내 욕을 하나?

가끔 귀가 가려우면 우리는 누가 내 욕을 하나? 라고 말 한다. 귀가 가려운데 왜 누가 욕한다고 연결을 지을까? 옛날 우리 선조들은 무척 인간의 심리에 해박했던 것 같다. 남에게 잘못했거나 내가 해야 할 일을 안했거나 또는 나 때문에 일이 생기면 죄책감이 생기고 따라서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서서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누가 내 욕을 하나하고 또 사람들이 뭐라고 하나……. 그러니 귀의 고막이 반사적으로 극도로 예민해져서 가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오감은 모두 예민하다. 눈도 코도 혀도 귀도 피부도 예민하다. 그러나 그 중 자극이 없어도 예민해지는 것이 귀의 고막부분인 것 같다. 가만히 있다가도 귀가 가려워 미칠 지경일 때가 있으니. 그러나 자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생각이 자극한 것이다. 어린이들도 부모가 이혼을 하거나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는 아이들은 귓병을 많이 앓는다. 28개월 된 잘 자란 유아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휘가 모자라거나 인지가 모자라 알아듣지 못하면 “뭐라고?” 라는 질문을 많이 하며 세상과 의사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고 미리 포기한 유아는 눈치만 보지 묻질 않는다. 그러니 눈치만 발달하며 더 이해를 못하고 답답해지고 말도 늘지 않는다. 그런 아이는 눈치만 보는 미운 아이가 된다. 이런 아이들은 어려서도 귓병을 앓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부모의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혹사하며, 또 부모의 부부싸움으로 사랑을 못 받는 아이는 부모의 부부싸움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인지가 못 따를 때는 답답하니까 귀가 과잉 혹사하게 된다. 자연히……. 심리적인 것과 귓병과는 이러한 연관이 있지 않을까한다. 들어야할 귀가 듣지 못하고 답답할 때는 병이 나기 마련이다.
 이 때 생기는 병은 대단한 병은 아니고 귀에서 면역력이 약해져 조그만 병균의 침범에도 피부가 덧나서 귀에서 진물이 질질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조상들은 귀의 피부 겉이 예민해져서 갑자기 가려우면 예민함이나 죄책감과 연결을 지었던 것 같다. 오랜 생활의 경험에서 알았을 것이다. 

개그맨도 집에서는 웃기지않아!



  6.25 때 인민군이 내려 와서 밀고 올라갈 때 보육원에 있던 아동들이 제일 먼저 아버지라고 부르던 보육원 원장을 공산당으로부터 받은 총으로 쏴 죽이고 북으로 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자신을 버린 미운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아버지라고 부른 보육원장에게 전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감정이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흔하다. 만약 우리가 생각이나 느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모두 부모를 좋아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잘 살기 위해서는 부모를 좋아해야 하니까. 부모를 좋아해야한다는 생각과 싫어하는 느낌이 서로 상충 되면 아이는 부모를 싫어하는 병에 걸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아이를 대해온 부모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녀는 부모를 싫어하는 자기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더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부모를 모델로 동일시하기 싫어 멀찌감치 도망간다. 의사인 부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은 부모의 프리미엄을 마다하고 의사를 피하여 직업을 선택하고 부모가 원하는 것이면 직업이든 배우자든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를 동일시하며 부모처럼 되고 싶은 사람은 쉽게 부모가 인도하는 대로 길을 가며 프리미엄을 얻는 수도 많다. 우선 부모가 알고 있는 길이기에 지름길로 가게 되고 부모가 쌓아 놓은 정보와 인맥이 있으니 모든 것이 쉬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아이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평생 해 온 정신치료자가 되면 아버지를 따라하는 것 같고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싫어서 외과의사가 되겠다고 몇 년을 허송세월했다. 아버지가 싫은 이유는 정신치료를 한다는 아버지가 심지어 집에서도 가족들 특히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좋은 아버지 노릇을 잘못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기 때문에 싫고 미운 것이다. 그 후 자기분석과 치료를 받으며 아버지가 무조건 싫어서 아버지가 가는 길을 피하는 것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다시 정신치료자가 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때 친한 친구가 “개그맨도 집에서는 가족들을 웃기지 않는다네!” 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개그맨이 집에서 가족에게 개그맨이어야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정신치료자 아버지가 자신의 가족관계에서 치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이감정을 깨닫지 못하면 전이가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그맨이 집에서 절대 웃기지 않기에 저런 애가 어떻게 개그맨이 될까 가족은 믿지 않는 것이나 정신치료자 아버지도 집에서는 가족을 공감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치료자적인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친구의 개그맨에 빗댄 가족관계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각도를 변경시키는 것이 전이의사소통이며 전이의사소통은 특히 어린아이(초등학생)들의 정서를 변화시키는데 효과적이다. 여기에서 친구는 전이의사소통 치료자였다.

매조히즘

마조히즘(masochism)의 메커니즘

 오스트리아 소설가 마조흐(masoch)의 작품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신체적 학대를 받으면서도 심리적 만족을 느끼는 마조히즘을 작가의 이름을 따서 마조히즘(masochism)이라 부르게 되었고 사디즘(sadism)과 상반되는 심리기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K의 부모는 꽤도 싸웠다. K의 엄마는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잔소리했고 그때마다 남편은 잔소리 한다고 화를 냈다. K의 엄마는 말이 먹히지 않자 싸우다 싸우다 포기하고 그 잔소리가 3남매의 맏이인 K에게 향했다. 아내나 엄마가 남편이나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밀착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이고 이를 거부하고 피하는 것은 분리 독립하려는 것이다. 밀착과 분리의 충돌이다. 대부분의 잔소리는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관심을 더 달라는 것이고 내 욕구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K는 엄마의 말을 아버지처럼 반격을 한다거나 혹은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움츠러드는 철수(withdraw)의 방어기제를 썼다.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 늦잠을 자고, 학교도 안가고, 공부도 안하고 엄마가 원하는 행동을 안 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엄마는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기분이 나빠진 만큼 돌려줄 때 욕하고 때릴 수 없으니까 그 욕하고 때리고 싶은 마음을 내가 망가지므로 욕먹고 맞은 만큼 기분 나쁘게 되돌려준 것이다. 이러한 메카니즘이 매조키즘이고, 부모는 자녀가 망가질 것을 예방하려고 잔소릴 했는데 자기가 알아서 망가지고 오히려 쾌락을 느끼니 그냥 내버려 둔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내가 나를 파괴하므로 나를 괴롭히는 엄마를 내가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사춘기가 되어서는 친구들에게서 왕따를 당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왕따를 시킨 친구들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성인이 되어서는 연애를 하면서 여자에게 채이고 배신당하고 나면 매우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배신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K에게 어렸을 때 가족관계에서 언제 기분이 좋았냐고 물었을 때 자신을 파괴하면서 기분이 좋았었다는 느낌을 떠올렸다. 왜 이 K는 친구들에게서 왕따 당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연인에게서 배신당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기분 좋아진 이유의 뿌리를 찾기 위하여 K의 치료자는 열심히 가족관계를 물어 들어갔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의 잔소리에 자신이 망하는 쪽으로 자신을 몰고 가면서 기분이 좋았던 느낌이 든다고 K는 치료자에게 말하고서도 자신을 망치면서 느낌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기분이 좋았던 느낌을 잡아서 왜 좋았는지 물어주어야 자신의 무의식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파괴하면 할수록 상대가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점점 더 자신을 파괴해가며 쾌락을 느끼는 역동이 마조히즘이며 이것을 그대로 두면 점점 더 자신을 파괴하며 폐인이 된다. 내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면 상대방이 어렸을 때 엄마처럼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상대방은 괴로워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나만 망할 뿐이다. 나를 왕따 시킨 친구들은 엄마처럼 괴로워하지 않는데 나를 왕따 시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그들은 괴로울 것이라는 망상을 내 자신이 하면서 만족해한다.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현실을 잘못 보고 나를 파괴 하면서 만족해하니 치료자는 이것을 환자가 깨닫도록 해야 마조히즘이 더 진행되지 않는다. 무의식이기에 물어들어 가지 않으면 당사자는 못 알아먹는다. 치료자는 환자의 무의식을 환자가 알도록 하여 무의식이 잘못 가고 있는 것을 막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내 마음



