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갤러리1

"火를 내지 맙시다."

"火를 내지 맙시다."
얼른 들으면 성질부리지 말자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숲에 걸려있는 프랑카드이다. ‘월화수목금토일에 火를 내지 맙시다.’이다. 불을 내지 말자는 아주 재미있고 기발한 방화 표어이다. 불을 내지 말자는 것이나 성질부리지 말자는 것이나 동음동의어이기에 잠깐 혼란스러웠다. 조심조심 불조심하여 잿더미로 만드는 화마를 조심하자는 의미로 프랑카드가 걸려있다. 성질부리지말자는 말도 火를 내지 말자이다. 성질을 부림으로 성질부리는 사람의 혈압도 오르고 간장도 타고 신체적으로 모든 장기가 상처받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건강도 나빠질 뿐 아니라 그 화를 받는 사람도 기분 나빠지고 당황하고 긴장하고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해칠 수 있다. 부모의 화를 받는 아이는 화가 나지만 겁나서 부모에게는 대들지 못하고 밤에 야뇨증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이혼한 여인은 전 남편의 아이를 볼 때마다 이혼한 전 남편이 생각나고 화가 나서 아이를 미워했다. 특히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동생과 싸우기에 큰아이에게 화를 내다보니 아이는 안면 틱을 갖게 되었다. 화는 자신뿐아니라 화를 받는 타인을 파괴한다.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은 6년 전까지만 해도 화가 나면 무조건 걸으라고 하더니 요즈음 그의 저서를 보면 화가 나면 숨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을 숨으로 연결하여 관찰하다보면 화가 가라앉는다고 전한다. 화가 나는 것을 걷거나 숨 쉬거나 하면서 관심을 내 몸과 마음으로 돌리라는 것이다. 걷거나 숨 쉬어서 화가 가라앉으면 오죽 좋겠냐만 그는 걷거나 숨 쉬므로 화를 돋우지 말고 다독거려 화를 달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같다. 물론 심연의 화를 근원적으로 치료하기에는 갈 길이 머니 임시방편으로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 일 것이다. 우리도 요즈음 생활체육의 한 방법으로 걷고 숨 쉬는 것이 있는데 신체의 건강도 위하고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걷고 숨에 집중하는 것이 특히 화를 달래는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고 들숨, 날숨에 집중해보는 것이 근원적 치료는 안 되지만 화를 참고 자기 수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인도의 영혼의 도시 바라나시에서 인도요가를 체험한 적이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의 요가와의 차이는 숨 쉬는 것에 더 많이 집중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니 숨 쉬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긴 한데 자연히 쉬어지는 숨에 정신을 집중하므로서 정신이 안정되고 화가 가라앉을 수 있다니 일상생활하면서 숨에 집중만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누구지?”를 탐구할 때도 일상생활을 하며 물어 들어 가면 머리가 아프지 않다. 그러나 일상 생활을 잘 못 하고 공상만 하고 망상만 하면 멍청해진다. 법륜스님은 사람이 스무살이 넘으면 자기생활을 책임져야지 부모한테 붙어서 공부한다며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말이나 배우고 있으면 정신병이고 다큰 성인이 영어나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말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짝짖기



결혼을 왜하는가 묻는다면 결혼의 목적으로 성적으로 만족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고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지고 등등을 나열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의 만족과 심리적 안정과 경제적 부는 왜 필요한가 한다면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내가 성적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내게 도움이 될 인생길의 조연을 선택하는 것이 짝짓기이다. 들짐승이나 식물이나 곤충, 온갖 새들 모두 짝짓기 할 때 다양한 모습을 띠는데 어찌 보면 사람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노랑나비는 유혹의 춤을 아래위로 추며 수컷을 부르고  참들이는 선물을 갖다 주고 짝짓기를 하고 쇠제비 갈매기는 수컷이 주둥이에다 큰물고기를 물고 암컷얼굴에 들이대면  이것이 싫은 암컷이 등을 돌리면 다른 암컷에게 가서 또 물고기를 물은 입을 들여댄다. 이때 받아먹으면 곧 짝짓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새들에게 있어 사냥은 경제력이다. 그런데 어떤 암컷은 저울질을 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갈매기가 생긴 것이 거기서 거기고 모두 다 큰 물고기를 물고 있으니 사냥능력도 거기서 거기일 것 같아 판단하기 힘든데 구애작전이 거부당하기도하고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어떻튼 새들의 짝짓기도 외모와 경제력이 좌우하는 듯 하다.
또 꽃둥애는 곤충 중 가장 비행을 잘하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노란 애기똥풀 꽃술위로 비행을 뽐내며 짝짓기 상대를 유혹한다.
또한 하루살이도 위 아래로 비행을 하는 것이 유혹하는 것이며 선택된 자는 짝짓기 하고는  곧 산란하고 죽어버린다. 개천에 연어도 산란하기 위하여 힘센 물결을 가로질러 올라오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해 보인다. 죽을 줄 알면서도 짝짓기 하는 것은 만물의 본능이다.
식물도 또한 마찬가지다. 흰 망태버섯이나 노랑 망태버섯은 냄새를 풍겨 개미를 유혹하고 개미 발에 교자를 묻혀 번식을 하고 얼레지 꽃은 애 호랑나비를 불러 단액을 묻혀 번식을 한다. 그런가하면 순식간에 상대방이 모르는 사이 덮치는 호리병벌이 있는가 하면 동성연애를 하는 여치나 베짱이 도 있다. 그래서 여치 베짱이는 자손은 물론 자신의 노후도 준비를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고 살았기에 긴 겨울 고생하는 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남녀가 만나면 평생 살아가기에 내가 손해 보지 않을는지 따져보기 마련이다. 쇠 제비갈매기가 유치하게 물고기를 물고 암놈주위를 기웃기웃 거리는 것이나 요즈음 못난 남자들이 “나 강남에 아파트 있어요.”라고 부모가 죽을 둥 살 둥 준비한 아파트를 제것 마냥 자랑하는 것이나 별다르지 않다. 동물적인 면에서 보면 아파트 자랑도 가장 빠른 장가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노랑나비는 정말 팔랑팔랑 춤을 예쁘게 춘다. 
우리 인간도 춤추는 노랑나비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을 빼앗긴다.
춤추는 암컷에 숫 컷이 짝짓기를 하려고 붙으면 이를 거부하는 암컷은 숫 컷의 위쪽으로 올라가 팔랑팔랑 날개 짓을 한다. 그러면 숫 컷은 단념하고 다른 나비 뒤를 쫓는다. 사람도 예쁘게 춤을 추는 여자는 섹시하다. 그래서 무용과 출신들이 좋은 신랑감을 만나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 인간이 볼 때는 쇠 제비갈매기나, 노랑나비가 짝짓기 짝을 고르는데 매우 신중한 것이 헛되고 우스워 보이지 않는가?
신이 볼 때 우리 인간의 짝짓기모습도 그렇게 보일 것같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는데 필요한 성의 만족과 심리적 안정과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줄 조연을 찾는 것이 새나 곤충과 사람이 마찬가지 일 것 이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할 수있는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자신의 온힘을 바쳐 예쁘게, 멋있게, 남자답게, 여자답게 꾸미고 매력과 능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항상 내가 밑지는 것이 아닌 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노랑나비마냥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춤을 추며 계산하고 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다시 말하면 비싼 나를 싼값에 넘기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그래서 아직 짝을 못 찾고 있는 경우도 흔한 것 같다.

갈매기는 왜 이혼할까?
                                  
사람이 이혼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개인 다 다르기에 복잡할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단순하다. 개개인은 살아가면서 피차 억울하지 않아야한다. 어느 누구라도 억울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아리스토테렐스는 정의는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사이에 받을 것을 받지 못하면 억울하여 이혼하고 싶어진다.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로 복잡해지면서 이혼이 늘고 있고 농경사회로 갈수록, 원시사회로 갈수록, 개발도상국일수록  이혼율이 낮은 것을 보면 도시산업화, 지식정보화 되면서 사람이 육체적 힘을 덜 써도 되는 직업이 늘어나면서 따라서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이혼의 요인들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여성이 직업을 갖고 여러 가지 역할을 떠맡아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결혼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고 더더욱 혼자 살 수 있는 경제력뿐 아니라 심리적 자신감을 가지며 용단을 내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이혼 제기자의 70%가 여성인 것을 감안해보면 그러하다.
따라서 경제력이 없는 여성은 아무래도 이혼을 망설이게 되나 나라의 복지정채이나 친척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건만 되면 본인이 경제능력이 없는 것과 상관없이 결혼관계를 끝낼 용기를 갖게 된다. 이혼을 함에 있어 결혼에 대한 가치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경제력이 있고 이혼하고 싶다 할지라도 다시한번 재고하겠지만 이것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래서 참고 살았다. 참을 가치가 있을 때 참는 것이다.
이혼이 현대인의 이성적인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물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동물이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동물적인 것이라고 해서 감정적 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현실적일런지 모른다.
이혼율이 세계적으로 볼 때 미국, 스웨덴에 이어 한국이 세 번째로 높다. 2011년 세계은행이 조사한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이 $42000, 스위스 $37000, 영국 $33000 우리나라가  $31000이다. 
미국, 스웨덴을 제외한 우리나라보다 GNP가 높은 나라들보다 왜 이혼율이 높은 것인가?  남자들보다 여자들 편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데 왜 한국의 여자들은 이혼을 제기하는 것인가? 그냥 살자니 억울해서이다. 이혼녀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까지. 물론 이에 대한 편견도 많이 희석되었다. 이 논의 원인을 동물적인 시각으로 풀어야 할 것 같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이혼을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배우자가 출세를 못해서 이혼하는 것도 아닐테고, 돈을 못 벌어오고 그래서 재산을 못 모았다고 이혼하는 것도 아닐테고, 사람들처럼 가치관이 틀려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얼굴이 미워서 또는 성격이 싫어서 이겠지. 우리가 동물들을 볼 때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 답은 나온다. 성격이 싫거나, 안 맞거나 하기 때문이겠지. 조류학자들의 추적연구에 의하면 갈매기의 30%가 다음해에 이혼을 한다고 한다. 갈매기 부부가 같이 새끼들을 품어 부화시키고, 키우며 물고기를 잡아오는 역할을 서로 교대로 분담하는데 집안일보다 밖으로 나가는 일을 서로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면 집에서 새끼들을 돌보는 일이 밖에 나가 먹이를 잡는 것보다 위험에 노출되는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매 새끼한테도 힘을 못 쓰는 어미아비 갈매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날아가 먹이를 물고 돌아 왔을 때 배우자가 빨리 교대해주지 않고 새끼를 끼고 시간을 끄는 배우자에게 내가 새끼를 돌볼 테니 빨리 나가 꾀부리지 말고 일하라고 꾁-꾁 거리며 상공을 비행한다. 이 비행하는 시간이 긴 갈매기 쌍일수록 다음해에 오자마자 다른 갈매기와 짝짓기를 한다는 보고이다. 전체 갈매기 중 꾀부리는 갈매기 30% 가 이혼을 당한다는 정확한 조사이다.
갈매기 부부관계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인간도 역할을 반반 상호 분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부부는 싸우다가 결국 이혼 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는 네쌍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