 나는 아침 일찍 마을광장에 나가 운동을 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이삼십 명이 모여서 간단한 기(氣)체조를 하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 따라 하다보면 몸이 다 풀리고 땀도 흠뻑은 아니지만 꽤 나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제발 아침 6시에는 비가 오지 않기를 잘 때 마음속으로 바랄 정도다. 그런데 그 모이는 사람들 중 괜히 싫은 사람이 몇몇이 있다. 참 유치한 일이다. 이 나이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괜히 싫다니... 싫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한 사람은 여자가 목소리가 군인 같고 너무 씩씩하여 겁이 나서 싫고 두 사람은 기운이 없어서 싫다. 남이야 기운이 있든 없든 왜 상관할까? 이유야 돌아가며 수를 셀 때 안 들리게 하고 박자도 못 맞춘다고 이유를 대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고 힘없는 사람을 볼 때 아침부터 같이 힘 빠지고 보기 싫은 것이다. 왜 보기 싫을까? 나보다도 훨씬 젊은 여자가 힘이 하나도 없어 목소리도 작고 운동하는 동작도 맥 빠지는 것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다. 목소리가 군인 같고 너무 씩씩하여 싫은 것은 그 사람 옆에 있다가 당할 것 같아서 싫은 것이다. 그 사람이 너무 공격적일 것 같아 싫은 것이다. 그러니 나는 우울증도 공격적인 성격도 나의 무의식은 알아차리고 싫어하는 것 같다. 싫어하는 이유는 우리는 원초적인 것을 싫어한다.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이 껴안고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기보다 많은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원초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군인 같은 여자가 나를 실제로 공격해 오진 않겠지만 공격당할까봐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치고 싶은 내 자신이 싫어서 나를 싫어할 수 없으니 대신 군인 같은 여자가 싫고, 반대로 힘없는 여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이니 그 고통을 보기 싫어하는 것이다. 나 자신 속에도 우울이 있으나 힘들게 극복하고 사는 중인데 공연히 건드려 질까 겁내고 있는 것이다.
 운동하러 나와서 즐겁게 운동하고 싶은데 우울증을 앓는 여자나 공격성이 강한 여자로부터 자극을 받기에 아침 운동하러 와서 운동만 하면 됐지 왜 싫고 자시고 하는지 나 자신이 평정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언젠가 내가 피곤할 때 찍은 사진을 다른 사람은 몰라보지만 예술사진전문가는 사진이 떴다고 평한 적이 있다. 몸이 피곤하여 마음이 담긴 얼굴표정이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순간의 모습에 나의 행복하지 않은 마음이 담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미지가 행복해 보여야 행복하게 찍히기에 행복해 보일때 찍어야 한다. 행복해 보이지 않으면 절때 행복하게 찍히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사물이 만남을 통해 내면의 주고받음이 이루어져야 한다. 평상시 나의 모습은 나의 느낌을 담고 있고 그 느낌이 바로 나이다. 내가 싫어하는 군인 같은 사람과 힘 빠진 사람은 나의 요소이기에 공연히 한 대 맞을까봐 겁나고 우울한 나의 우울자리가 건드려지기 때문에 보기 싫은 것이다. 항상 한 대 맞을 것을 대비하고 긴장하고 있으니 이 느낌이 전해진 것 같다

감성이  세련된 사람



나의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곳은 아주 산이 높아 그 곳에서는 봉의산도 낮게 보이고 소양강물도 발 아래 보인다. 내 동생은 아버지 장례를 지내고 앉아서 “아버지, 이 곳에서는 소양강도 보이고 세상이 다 내려다보이니 아버지는 좋겠네요!”라고 했다.
많은 묘지가 높은 산에 있지만 보통은 공동묘지이기에 길을 잘 닦아놓아 오르는데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묘지는 단독묘지라 길을 어느 누가 먼저 낫을 들고 닦지 않으면 길이 없어져 원시림이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여름날 미국에서 공부하던 아버지의 손녀딸을 데리고 묘지를 오르려다 길을 잃고 고생만 하다 돌아올 정도로 문명이 없어진 길이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는 자연과 문명을 걸쳐서 살아야 하기에 끊임없이 길을 닦지 않으면 문명이 완성되지 않고 원시 비문명으로 되돌아간다. 
길을 닦는 것이 무엇일까? 한자로 道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쉽게 교육의 목적을 이성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교육을 받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이성적 인간위에 감성적으로 세련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감정이 순화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지적인 사람이 아니고 정적인 사람 말이다.
희로애락이 상황에 들어맞는 사람 말이다. 상황이란 시간과 장소이다.
희로애락이 발현될 때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들어맞으면 조화롭다. 때에 맞으면 시중이고 시중은 시간 속에 사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공부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진 찍는 아내가 남편에게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 같이 보며 격려도 하고 조언을 해 주는 것이 상황에 어울리는 조화로운 상황이고 조화로운 和의 관계이고 감성이 발달된 사람이다. 감성이 발단된 사람은 주위를 기분 좋게 하여 和를 만든다. 어제 찍은 여의도 불꽃놀이 사진을 보라고 하면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홱 돌리고 어제 T.V.에서 다 봤다고 한다. 그러더니 아니 땐 밤중에 홍두깨라고 잘 때 문 열고 반쯤 눈감은 얼굴로 “여보, 사랑해!”하는 것은 무슨 상황인가?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사랑스러운 얼굴로 타이밍을 맞춰야 말이 힘이 있고 정말 사랑하는 기가 전달된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개그 장면이다.
노자는 주어진 인간의 상황에 들어맞게 희로애락을 발현하는 것이 조화이고 이것을 중용이라고 했다. 상황에 맞게 감정적으로 바르게 발현하는 사람이 중용을 지키는 사람이고 군자이다.
아무 때나 어울리지 않게 이성적으로 “사랑해” 하지 않고 타이밍을 맞춰 또 상대가 원하는 수준에 맞춰 귀찮더라도 언행일치의 감정으로 그 때 그 때 달라는 관심을 가져주면 이런 사람이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면 이 사람이 바로 감성이 세련된 사람이 되고 도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정이 없다면 의미 없는 관계이다. 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외롭고 우울하다. 사람이 갖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외로움과 우울함이다. 우울함은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의 슬픔과 다른 것이다. 감성이 세련되지 않고 시중이 아니면 외롭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울함은 요즈음 항우울제로 치료한다고 하고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 항우울제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 항우울제로 우울이 걷힐 수 있는 것일까? 그러면 왜 약으로 치료받던 사람들이 결국엔 자살을 할까? 우울은 약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 속에서 공감해줌으로서 우울은 슬픔이 되어 치료가 되면 날라가 버리는 것이다.