나 자신을 험담하지 말라(의사소통)

앙 드래 말로는 자기 자신을 험담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못 부르는 것을 그대로 놔두지 말라. 내 자신이 남이 잘 못 부르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주문에 걸린 듯 나의 무의식이 착하기에 그대로 행동해준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별명을 붙이면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지 하고 포기하거나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니라고 적극 반응해야한다. 
특히 엄마는 내 아이라고 또는 귀엽다고 수캐니, 돼지니, 여우니, 여시니 강아지니 아무렇게나 부른다. 내 아이가 사람이 아니고 수캐, 돼지, 여우, 개새끼면 정말 괜찮은가?
내 아이가 귀엽다고 다 큰딸과 큰 아들을 아가니 베이비니 하면 영원히 엄마에게는 크지 말고 애기 짓만 하라는 것인데 그 아이가 어떻게 젖 떨어져 의젓해지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만들었듯이 엄마의 말이 자녀를 만들고 내말이 나를 만든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대할 때면 언제나  애처러워 하며 부모가 대하고 싶은 년령의 아이로 대한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그 아이가 성장한 만큼 성장한 아이로 대하여야한다. 학교에 들어 가야할 아이를 아주 어린 아이로 대한다든지 성인이 다된 아이를 청소년으로 대하면 그 아이는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신체적으로 성장했을망정 심리적으론 자기통제를 하지 못하며 자율적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술에 거려 성장하지못 한다. 그래서 때로는 머리는 매우 좋은데 마흔이 넘어도 자기 밥벌이를 못하며 부모가 능력이 없거나  혹은 있거나 부모에게 붙어살며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부모의 자업자득이다. 자기의 자녀라고 하여 마음대로 험담하고 나서 이런 아이가 어디서 나왔냐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유리벽 (의사소통)

시간과 공간을 떨어져 지낼지라도 사람은 관계를 이루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현대인은 인터넷공간에서 서로 알지도 못하면서 본 적도 없으면서 마음 속 깊은 이야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길 하며 심지어 죽음도 같이 간다. 그런가 하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유리벽이 있어 서로 소통하지 않고 관계 맺지 않는 진정한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이 문제이고 제 3의 가상의 공간에서의 소통도 문제이다. 소설이지만 벽을 사이에 두고 남매가 가상의 공간에서 사랑에 빠진 경우도 있다. 같은 공간에서 소통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관계는 환상이다. 현실에서는 유리벽을 만들면서 얼마나 관계를 맺고 싶었으면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남매는 연인이 되었겠는가? 현실에서 유리벽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안 해주니 가상의 공간에서는 해줄 것 같아 가상의 공간으로 간것이다. 오늘날 젊은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현실을 도피하여 가상의 공간으로 도망치고 있으며 그 속에서 활발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공상의 세계이다. 요즈음은 컴퓨터보다도 아이들이 중독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 한다. 손쉽게 항상 손에 있으니 옆의 사람과는 소통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고 모르는 사람과 소통한다는데 이는 소통이 아니다. 정신병이다. SNS상에 휄로우가 몇 만 명이라도 현실에서 왕따 된 친구를 만나볼 수 있다. 가상의 세상에서 아무리 활발하게 소통을 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바로 옆 사람과 소통을 하지 못하면 현실세계에서 문제를  갖게 된다. 이들은 하물며 데이트를 하면서까지 서로 다른 사람과 소통한다고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그들은 사람들과 소통한다고 하지만 실은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상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공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도록 치료자는 그 원인을 본인이 알도록 도와야한다.

의사소통은 내용이 아니라 느낌의 소통이다.

페어빈(1962)는 유아와 환경(엄마)간의 관계 안에 사랑과 우정의 뿌리가 있다고 했고 위니컷은 유아의 직접적 의사소통은 대상과만 가능하며 본질적으로 유아와 엄마는 융합된 상태라고 했다. 대상이 주관적일 때 의사소통은 표현될 필요가 없다. 대상이 객관적으로 인식되면 의사소통은 명확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벙어리처럼 된다. 아기는 엄마와 융합되어있기에 엄마와 침묵으로 간접의사소통 할 수 있다. 일차적 모성몰두의 상태에 있기에 엄마와 아기는 신체적, 심리적으로 강렬하게 융합되어있다. 의사소통은 유아이든 성인이든 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느낌과 태도의 의사소통이다. 30분 동안 서로 대화를 나누고도 서로 할 말이 없다고 하는 의미는 느낌을 서로 말하지 않음이다. 연인들이 말로 의사소통 하지 않고 단지 같은 공간에 있거나 유아와 엄마는 서로 쳐다보고 있기만 했어도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한 것이다. 유아가 융합에서 벗어나 엄마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분리되지 못한다.
 유아는 대상의 느낌을 통한 의사소통으로 나 아닌 대상을 느끼게 되고 그 대상을 믿게 된다. 아기는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심장박동에 이미 엄마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엄마의 유아를 위한 초기적응은 임신하고 있을 때 아기를 돌보고 행동하는 방식이다. 출생 후 12주가 되면 엄마가 젖을 먹일 때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위로 뻗어 엄마의 입 속에 손가락을 넣고 그 손가락으로 아기가 엄마에게 젖을 주는 놀이를 한다. 엄마가 젖을 먹이듯 분리되지 않은 대상에게 아기는 젖을 먹이는 것이고 아기는 놀이를 통하여 커간다. 아기가 엄마와 놀이를 하며 하는 의사소통이 대상관계를 맺는 기초이다. 이 관계가 발전되어 인간관계를 맺어나간다. 엄마와 유아의 의사소통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한다. 그러려면 어두운 곳에서 할 수 없고 등 뒤에서 할 수 없다. 그래서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는 어두운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하고 있고 일본의 남부 섬 지역에서는 등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한다고 한다. 엄마와 유아의 의사소통을 들여다보면 제삼자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없는 것을 엄마는 알아듣고 반응하면 유아는 엄마의 반응에 웃으며 화답한다. 제삼자가 보기에 이것 또한 불가사의 한 것이나 엄마와 유아는 의사소통을 잘 하고 있다. 그래서 제 삼자는 엄마에게 유아가 지금 무슨 말을 했냐고 물으면 엄마는 정확히 알고 있다. 소리라고는 겨우 어떤 경우에는 옹알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는 위니캇이 말한 대로 엄마와 유아는 융합된 상태니 실컷 알아들은 것이다. 이들은 내가 아닌 대상이라고 느끼지 않기에 말로 표현될 필요가 없다.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와 유아는 융합된 상태로 내가 내 마음을 알기에 다 안다. 그러나 엄마를 유아가 나아닌 대상으로 느끼게 되면 엄마는 유아에게 언어와 느낌으로 명확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엄마가 유아에게 갖는 느낌을 유아는 알아듣고 그 느낌대로 만들어진다. 의사소통을 말로만 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하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어둡지않은 곳에서 그리고 앞에서 눈을 보며 직접적으로 느낌을 전달해야 한다.

운무에 쌓인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우리는 고슴도치여야 최선이다.

고슴도치들은 날씨가 추워지자 추위를 피해보려고 다닥다닥 모여들었다. 그런데 몸에 있는 침이 서로를 찔러서 가까이 있을 수가 없어 흩어졌다. 그러다 추위 때문에 고슴도치들은 다시 모였으나 똑같은 일이 벌여졌다. 고슴도치들은 계속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한 뒤에야 서로 조금씩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사람도 이왕이면 붙어 있으려 하고 붙어있으면 안전하고 붙어서 서로 덕을 보려고 한다. 남극의 펭귄처럼. 그래서 사람을 사회적 동물(Gregarious Animal) 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느 정도 붙어 있느냐 하면 침이 서로 찌르지 않을 정도로 붙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너무 달라붙어 있으면 서로 상처를 입는다. 모자가 너무 달라 붙어있으면 아들이 군대 갈 때 상처받고 장가갈 때 상처받고 아들이 아내 편을 들 때 상처받고 아들이 엄마 편을 들으면 아내가 상처받아 다시 찌르니 아들은 상처받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가깝지도 멀지도 말고 조금씩 떨어져있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저자 전혜린은 필자가 대학시절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가였다. 이유는 그녀의 자녀양육관이 매우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6.25때 독일로 유학을 갔었으니 지금 살아 계시다면 85세는 되었을 세대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일찍 갔다. 그녀는 자기의 아이가 자라면서 진로나 결혼 등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엄마와 의논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하였다. 최근에 나의 제자들에게 부모가 반대하는 사람과 결혼 할 것이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고 부모가 허락해주고 심지어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축복받는 결혼을 할 것이라고 했다. 완전의존이다. 의존이란 의존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럴진대 이미 50년 전에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부모인 자기와 의논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을 강조한 그녀에게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50년 전에 그녀는 수필을 통하여 대상관계이론을 이미 내놓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추측하건대 그녀는 50년 전에 독일에 유학 가서 대상관계이론에서 분리개별화이론을 내놓은 마가렛트 말러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요즈음 장안에 천일의 약속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이다. 김수현 작가는 시시한 주제를 시시하지 않게 하는 재주를 갖았다. 서른 살에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는 여인과 아들의 숭고한 사랑을 아들의 엄마도 숭고하게 보는 한 차원 높은 드라마인데 이것이 인기라니 시청자의 수준도 꽤 높아졌다. 이 드라마 주제는 아들의 결혼은 엄마가 좌지우지 할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이다. 우리 TV드라마에서도 이제는 제발 아들의 결혼을 신분이나 돈이나 배경을 이유로 반대하는 내용은 그만 나왔으면 한다. 그것은 비민주적 비문명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천일의 약속에서 오래간만에 화면에 얼굴을 내민 김래원으로 하여금 누가 봐도 선택하면 안 될 것 같고 약아빠진 사람은 절대 택하지 않을 조기 알츠하이머를 앓는 가난하기까지한 수애를 선택함에 주저하지 않고 이러한 아들의 선택과 자율성을 인정하는 엄마에게 찬사를 보내는 시청자를 만들어냈다. 국민의 의식을 한 차원 끌어 올린 것이다. 엄마가 아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면 아들은 영원히 자율성을 갖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 아들의 일은 아들에게 맡겨야 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고슴도치만큼 심적으로 떨어져야 한다.