공감(empathy)

공감(共感, empathy)

준희가 금자랑 말이 얽혔다고 속상해했다.
넉넉지도 않은 벌이에 압구정에 사는 금자가 준희에게 돈 많이 주면 머리가 예쁘다며 강북 변두리에서 3만 원짜리 파머하고 강남의 20만 원짜리 파머하고 질이 다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이야기는 안했지만 돈 많이 들이면 예뻐지고 부럽다는 뜯이였겠지
이 말을 듣던 준희는 “그럼 너도 이십만 원짜리 해!”라고 했더니 금자는 평소 친구들이 준희를 빗대어 흉보던 보따리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너도 애들이 그러는데 돈도 안 쓰고 옷도 안 해 입고 약국에만 틀어박혀 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얼마나 한심스러워 하는지 아니!”라고 하더란다. 이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빠진 준희는 내게 전화를 세 번이나 했는데 연락이 안 되다 했다.
이런 소릴 들은 것이 속상해서 나한테 이해받고 싶은 것이었겠지. 그래서 명희에게 이야기하니 명희는 준희를 공감하며 “문제가 많은 애는 무슨 예길 들어도 문제를 삼는다!”라고 名言을 하더란다. 준희는 금자가 이해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어 한 이야기를 한방으로 받아쳐 비참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저는 돌아온 부메랑에 상처받아 공감받고 싶어 여기저기 다이알을 눌러서 명희에게서 이해를 받았다.
“준희야 왜 그렇게 이야기했어?” 이렇게 말하면 어땠을까? 3만 원짜리나 20만 원짜리나 똑같은 파머야. 미장원 위치에 따라 가게 월세가 다섯배 내지 열배 비싸니까 파머 값을 세 배, 다섯 배, 열 배, 받는 거야. 나도 3만 원짜리 파머하고 다녀. 금자야! 너도 20만 원짜리 파머하면 조금 더 예쁠 순 있겠지만, 그런데 17만원 어치 네가 다른 좋은데 투자 했잖아!”
라고 했으면 안 싸웠잖아! 너 네가 나한테 알려줬지. 인간관계를 잘 하는 것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길 하는 것이라고 인터넷에 있더라고. 이 바보야! 15년 전 내가 쓴 수필집에 여러 번 이 말이 나오는데 무슨 인터넷에 있어!
그런데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물었지? 그래서 내가 가르쳐 주었잖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이니까 어렵지 않다고. 그런데 싸우고 기분 나쁘면서도 네 기분만 풀려고 명희한테 전화해서 들은 명희 말이 명언이라며 마음이 풀렸지? 명희는 네가 듣고 싶은 이야길 네 편에서 해줬거든. 준희야 금자가 듣고 싶은 이야길 하면 어색한 관계가 풀려. 지금 전화해!
어제 저녁 장가간 아들이 우리가 사준 새 차를 몰고 왔다.
그동안 10년이 넘은 차를 몰고 길거리를 나가면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자 나의 남편이 “그러면 몰지말지!” 라고 말하여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준희가 금자 보고 “너도 20만 원짜리 해!” 하고 이야기 한 것이나 똑같은 맥락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가족이기에 터놓고 이야기 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의미적 내용이 안 맞잖아! 노후차를 운전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라고 남편을 나무라고 아들에게 “미안하다 좀 더 일찍 사줄 것을……. 차가 오래되긴 했지만 버리기에는 마일리지도 10만km가 안되고 외형이 깨끗해서 쓰게 했었는데…….”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각이 있어요. 그럴 때는 그 시각을 맞추어 주는 것도 적응인 것 같아요.” 라고해서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동의해주며 차를 사주고 오히려 늦게 사주어서 미안하다고 했으니 아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마음이 전달되었겠지. 이것이 공감을 통한 의사소통이다. 여기서 한마디 더하자면 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각이 있어 그 시각에 맞추어 주는 것이 적응이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잘못된 시각인줄 알면서도 그 시각에 맞추는 것은 노이로제이다. 병리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결과가 노이로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감은 요즈음 우리사회의 화두이다. 
공감은 “그렇구나!”하며 그의 느낌에 머물러 있어주므로 본인이 가치 있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나의 아들 딸에게