행복도 배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때, 행복한 느낌을 가질만한데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불행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다. 엄마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조금뿐이 안 들어 주지만 사랑해주니까 엄마가 좋다고 행복해하는 아이가 있다. 요구의 충족과 행복은 일치하지 않는다. 석 달 전만해도 요구가 많고 불행해하던 아이가 엄마가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사랑을 해주니까 엄마는 요구는 조금 들어주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이의 요구를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고 통제해야할 때 통제하는 것도 물론 사랑이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엄마는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엄마다운 것이고 아이가 요구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엄마니까 아이가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이 최고의 엄마라는 것을 학령전 유아는 안다. 아이가 요구하는 것에 질질 끌며 결국에는 다 들어주고, 들어 주고 나서 아이에게 질질 끌려가는 엄마는 자신에게도, 아이에게도 화가 나서 화만 낸다. 화만 내는 엄마로서는 아이는 욕구 충족이 안 되니까 더욱더 사랑을 확인 하려는 요구가 많아지고 엄마와 아이의 대상관계는 나쁜 표상을 갖게 된다. 엄마가 화만 내면 아이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이 되지 않으니 욕구는 더 많아지고 엄마로서의 삶이 아니고 엄마는 엄마 같지 않고 아이는 점점 더 매달리고 대상관계는 행복하지 않은 관계가 된다. 사람은 유아시절 대상관계가 행복해야 인생이 행복하다. 대상관계가 행복하려면 부모도 행복한 사람 밑에서 자라야한다. 불행과 고통도 유아시절 대상관계의 불행에서 시작한다. 불행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는 불행하다. 불행도 유전이라면 유전이다. DNA로 유전이 아니라 침전되어 염색이 되는 것이다. 행복한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부모와 가졌던 대상관계를 반복한다. 행복한 부모 속에 행복한 부모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의 행복이건 아이의 불행이건 엄마가 가진 부모상과 관계가 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서 행복한 관계를 배워서 자신의 아이와 만들어 간다. 다시 말하면 행복도 배운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지만 왜 행복하지 못할까. 행복이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우울도 배운다는데, 그러면 행복이 훈련될 수 있을까? 연습하면 되나? 사람들이 사는 목적은 다 다르다고 하지만 궁극적 가치는 행복일 것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행복하지 않으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 되면 행복 할 것 같고 요것만 지나면 또 행복할 것 이라고 기대하며 산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목표가 자녀가 어렸을 때는 행복한 어린 시절, 성인이 되었을 때는 행복한 성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행복한 어린 시절은 전적으로 부모책임이고 부모가 자녀에게서 행복을 느끼면 자녀는 부모가 느끼는 대로 만들어진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자녀에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부모가 자녀의 욕구에 민감하고 자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자녀를 사랑하고 예뻐하면 된다. 여기서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요구는 아이의 욕구의 변형된 모습이고 의사소통 방법이다. 충분한 욕구 충족이 안 되니까 쓸데없는 요구가 많아진다. 또 자녀가 성장하여 행복한 성인이 되는 것은 자녀가 자기 일에 의미를 갖고 일과 생활의 균형을 갖는 것이다. 쉽게 말하여 성공이란 자기 일에 몰입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일을 좋아할 때 몰입이 일어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능력에 부합하는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정확히 선택하여 연습을 할 때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하는 일을 좋아하고, 즐겁게 할 수 있다. 성취감은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세심한 연습과 노력으로 얻어진 행복한 체험이다. 유아시절 유아가 놀이에 몰입할 수 있어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성인이 되어 하는 일에 몰입을 하면 성공이다. 성공이란 이것저것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몰입하며 사는 것이다.
 

행복해야 할 의무

독일의 시인 헤르만 헤세는 사람이 태어날 때 갖고 나온 의무는 행복해야 할 의무 뿐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행복해야할 때 오직 선과 사랑만 하면 된다고... 일찍이 이렇게 명쾌하게 인생의 지표와 업무를 확실히 알려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해야 할 의무를 이행할 때 이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능력이다. 우리가 일 할 수 있는 능력, 돈 벌 수 있는 능력,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듯이 행복할 수 있는 능력도 내 자신이 갖고 있다. 길을 잘못 가고 있을 때, 중요한 일을 게으르게 하고 있을 때 누가 알려주면 알아듣고 바로 잡을 수 있는 능력도 행복 할 수 있는 능력이고 이 능력이 있어야 행복해야 할 의무도 이행 할 수 있다. 

엄마는 자녀가 행복해야 행복 할 수 있다. 아무리 분리된 독립체여야 한다지만 부모 자녀사이가 별개가 될 수 없다. 아이로 내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녀가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만든 엄마가 치료 받아야 한다고 하면 자신의 잘못이 낱낱이 드러나고 아파서 치료를 거부한다.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하여 아이의 행복도 거부하는 엄마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행복해지고 싶어도 돈 내주고 엄마가 동의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밖에 없고 이때 엄마는 아이를 꾀고 아니면 비난한다.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자녀가 자신의 행복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엄마는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염원인 우리나라 통일을 우리가 원할 때, 주변국이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다. 주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통일을 슬그머니 반대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힘이 없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이도 마찬가지다. 힘이 없으니 엄마가 변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무슨 권리로 자녀가 행복해야할 의무를 막는단 말인가? 사람은 나면서 성장해야 하는 능력과 행복해야 할 의무만 갖고 나왔다.
통일을 원하지만 국가도 힘이 생기거나 또 주변국이 변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자녀도 행복하길 원하지만 부모가 막으면 부모가 변하거나, 자녀가 힘이 생길 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머리 좋은 아이를 키우는 방법.