나의 아들 딸에게

 우리나라의 여자 평균 수명이 80세이고 보면 영아의 사망과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을 다 합하면  60세를 넘긴 사람들은 90세까지 산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60세를 넘겨 노인이 된 사람들은 거의가 노망들 때까지 살게된다. 노망들을 때까지 산다는 것이 요즘처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없는 것같다. 무기력한 이유는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내 의지 밖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로서 할 일은 노망이 들었을 때  내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방책마련이다.
식물도 음악을 들으면 벌레도 안꾀고, 줄기도 튼튼하며 잎사귀도 많이나고 번지르하고, 소독을 많이 해야하는 고추나 농작물도 음악을 들으면 소독 횟수도 1/3로 줄일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꽃도 일찍 개화하고 열매도 일찍 맺는데 식물도 이러할 진대 하물며 인간은 어떠할까? 식물인간인 상태라 할지라도 식물인간 환자를 깨끗하게 돌보며 정성껏 간병을 했더니 몇 년만에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여 완전히 회복한 경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서로 못할 일이다.
식물도 음악을 들을 줄 아는데 하물며 식물인간인데 옆에서 주는 사랑에 반응은 못할망정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더군다나 식물인간도 아니고 노망이 들었을 뿐이데 사랑을 못 느끼겠는가? 존경을 모르겠는가? 내 비록 아들의 이름은 모를망정 진정 나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모를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의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노망든 부모를 만나보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왕 모르는데 요양원이나 양로원 보내면 어떻겠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모들은 내 아들딸을 구별하지 못할 때는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라고 이야기 한다. 아들딸을 구별하는 말을 잊어버려 대답을 못한다고 아들이고 딸이고를 모르는 것이고, 설령 구별하지 못한다고 아들딸이 주는 사랑도 사랑인 줄 모르겠는가?  내게 빨간 카네이숀을 달아 주거나 꽃다발을 줄 때 이것이 꽃이고, 내입에 사탕을 넣어주는 것을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사랑을 전달 하기위해 내손을 잡아주고 웃어주는 것도 모르겠는가? 
이웃집 강아지도 한 번 웃어 줬더니 지나가는 나를 대문 밑으로 내다보며 반갑다고 꼬리치고 또 어떤 개는 한 번 눈을 흘겨 줬더니 지날때마다 짖어 대는데....
아무리 노망든 사람도 강아지 보다 감성이 더 높고 꽃이나 나무보다 더 생생하지 않을까? 나는 내 지능이 떨어진다고 하여 감성까지 무시받고 요양원에서 고려장 당하기 싫다. 살아있다는 것은 존엄성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 존엄성을 나의 아들 딸이 지켜줬으면 좋겠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내 옆에서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둥 , 빨리 가셔야 어머니도 편하다는 등 하는 이야기를 내가 못알아 듣는 줄알고 마음대로 떠들어대거나, 지저분을 피웠다고 구박을 하면 나는 매우 슬플 것이다. 내가 이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가 비록 노망든 늙은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다. 최소한 내 아들과 딸에게서만은 산송장 취급받지 않고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싶다. 돈만 있다고 요양원에서 사람대접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돈 떨어지면 시체다.  요양원에서는 돈 있으니까 노망든 늙은이 대접을 받을 뿐이다. 요양원에서 나의 마음을 헤아려 내 손등을 두두려 가며 누가 내게 사랑을 노래할 것인가? 너희가 이 세상에 나올 때 비록 너희가 말은 못해도 눈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보살폈듯이 내가 말을 못해도 노망든 늙은이가 아니라 나를 귀한 사람으로 사랑을 갖고 보살필 사람은 아무리 복지사회가 되어도 오직 나의 아들 딸 뿐이리라. 나의 마지막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길 바란다.
그리고 내몸이 쇠약해져 사람답게 살수없다고 판단되면 현대의술에 의한 연명이나 의료장비에 의존은 물론 거부한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아들아 특히 너는 의사니까 잘 알 것이다. 나는 가족 속에서 내 인생이 안착할 수 있기 바라며 좋은 기억을 갖고 이별하길 바란다

아들을 위한 기도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그냥 매달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시험하지 마시고
더 이상 시험할것이 남았다면 이번은 당신의 은총으로 넘겨주시고 그다음에 하십시오.
어머니는 그간 여러번의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저 아이에게서 이미 두 번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기적을 오만으로 받아들였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사 압니다.
이번에도 당신의 기적을 이루어주십시오.
더큰 재목으로 쓰시기위한 시련이라는것을 압니다만 이제 저아이는 견딜수 없습니다.
당신은 견딜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는것을 압니다.
저 아이가  이 많은 고통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늘이 있게한것도 당신의 은총이오.
기적일수 있다는것을 압니다. 이제는 제아들을 자유롭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이 저 아이를 힘들게 하심이 제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을 멀리하고 겸손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고있습니다. 제게 고통을 주십시오.
당신은 어머니이시기에 아시지않습니까?
어머니는 아들이 고통받는것을 자신의 고통보다 더 아파한다는 것을. 
골고타언덕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어머니
저 아이에게서 또 한번의 기적을 이루소서.
저 아이를 우뚝 세워주시고
저 아이를 강하게 하시고
저 아이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소서
저 아이는 당신의 축복이 될것입니다.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저 아이를 힘들게 하시지마시고 저 아이 속에서 큰 일을 하시옵소서
저 아이속에서 큰 기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번에는 저 아이에게 기적을 주시옵소서.
저 아이가 자존감을 갖고 당당하게,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제 아들의 고통을 거두어주시고 더 큰 재목으로 삼으소서
제 새끼의 고통대신이라면 저는 더 큰 십자가도 지겠습니다.
당신의 기적의 능력을 믿습니다. 

천분의1의 행복

천분의 1의 행복 

나는 새벽에 일어난다. 잠이 없어서라기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해서 많은 일을 하기 위함이다. 물론 늦게까지 책을 본 다음 날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의지로 일어난다.
우리 집 앞 광장에서 봄부터 6시면 새벽운동을 하는데, 우리 동네 2000명 주민 중 매일 나오는 사람은 단 두 명이다.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운동하러 나오라고 하면 모두 바쁘단다.
대게  핑계는 아들 딸 또는 손주 밥해줘야 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혼자 운동을 하면 했지단체로 모여서 하는 운동을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안 나온다 치고 1000명의 여자들은 모두가 다 그 시간에 밥해준다고 하는데 그 시간에 부엌에 불이 켜진 집을 세어보면 백 집에 열 집이 안 된다.
운동하는 광장이 아파트 뒤쪽이고 캄캄한 새벽이라 부엌의 불빛을 세어 볼 수 있는데 모두 잠자고 있는 것이리라.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능력도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의지가 따라주어야 되고, 정말 밥 하느라고 운동 못하는 것도 바로 팔자다. 내 나이의 많은 경우 아들, 딸이 마흔이 넘어도 시집 장가 안가서 할 수 없이 늘 엄마가 밥해줘야 하는 경우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집, 장가 간 아들딸이 혹 하나씩 달고 친가나 친정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손자손녀만 맡겨서 할머니가 손자 손녀 밥해주는 경우이다. 이모든 경우에 해당되지 않고 자유롭게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가? 천명중 한명이 갖는 행복이다.