 모든 어머니는 머리 좋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한다. 머리 좋은 아이는 기억력이 좋은 아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창의성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과다한 간섭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창의력이 없는 아이가 된다. 어머니의 창의성 박탈 때문이다. 창의성이 없는 아이들은 능력도 없다. 어머니에 의해서 능력마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창의성과 능력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 갖고 나온 창의성과 능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이는 오직 아이를 믿고 지지함으로써 가능하다. 아이는 놀아야 하고 장난을 쳐야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된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시켜서 하도록 하면 안 된다. 어떤 어머니는 엄마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고 교육하는데 그렇게 해서 하는 것은 엄마가 두렵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 뭐가 재미있겠는가? 재미가 있는 일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며 그 일에 빠질 때이다.
아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자란다. 자라는 것은 변화이며 성장이고 살아있다는 증거다. 어려서는 열심히 논다. 노는 것이 성장이고 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커간다. 잘 놀지 않는 아이는 어딘가 아픈 아이다. 신체적으로 아프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아픈 아이다. 잘 노는 아이가 건강한 아이다. 큰 아이도 쫓아다니며 제 분수에 맞게 놀 줄 아는 아이가 건강한 아이다. 아이는 잘 놀게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이를 꾀는 방법은 아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을 주거나 아니면 같이 놀아주면 된다. 그러나 아이 마음속에 정말 아이가 사랑을 느끼는 것은 잠깐 동안 입이 호강하는 캔디보다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보고 마음으로 웃고 눈으로 웃어주는 것이 기억 속에 웃는 것으로 각인된다. 그래서 별로 만나지 않았는데도 같이 놀아준 사람을 좋다고 하고 사랑한다. 그러니 아이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쉬운데 못한다.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한다. 왜냐고 물으면 멋쩍어서 안하겠다는 것이다. 같이 놀아주려고 하면 무언가 어색해서 아이의 반응에 반응하지 못한다. 이는 어른이 어렸을 때 실컷 놀지 못했고 그의 부모도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와 놀이를 통하여 아이의 능력을 확장하고 성취를 시킨다. 컴퓨터의 용량이 같다고 하여 컴퓨터가 모두 똑같은 컴퓨터가 아니듯이 아이의 지적능력과 성취능력도 똑같이 갖고 태어났다고 똑같지 않고 어른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 삼성이나 애플에서 나온 컴퓨터가 모두 비슷하듯이 사람의 기억세포수가 아이슈타인도 나도 똑같이 120 억 개다. 업그레이드나 기능 확장은 아이가 어릴 때는 공부 시킬 때는 아니니 같이 노는 것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는데 그 노는 것을 못해준다니.....
 오늘은 25개월 된 아이가 아빠가 출근할 때 배웅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안 나갈게요” 라고 해서 왜 안 나갈 것이냐고 물으니 놀아야 되기 때문이란다. 뽀로로에게 우유를 먹이며 노는 것이 재미있고 바빠서 안 나가겠다고 한다. 아이는 놀이를 실존으로 받아들여 뽀로로도 실존인물이다. 좋아하는 아빠 배웅도 못할 정도로 놀이에 몰두함으로 인지세포는 업그레이드되어 머리가 좋아진다. 지능지수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부모에 의해 또 놀이를 통하여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120억 개 세포의 용량은 다 같은 것이니 용량을 확장하는 작업은 부모가 즐겁게 그 수준에 맞추어 온 정성을 다하여 같이 놀아주면 되고 부모도 즐거우니 엔도르핀이 나와 부모도 건강해지고 아이에게는 좋은 대상이 된다.
21세기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공감능력과 창의력을 갖추고, 끈기와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기업뿐 아니라 대학의 교수요원도 책에 있는 것을 전달하는 피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창의성을 갖춘 사람을 요구한다. 때로는 시키는 일은 헌신적으로 잘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헌신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위에 창의성 있는 사람이 어느 사회에서든 기여할 수 있고 요구되는 인재이다.  