까마귀보다 못한 인간

예로부터 우리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시고,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고 했는데 일본에서는 까마귀를 반기고 있는 것을 보니 각 나라 문화에 따라 새를 보는 눈도 다른 것같다. 일본 뿐 아니라 까마귀가 지능이 높다고 가까이 하는 나라가 많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물학자 마크머핏은 개미가 인간보다 지혜롭다더니 까마귀는 사람보다 더 人品이 좋고 덕이 높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미 까마귀가 늙고 병들면 늙은 까마귀는 새끼 까마귀들이 벌어오는 벌레로 제 명을 다할 때까지 연명하다가 죽는다고 하니 이 어찌 사람보다 낫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토인비가 이 지구가 멸망한 후 다른 별로 가져갈 만한 가치 있는 것은 한국의 가족제도라고 했는데 지금도 우리가 과연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가족제도 특히 그 중에서 孝라는 덕을 자랑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나는 경험상으로 안다. 부모를 양심의 가책 없이 최대한 잘 모셨으면 그 사실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혹자는 孝를 행하지 않으면 자식대에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에게 孝를 행하지 않아도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합리화를 하게 되고 합리화하다보니 노이로제가 되고 양심이 있다 보니 우울해지고 우울해지니 건강을 해치고 정신적, 신체적 건강이 나빠지고 따라서 하는 일은 제대로 처리 못하고 뒤처지게 되고 인간관계나 현실에서 실패하게 된다. 나는 그 과정과 원리를 똑똑히 보고 살아왔다. 그래서 孝는 부모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나의 시부모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부모님께 도리를 다한 자손들은 하는 일도 잘되어 부유하게 살게 되며,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나도 한편 비명에 일찍 가신 나의 친정부모님께 못다한 효 때문에 평생 괴로워하고 있다.
 부모님이 살아 생전 치매 걸린 부모이기에 자식도 못 알아본다는 등 해보지도, 확인 되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증오심을 갖는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자손은 일반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게 하니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건강이 나빠지고, 따라서 경제활동을 못하다 보니 잘 살지도 못하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자유롭지도 못하고 활기도 없고, 불행한 인간관계로 더욱 불행한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孝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선의 덕목이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지증(치매)은 약으로 치료하는 감기가 아니고 마음의 높이를 맞추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행복감을 갖게하는 관리가 관건이다. 며느리라고 잘 못하는 것이 아니고 딸이라고 잘 한다고 할 수 없다. 인지증(치매)을 앓고 계시는 부모가 자녀를 못 알아 본다고 몇 년 간 부모를 찾아 뵙지 않던 딸이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후 후회하면 누가 괴롭겠는가? 어머니는 딸을 못 알아본다해도 딸이 엄마를 알아보고 맛있는 것 입에 넣어드리고 같이 목욕하며 행복한 추억을 가질 때 누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내 어미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떻고 내 어미가 행복하시다면 그것이 나의 행복이 아닌가? 까마귀보다도 못한 인간이 많은 것 같아 걱정이다.

노인학대

사회복지사들에게 자신들이 노인학대를 혹시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전원이 다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노인을 학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미국에서 자폐증어린이 조사를 할때 자폐증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주에서는 자폐증어린이가 전혀 없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복지사들 조차도 노인학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다면 노인을 학대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학대인줄 모를 수 있다. 
노인 시설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가 노인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노인들은 못들었다고 잊어버렸다고, 또 모른다고, 하는 특성이 있다고 신나게 설명을 하는것을 보았다.
노인은 실제로 잘 잊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성이 아니고 노쇠하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이다. 이는 시각장애인은 못보는 것이 특성이라고 하면 맞는 이야기일것같지만 실은 이는 특성이 아니고 현상이다.
사회복지사 뿐 아니라 노인시설에 근무하는 종사자들이 우스게 소리로 노인을 빗대어 못들었다고, 잊어버렸다고, 모른다고 하는것이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 그자체가 노인존중이 없는 노인학대라는 것을 미처 모르는 것이다. 옛날 우리 시어머니께서 인지증(치매)을 앓고 계실 때 교회에서 가정방문오신 아주머니들이 우리 어머니께 “할머니 몇 살?” 이냐고 묻는 대화를 지켜보던 그 할머니의 아들인 나의 남편이 “아흔살 노인을 아흔살노인으로 대접하려면 오더라도 정신나간 노인으로 놀리려면 오지말라”고 내쫓아서 그중 한 아주머니는 그 말에 노여워서 울고 나갔던 기억이 있다.
아흔살 노인은 정신이 희미한 어떤날은 쉰살이라고 웃으면서 마음대로 대답을 하시다가 정신이 드실때는 못들은척 대답을 안하셨다. 내게 필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왜 반말로 하느냐는 뜻일것이다.
교회아주머니들은 자원봉사한다고 와서는 남의 기분만 나쁘게 해놓고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노여워하며 떠났던 것이다.
사랑이든 학대든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기 마련이다. 부모가 어린이를 가장 사랑하고 아동학대도 가장 많이 하듯이 노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도 사회복지사가 가장 많이 할 터인데 따라서 내가 모르는 사이 학대도 그 만큼 많이 한다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디까지가 학대인지 모른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노인을 대하면 된다. 내가 남의 놀림감이 되고 싶겠는가? 인지증(치매)을 앓고 있는 아흔살 할머니라도 놀림감이 아니라 존중받고 싶고 행복감을 느끼고 싶으실 것이다. 인지증을 앓고 있는 할머니는 아들, 딸조차 모를지라도 아들딸이 엄마에게 잘해드리면 그 순간은 행복감을 느끼실 것이다. 인지증을 앓고 있는 엄마에게서 젖 먹고 사랑받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비록 몰라보시더라도 "몰라보는데"라며 핑계대지 말고 자주 찾아 얼굴을 보여드리고 맛있는 것 대접해드리고 기분 좋게 하여 드리는 것이 노인학대를 안하는 것이다. 꼭 욕하고 때리는 것만이 노인 학대가 아니다. 노인은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능력이 없어 학대받아도 기분 나쁘다는 표현도 못하고 불행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어제아침 노인을 위한 TV프로그램에 노인이란 능력이 없는 것이 노인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어떤 노인이 내렸는데 매우 서글픈 일이다. 

노인의 재혼

노인의 재혼을 다룬 EBS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80세의 할아버지는 72세의 할머니를 노인복지관에서 만나 서로 의지하며 지내다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은 여생을 할머니와 보내고 싶어 재혼하려고 했으나 자녀들의 반대로 못하게 되어 슬피 울고 있었다.
그 후 살던 집을 팔아 큰아들을 주었더니 이제는 결혼을 하셔도 된다고 했다며 괘씸하여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다큐의 흐름은 자녀가 재산욕심이 나서 부모의 행복을 막는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넘보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집은 아들에게 상속되기 마련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아는 아들은 생활이 힘들든 힘들지 않든 욕심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혹자는 부모가 모은 재산을 부모가 맘대로 재산권을 행사하겠다는데 왜 막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괘씸하다. 아들이 부모의 재산이나 탐내고 부모가 그토록 원하는 부모의 재혼과 사랑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 재산을 모으는데 아들이 하나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기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다.
같이 허리띠 졸라매고 돕지 않았을까? 그리고 특히 연로하여 내일일도 모르는 상황에서 큰 돈을 아버지의 불같은 사랑에 넘기기에는 아까울 수도 있다.
아버지는 인생에서 마지막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마지막 사랑이 그 큰돈과 맞바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돈이 크든 작든 말이다. 
물론 일찍이 상처를 했다든지 청상과부라면 남은 긴 세월을 살아야 하니까 재혼해야한다. 자신의 인생도 펴고 혹은 자식들도 키워야 하니까. 그러나 단지 외롭지 않기 위해 나이먹어서 황혼재혼은 전근대적 사고 같지만 바람이다. 나 하나도 기약할 수도 없고 못 추수릴 나이에 젊은 사람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다. 결혼하면 무엇이 더 좋아질까? 자녀들의 반대도 자녀들이 비록 성인이 되었지만 경제적인 것 외에 심리적으로 분리불안이다. 

그 사랑은 무엇인가? 아버지는 왜 결혼하고 싶어하는가? 아버지의 사랑은 젊은이의  사랑 못지않게, 혹은 더 값지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노인네의 사랑이든 젊은이의 사랑이든 중요하다고 치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분석하고 폄하하자면, 사랑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다. 상대에게 엄마품처럼 안기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으로 정신없이 상대에게 끌리고 온정신이 집중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랑을 찾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넘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전에 아버지가 원하는 사랑을 주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사랑은 꼭 이성의 사랑은 아니다. 재산만 탐냈지 아버지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으니 사랑이 고픈 아버지는 원하는, 의존하고 싶은 사랑을 줄 것 같은 할머니를 만나 있는 것을 아낌없이 다주고 맘놓고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불같은 사랑을 하고 불같은 사랑을 위하여 자녀에게 넘어갈 큰 재산도 아낌없이 주고 싶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 재산이 등기부상 자기이름이라고 자기만의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은 이세상 모두를 아낌없이 자녀에게 주시지 않았던가? 돌아온 탕자의 형이 아버지에게 왜 내게는 일만 시키고 사랑을 주지 않냐고 항의를 하니 내 것이 네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재산엔 자녀의 공헌도 알게모르게 많은 부분이 있을테니까... 재산이 있다면 사회에 공헌하지 않을 바에야 하느님처럼,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당연히 자녀에게 주어야 한다. 사랑받고싶은 의존적 사랑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10년 전 시골부자인 친구가 재혼한다고 할 때 두 아들은 반대하고 두 딸은 찬성한다고 하면서 나의 의견을 슬쩍 떠보는 경우가 있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지만 좀 한심하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아유 말도 하지 마!” 라고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성욕이라면 젊었을때도 참았는데 그냥 참고 살지 뭘 인생이 억울하다고 이제사 힘든 용기를 내는 것일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꼭 성욕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나는 과부가 되지 않는 길을 안다.

가족치료 이론을 알면 길이 보인다.

40여년 전 내가 홍가네 집에 시집을 와서 첫 번 맞은 시아버님 생신이었다. 이 어찌된 일인가? 시아버님의 태생이 후처의 아들이라 형들이 장성한 후 시할머니께서 후처로 오셔서 낳은 아들이기에 형제들은 매우 연로하시거나 돌아가시어 집안의 항렬이 낮은 분들이 생신에 오셨다. 그런데 손님이라고는 대부분이 조카딸도 있지만 조카며느리라는 분들이 많았고 모두 혼자 오신 분들이다. 아버님 생신인데 남자손님은 찾아볼 수 없고 여자 손님뿐이고 시아버님은 나이드신 조카며느리들에 둘러싸여 옛 이야기 꽃을 피우고 즐거워하셨고 행복해 하시는 것 같았다.  
왜 손님들이 남자는 없고 여자 혼자만 왔을까 의문이 생겨서 물으니 이분들이 모두 과부라는 이야기였다. 우리 속담에 남자가 먼저 죽으면 살아있는 과부가 “사내 잡아먹었다.”고 하지 않는가? 홍가네는 과부가 많고 남자들이 일찍 죽는 가족의 내력과 역동을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나의 원 가족 안가네를 보면 과부는 흔히 있는 일이건만 흔하지 않고 상처하고, 새 장가가고, 재혼 가족 속에 큰소리가 나는 것을 이집 저집에서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우리 어머니가 일찍 가셨고 여기 저기 나와 같이 콩쥐 신세인 친척 언니나 오빠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콩쥐 신세 언니 오빠들과 친하게 지냈다. 나와 통하는 것 같았으니까. 나의 원가족 安家네는 남자들이 아내를 잡아먹는 집안인가?
어쩐지 안향 안창호, 안중근, 안익태, 독도 수비대장 안용복 등 모두도 安家가 아닌가?
남자들이 강한 집안이다. 그런가하면 홍가네는 남자들이 약하니 살아가자니 자연히 여자들이 거세지고 이 거센 여자를 일컬어 “저 계집이 홍서방 마누라인가?”라고 우리속담에 하지 않았던가? 혜경궁 홍씨부터 말이다.
홍가네 가족체계를 보면서 남자 잡아먹었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약한 홍가 남편을 잘 돌봐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환절기마다 감기는 달고 살고, 힘든 일이 있으면 화를 내며 피해나가고 좀 바쁘다싶으면 무능한 척하고, 일을 시키면 제대로 하지 못하고 꾀부리고 할지라도 구박하지 말아야 될 것 같다. 그게 바로 내가 과부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가족치료 이론 속에서 찾아냈다. 그래서 오늘도 남편에게 “내가 잘 보살펴 드릴 테니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했다. 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행복

 다시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이나 아내와 결혼할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지금이 행복한 사람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한다고 대답할것이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사람은 지금 남편이나 아내를 안 만났다면 행복할 것 같은 망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행복은 누구와 사느냐 일 것 같지만 실은 어떻게 사느냐로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잘 살지라도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문제인 것 같다.

엊그제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국민이 누리는 경제력은 세계에서 15등이며 소비는 5등이라고 하니 버는 것보다 더 잘 쓰고 사는 잘사는 국민임에 틀림없다. 어떻든 우리가 외형으로는 일본보다 더 넓은 집에, 더 큰 차에 더 예쁜 옷을 입고 사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230개 나라 중 102등 이라고 하고 코스타리카가 세계에서 행복지수 1등이란다. 어떻게 사느냐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행복감은 등수를 매길 일도 아니다. 특히 단거리 육상경기에서는 1등과 2등의 차이가 입술두깨차이일 경우가 있어 그 시간차는 1500/1초라고 하는데 1초도 순간이고 100/1초도 찰나이고 1000/1초는 더 찰나이다. 1500/1초라하니 차이가 없는 것을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필요 없는 순서를 매긴것이다. 
악어새가 악어의 입속에 들어가 악어의 잇빨속에 걸린 고기를 스켈링할 때 악어가 입을 꽉 다물어 버리면 악어의 먹잇감이 될 위험이 있건만 악어와 악어새는 얼마나 잘 지내는가?
이는 서로 필요에 의해서다. 우리 인간도 잘사는 것은 누구를 만나서 사느냐가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얼마나 필요한 존재가 되느냐로 행복이 좌우되는 것 같다. 우리는 어떠어떠한 조건을 갖추면 행복할 것 같아 그 필요조건을 갖추기 위해 온가족이 싸우며 노력하며 많은 시간을 걱정하며 지내게 되니 행복할 리가 없다. 예를 들면 돈과 사회적 신분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데도 우리는 돈과 신분상승을 위해 평생을 보낸다. 그리고 죽을때는 돈만 벌다 죽기에 억울할 수 있다. 또 돈이 있다고 내가 다 쓰면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그러니 필요한 사람이 못되었으니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 중에도 자기가 벌었다고 부동산을 쌓고 또는 도박을 하고 사치하고 종잇장으로 은행에 보화를 쌓아둔 사람은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거나 불행한 인생을 산다고 한다. 내가 번 돈이라고 내가 다 쓸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 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행복은 대단하다. 돈이 있어서 좋은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소비가 세계에서 5등이라는 것은 나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만을 위해 쓰고 있으니 허탈하고 우울감에 빠질 수밖에 없고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수학적인 논리이다.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평균 3000만원 이라니 버는 것보다 더 쓰는 것은 확실하다.
230개 나라중 경제력이 15등이니 소비는 한 20등정도 하면 축적된 자본으로 악어와 악어새처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 노릇할 때 행복지수는 1등이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은 내 돈이라고 내가 다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니 모두가 모자란다고 생각이 들테고 그러니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 것 같다. 인생 평생 내내 행복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사람이 되는 순간순간이 모여 행복하면 인생은 행복해지는 것 같다.