친밀함의 능력

친밀함의 능력

 나는 어려서부터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였다. 천방지축 나서는 것보다 침착해보이고 순진해 보였지만 외향적이며 적극적이고 사람을 잘 사귀는 사람을 보면 많이 부러웠다. 나는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 명확해져서 좋다.
사람과 잘 사귀고 친근해지는 능력은 단순히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이 정말 큰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사회에서 승리자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립감에서 벗어나 이 친밀함을 위하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패배자 아틀라스도 역시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주 조그만 결과를 얻기 위해서도 세상사는 도전해야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친밀한 능력을 갖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시도해 보고 도전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자율적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자율성은 유아가 엄마로부터 분리개별화되는 18개월부터 36개월 시기에 획득해야 하는 과업이다. 이때 이 자율성과업을 이루었으면 대상 즉 사람과 친밀함을 위하여 좀 힘이 들더라도 노력하면 로빈슨 크루소에서 벗어나 친밀함의 능력을 갖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남이 보기에는 사람을 잘 사귀는 것으로 보이는가 본데 실은 친근해지는 능력이 없어 혼자 외롭고 왕따가 된 기분을 자주 느끼며 서운해 하기도 하고 힘들어 한다. 친밀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자율적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았으니 사람들과 잘 지내기로 결정하면 된다. 괜히 위신 찾고 젊잔 빼고 하는 것이 외롭고 불편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28개월 된 아이가 부쩍 사람들 등에 기대고 얼굴을 타인의 얼굴에 비비며 친밀성을 나타낸다. 아이 엄마가 요즈음 많이 안아주고 의도적으로 스킨십을 한 것 같다. 사람한테 어설퍼하지 않고 착착 달라붙는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른도 아이가 얼굴을 비벼대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이는 물론 어른이 스킨십을 하면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그 행동을 자기도 하며 사랑받을 짓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모든 엄마가, 엄마가 되기 전에 알았더라면 모든 아이가 살아가면서 외롭지 않고 어설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것이다. 친밀함이 몸에 배어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친밀함이 몸에 배어 있지 않다. 왜냐면 그렇게 해 줄 엄마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상대가 먼저 친밀함을 보이면 좋아하고 편안한 관계가 된다. 성인이 되어 맺는 인간관계의 질은 어렸을 때 만들어준 친밀함의 능력에 좌우된다. 28개월 된 아이는 2층층계를 먼저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뒤쫓아 오는 할머니, 고모, 엄마, 아빠의 손을 잡아 올린다. 기가 막히게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지가 오히려 끌려 내려올 판이면서 성인이 이를 받아주니 아주 기분 좋아한다. 남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모습을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 아이가 하는지는 몰라도 처음 한번은 누군가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시작은 사랑받기 위함이었다. 사랑받기 위한 행동에 성인이 반응해주었기에 사랑받는 행동은 증가되어 익숙해졌고 친밀함이 몸에 밴 아이는 동년배 아이가 말이 서툴러 중얼거리면 "뭐라고?"하며 끼어들어 참여한다. 이를 통하여 인지가 무섭게 발달하는 단계이다. 대상관계가 쌍방의 모자관계에서 세상과의 관계로 넓혀지며 세상일에 흥미를 느끼고 대상관계를 넓히려는 단계가 28개월부터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병적으로 빠진 사람이 제 분수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친절한 경우 그것도 사랑받기 위함이고 가식이다. 아무나 손잡고 할렐루야! 를 외치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고 무엇이든 과하면 이상한 것이다. 친밀함과 가식은 구별되어야 한다.

아동자아
아동자아에는 천성적 아동자아와 개작된 아동자아, 어린교수가 있다. 성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아동자아가 활동하고 있고 어떤 아동자아가 활동하고 있는지 탐색하여 본다.
어렸을 때 느꼈던 대로 느낀다면 이것이 바로 아동자아 상태이다.
천성적 아동자아 상태는 무엇인가 받고 싶어 한다. 사탕이나 초콜릿이나 하다못해 위로의 말이라도 받고 싶어 한다. 개작된 아동자아 상태는 그 문제를 지연시키거나 또는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길 바란다. 
어린 교수는 창의적 문제해결을 하거나 마술을 기원한다. 사람들은 몹시 다쳤을 때 천성적 아동자아 상태는 울면서 소리치고 싶어 할 것이며 보살핌을 바랄 것이다. 개작된 아동 자아 상태는 어렸을 때 매를 맞았던 경우에는 조용히 괴로워하며 위축되어 버린다. 어린 교수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원하는 바를 얻거나 의사한테 가기 싫어 상처를 감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사건은 아동 자아 상태를 활성화 시킨다. 
천성적 아동자아는 자유롭게 느끼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표현을 잘 하고 애정적이고 잘 놀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한다. 어린 교수는 작고 똑똑한 소년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다른 사람을 조정한다면 어린 교수가 작용하는 것이다. 
 개작된 아동자아 상태는 사회적 인식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지만 예의 바르고 대드는 것을 피하고 고분고분하다. 어떤 사람이 부모처럼 다가올 때 아동자아가 활성화 된다.
아동자아 상태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싶다면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유아기의 가정을 상상해 본다. 물론 기억해 내는 것은 어렵고 떠오르는 것이 캄캄할 수 있다. 
제일 처음 기억되는 가정을 상상해 본다. 
지금 거기에 보이는 것만 보도록 한다. 사람이나 가구, 물건, 방을 자세히 둘러보고 색깔, 형태, 장식, 문, 창문, 정원, 나무, 그릇 등을 둘러본다. 그리고 무엇이 들리고 무슨 냄새가 나고 무슨 맛인가, 무엇이 느껴지는지 그리고 감정을, 기분을 느껴 본다. 보이는 사람의 얼굴, 제스추어, 자세, 옷 등을 보고 어떤 상호 작용이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구조자와 박해자, 희생자가 누구인지 살펴본다. 
 어렸을 때 가정을 기억한 다음 어릴 적 사진 중 하나를 꺼내어 살펴보며 기억이 되살아나게 한다. 행복했던 시간은 어디서 보냈고, 슬픈 순간은, 심각한 순간은 어디서 보냈고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천천히 기억해본다, 
당신의 사진 속 모습 중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지금 당신에게서 보았으면 하는 점을 사진 속 에서 볼 수 있는지?
어릴 적 사진을 본 후 이 어린이를 상상의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친숙해지도록하고 내면의 아동자아상태의 고통, 행복, 소망을 들어본다. 이러한 방법으로 내속의 아동자아를 달램으로서 개작된 아동자아나 어린교수를 천성적 아동자아로 만들 수 있다. 피상담자가 현실에서 힘들어 할 때 아동자아를 일깨워 자아가 자유롭고 표현을 잘하고 잘 놀 수 있는 천성적 아동자아로 만드는 치료방법이 아동자아 활성화 방법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사람에게는 거울 신경세포가 있어서 공감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거울 신경세포가 있다 할지라도 엄마가 그 엄마의 엄마에게서 수용 받지 못했으면 미해결된 채로 남아 있다가 “네가 뭔데 내게 짜증내고 울어대!” 하며 아이가 짜증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엄마가 짜증을 낸다. 이것이 초감정이다. 이런 감정이 있어서 짜증이 난다는 것을 엄마는 알아야 한다. 나를 키운 엄마가 나의 짜증을 안 받아 주었기 때문이고 나의 엄마도 외할머니한테서 그렇게 키워져서 나와 똑같이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다.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 느끼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성적을 67.8%가 수우미양가에서 양을 주었다. 자녀가 울면 보기 싫고 참 밉고 괴물 같기에 우는 애를 빨리 달래려 하지 않고 엄마가 다른 방으로 가버린다든지 하는 엄마는 그녀의 엄마에게서 그녀가 울을 때 “네가 하도 울어서 동생이 장애아로 태어났다”고 하는 상처를 받은 경우도 있다. 그때 상처 받은 심리적 아이가 크지 않고 엄마가 되어 아이에게 상처받은 아이가 반응하며 대물림을 하는 것이다. 엄마에게서 충격 받고 수용 받지 못하고 미해결된 채로 남아 지금도 아이가 울면 화가 나거나 창피하거나 해서 달래지 않고 내버려두거나 빨리 피하면 아이는 대물림되어 수용  받지 못하고 자라 모성이 없는 엄마가 또 된다. 비록 좋은 엄마를 가지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 좋은 엄마가 될 것인지 나쁜 엄마가 될 것인지 선택을 하면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치료다. 과거는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새롭게 시작하려는 결정을 마음의 수행(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해)을 통하여 하면 된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仁)의 시작이다. 삼덕(三德)은 지인용(知仁勇) 인데 지(知)는 공부를 해야 하고 용(勇)은 치욕을 알면 일어나는 것이고 인(仁)은 정성을 갖고 수신하는 데 수신은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다. 제일 먼저 엄마와 아이와 친해지는 것이 인(仁)의 시작이고 나아가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仁)의 첫 단계는 대상관계이고 모든 사람에게 인(仁)을 실천함이 성숙이다.