성의 혁명



  갑오혁명의 2대 주제라면 첫 번째는 농민에게 농토를 돌려주라는 것과 과부에게 다시 성을 돌려주라는 것이다. 전라도 시골 고부군에서 일어난 동학운동이 내건 주제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줄 몰랐다. 갑오혁명인 동학이 우리나라 근세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3.1운동의 근원도 동학운동이니 말이다.
우리나라 고부에서만 농민에게 농토를 돌려주라는 운동이 일어났겠는가? 이미 서유럽의 장원제도에서 농토를 농민에게 돌려주라는 운동이 수없이 일어났었다. 백작 공작이 우리의 지주이다. 문학작품으로는 신안의 암태도를 배경으로 한 소작농의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나라 역사에서 과부에게 성을 찾아주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 적은 없다. 우리나라 성에 관한 역사를 보면 열녀도 칭송하고 탕녀도 칭송했으며 열녀와 탕녀의 차이는 없었다.
탕녀는 다 아는 바이고 열녀도 과부가 성을 즐기다 들통이 나서 목매죽거나 연못에 빠져죽으면 열녀비를 세워주고 열녀로 칭송했다. 경우에 따라선  바람피우다 들통이 나면 혼자 자진하지 않으면 친정오라비가 데려다 죽이고 열녀비를 세워주었으며 그 집안은 열녀 났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에서도 가산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청상과부가 아무리 평생 혼자 얌전히 잘 살아도 바람나서 자진하지 않으면 열녀비를 세워주지 않았으니 도대체 바람난 과부가 되란 말인가?
그래서 갑오혁명 이후 임걱정의 인신매매를 혹자는 영웅시 하였고 인신매매라 하지 않고 보쌈제도라 하여 과부에게 성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풍습이었다. 그렇다고 과부라고 아무나 보쌈 한 것이 아니고 둥근달이 뜨면 달보고 신세 한탄하며 울음소리를 담 밖으로 내보내는 과부만 보쌈 했고 중간에 확인 작업이 꼭 있었다. 동네 물레방앗간에 들려 풀어주고는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뛰쳐 나가지 않고 순순히 따르면 보쌈을 진행했다. 얼마나 인간존중을 중요시 했는가? 그리고 전라도 해안지방에선 특히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가 형수는 물론 형수의 아이들까지 키우며 사는 형수 취수제도가 성했다. 이 제도를 공식적인 결혼제도로 삼은 티벧같은 나라도 있다. 이것도 역시 여성의 성을 막지 않고 풀어주고 인정하는 성문화이다. 우리나라에는 남성의 성만 인정하여 축첩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성에서의 남녀평등이 있는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다. 어느 나라 보다 양성평등이 실천되는 나라이므로 다른 나라에 없는 여성가족부가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원래 정의를 유난히 부르짖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한때는 불법에 주역을 담당한 삼성의 김영철 변호사도 나오고 순명을 최고의 덕으로 신품성사때 신 앞에 허원한 신부들이 추기경을 공격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도 큰 목소리를 내면서 온 나라 국민을 불안하고 부정적인 정서 속에 파묻히게 한다. 열녀와 탕녀의 구별이 없듯이 지나치게 정의를 부르짖는 것도 결국은 싸우자는 것이고 자신의 또 다른 목적을 위하여 싸움을 거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는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다.

중년부부의 커플룩
이번여름 남편과 단둘이 동해안에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가 막혀 진부로 내려가 오대산 월정사에 들렸다. 참 오랜만에 찾았건만 생소하지 않고 외갓집 툇마루에 앉은 기분이다. 실은 산사에 툇마루가 있지도 않고, 나는 툇마루가 아니라 돌담에 기대어 편안함을 만끽하였다. 팔월의 한 여름이라도 산사의 해는 일찍 넘어가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작렬한 여름 햇빛은 없으면서 아주 기분 좋은 오후였다. 오후 네 시가 되니 두 분의 스님이 큰북과 목어와 징을 치면서 산사의 아름다운 정취는 온 산으로 퍼져갔고 산사를 찾은 모든 사람이 여유로워 보였다. 정말 평화 그 자체였다.
 이 때, 까맣고 빨간 등산복을 똑같이 입은 중년부부가 산사의 정원에 나타났다. 그런데 웬일일까? 부부가 “우리는 부부요.” 라고 옷으로 항변하는 것 같아 보였고 아름다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꼴불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웬일일까? 신혼부부나 약혼한 커플이 커플티를 입는 것은 자신들만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니까 자신들의 영역이 불안하여 넘보지 말라고 경계를 명확히 하여 타인의 침입을 막으려는 것이기에 봐줄만 하다. 그러나 쉰이 넘은 중년부부가 무엇이 두렵고 불안하여 등산화부터 모자까지 똑같이 차려입고 산사에 나타났을까? 자신들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지키려는 몸부림일까? 우리는 아무도 자기네를 넘보지 않는데. 연인은 아니겠지. 개인들뿐 아니라 집단도 단체복을 입는 것은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는 공개방송이다. 물론 집단은 통일하고 협동하기 위하여 필요하긴 하지만 나는 단체복을 입은 일원중의 하나가 되는 것도 거부한다. 나는 내 개인이 없는 단체는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부부가 둘이 하나라니 하나하나가 하나이지 둘도 아니고 둘이 하나가 될 수도 없다. 둘이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부부가 평생을 살아도 하나는 될 수 없는 것 같다. 하나가 될 수 없으니 옷으로라도 가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라고 보이고 싶을 정도로 불안한 것이니 나의 불안자리를 건드리는 것 같아 보기 싫어 꼴불견으로 보이나보다.

잔소리 탈

부부 불화가 있는 부부는 부부문제를 두 사람이 똑같이 인식하지 않는다. 부부 중 인간관계에 예민한 사람이 먼저 인식하겠지만 대부분 여성이 먼저 뭔가 이상하다고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아내가 부부관계의 문제를 결혼한 지 47.8개월 만에 인식을 하고 남편은 이보다 1년 반 후인 64.7개월 만에 문제를 인식한다는 조사가 있다. 뭔가 이상하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인식을 한 여성은 38.2%가 즉각 부모나 형제와 의논을 한다고 하는데 남성은 문제 인식부터 여성보다 한참 늦다 보니 남성이 문제를 인식할 때는 문제가 심각수준에 이르렀으므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당황하게 된다. 
대부분 아내는 문제를 인식했을 때 남편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아내는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를 나름대로 하지만 그 시도가 남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우선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인식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쪽이 싸움을 걸게 된다. 싸움을 거는 것이 잔소리이고 그 잔소리가 대화를 하자는 소리이고, 내가 불행하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잔소리를 그 말 그대로 내 행동이 자기기분에 안 맞으니 자기 기분에 맞게 고치라는 단순한 교정의 지시나 요구로 알아듣는다. 그러면서 ‘왜 잔소리야! 너나 잘 해!’라고 말로 받아 치거나 아니면 화를 내거나, 대꾸도 하지 않거나 행동으로 들은 척도 안하고 무시한다. 잔소리를 한 것은 우리가 잘 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화가 필요하니 대화를 하자는 건데 그 말귀를 못 알아 먹는다. 잔소리를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필요하면 대화를 해보자고 하면 알아들을 텐데 잔소리를 한 사람도 내 마음속의 소리를 나도 못 알아듣고 의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본대로, 상대방의 행동을 보고 느낀대로 비난하는 조의 험담을 하게 된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나 아내와 같이 놀아주지는 않고 그렇다고 부엌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뭔가 느낌은 본인도 미안해서 비스듬히 엉거주춤 앉아 컴퓨터를 하거나 즐거운 저녁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쩍쩍 소리를 내며 아무 말도 안하는 모습이 괘씸하여 아내는 잔소리를 하기 마련이다. 이 잔소리는 나도 직장에서 돌아와 또는 하루 종일 아이와 힘드니 나를 도와주고 관심을 달라는 소리가 잔소리라는 탈을 쓰고 했기에 못 알아들은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대화를 할 때도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잔소리 탈을 쓰고 하면 잔소리가 되고 자녀는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을 뿐 아니라 잔소리에 익숙해져 역 기능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잔소리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해서 잔소리니까 여러 번 해야 듣는 척 할 테고 여러 번 들으니 기분이 나빠지고 따라서 기분이 나빠진 만큼 돌려주게 된다. 
 부부관계에서도 나하고 대화하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말 대신 “왜 컴퓨터 하는 자세가 그래요” 라고 했더니 컴퓨터를 끄고 TV를 대신 보기도 하고 들은 척도 안하고, 컴퓨터만 하기도 하는 데 아내의 기분을 살폈다면 컴퓨터를 끄고 TV를 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하는 이야기의 말귀를 못 알아들었으면 자세히 물어보면 된다. “내 자세가 어떤데?” 라면 아내는 다음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또는 “왜 미안해요? 비스듬히 엉거주춤해서 하는 폼이 정식으로 꼭 필요한 것을 해야 하는 모습이 아닌데요!” 라고 한다면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아내는 만들 수 있었는데 이 때 남편은 대화할 여유가 없었고 아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반대로 아내도 “여보! 중요한 것이 아니면 나 좀 도와줘요. 나 힘들어요!” 라고 신호를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의사소통을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해야지 비난이나 정신병자처럼 이야기하고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면 둘이 똑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며칠, 몇 달, 몇 년이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이 생기고 그 단절은 옆에 있는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게 된다.


돈을 못 번다고 이혼을 당하다니

워싱톤에서 온 전화를 받았냐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묻는다. 수업 때문에 빈 연구실에서도, 학과사무실 조교에게서도 연락을 못 받은 상태인데 온 군데에 어느 누군가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워싱톤에는 대학교 때 라이벌이면서도 친했던 원자가 있는데 --- 원자에게 무슨 일이 있나?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으로 조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XX언니가 동네방네 찾은 모양이다.
무슨 일이기에 그간 소식이 없고 연락이 끊겼는데 매사에 적극적인 언니가 연락처를 인터넷으로 찾아내 학교까지 접속을 하였다. 우리는 오늘날 완전히 열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게 하는 순간이다. 이름만 알면 인터넷이 접속하는 길을 다 가르쳐주니 말이다. 네비게이터 이다. 오랜만에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온 종일 나를 충격 속에 빠지게 했다. 그 예쁘고 귀엽고 발랄하고 적극적이고 생활 속에 지혜로운 언니가 이혼을 당해서 분이 삭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돈을 못 벌어서 이혼당했다고 한다.
내가 산 안토니오를 방문했을 때 만난 언니의 남편은 너무나 철두철미하고 잘생기고 자상한 의사선생이다. 그가 단지 돈을 못 번다는 이유로 언니를 설마---. 언니가 외로워하자 한국에서 언니를 닮은 여자아이를 입양까지 했으며 입양된 혜원이는 어느 왕궁의 공주처럼 살고 있었고 언니를 미국 상류사회 사모님으로 평생을 살도록 마련해준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철저하냐 하면 내게 모닝커피를 끓여줄 때도 커피가 가장 맛있다는 온도 68℃에 물 온도를 맞춰 커피를 타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외출할 때는 물을 차에서 많이 마셔야 한다며 차고에 있는 물도 손수 넣어줄 정도로 자상하고 차분한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신자이다. 결혼할 당시에 그의 부모님은 언니가 열 살 이상 많은 개신교신자인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데도 사랑하면 됐지 국적과 종교와 나이가 무슨 문제냐고 하셨던 정말 세상편견을 뛰어넘은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부모님의 막내아들이니 알아볼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단지 언니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또 단지 돈을 잘 버는 인도출신 의사인 이혼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했을까? 평생 돈 벌며 살다 보면 돈이 좀 모여야 하는데 고생만하고 뒤돌아보니 번 돈은 다 쓰고 빈털터리일 때 실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노후를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허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한 후 돈은 모여야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좋은 것이다.
언니도 딴 주머니 저금통장 하나 없이 살았다니 그간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쓰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본 언니의 생활은 미국의 상류수준이었는데 위자료도 없이 연금의 반을 받기로 합의하고 이혼당하고 말았다니---.
정말 돈을 못 벌어 이혼 당했을까? 언니의 남편은 굉장히 현실적인 미국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결혼하는데 국적과 종교와 연령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나 지금 현재 아내가 돈을 못벌어 돈 잘버는 여자와 재혼하겠다는 것이 아주 현실적 사고이며 일맥 상통한다. 예민한 언니의 느낌이니 어느 정도 맞을 것이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빠릿빠릿하고 적극적인 언니가 왜 피아노 레슨이라도 하며 같이 돈을 벌지 못했을까? 왜 양녀까지 데려다가 모녀가 둘이서 남편을 파먹고 살았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주부가 돈을 못 번다고 내놓고 이혼 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뒷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있을 것이다. 어떤 50대 남성은 자신들의 세대는 아니어도 3,40대에서는 남자가 혼자 돈 벌다가는 화가 나서 이혼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평생 돈 하나 벌지 않고 자기만 파 먹힌다고 남편이 느끼면 화가 날 것이고 용단을 내려 남은 인생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이혼할 것이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