외할머니 때문이야요

외할머니 때문이에요!

세상에는 신도 많다. 기독교는 유일신이지만 우리의 토속종교관은 다신론이다. 이 중에 가장 막강한 신은 엄마 신이다. 어떤 신보다 가깝게 구체적으로 몸으로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행동으로 보여주며 가르치는 신이 엄마 신이다. 우리는 신을 믿으면 신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한다. 특히 이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유일신의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신의 가르침을 따르려하고 석가나 공자를 믿는 사람들은 각각의 종교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정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려 한다. 아이는 엄마의 눈 속에 비친 두 개의 자신의 모습을 부처로 알기도 하고 이 눈부처를 보는 순간 엄마와 나의 경계는 무너진다. 둘은 하나가 된다. 엄마는 자녀에게 맛있는 꿀 같고 초콜릿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30개월 된 아이는 엄마와 분리개별화를 준비하면서 아주 쉽게 삐져본다. 삐져서 엄마가 달래는지 기다려보고 엄마가 달래며 들어올 틈을 보여주면 얼른 기뻐서 다시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과 엄마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떨어져 나간다. 엄마의 사랑으로 둘이 하나가 되었다가 엄마의 사랑으로 하나가 다시 둘이 되는 것이 만 세살 전후이다. 이때 삐지며 사랑을 시험하던 아이는 삐지면 언제든지 엄마가 달래주고 사랑해준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떨어져 나간다. 삐질 때 아이는 엄마는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우리의 모든 조상과 미래의 모든 후손은 지금 우리에게 존재한다. 우리 안에 있는 조상이 고통을 받으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그 고통을 아이들에게 대대로 물려준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딸은 나로 하여금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몸은 엄마 몸과 이어진 몸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못 받은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 걸을 때 “엄마 저와 함께 걸어요.” 라고 말하면 내안의 엄마와 같이 함께 걷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울고 싶을 때 “엄마 너무 힘들어요.” 라며 울면 엄마가 달래주는 느낌을 받는다. 내 감정을 누가 알아주면 우울은 사라지고 그냥 슬픔이 된다. 그 슬픔은 아름다운 것이고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은 승화될 수 없다. 우울은 우리를 파멸시킨다. 모든 여성이 엄마가 되면 잠자고 있던 모성의 대물림이 일깨워진다 하였다. 3세대에 걸친 애착의 안정성은 75%가 엄마와 일치한다. 하워드 스틸이 말하길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간접 광고로 코카콜라를 0.1초간 보았을 때 영화 관람이 끝나면 대부분의 관객은 코카콜라를 찾는다고 하는데 24시간 엄마의 행동을 보고 자란 아이가 어찌 엄마와 같지 않겠는가? 어떤 신보다 강력한 신이 엄마신이다. 모신(母神)말이다. 

아이가 맘에 안 들어요! (아이는 엄마의 참모습)

 말을 안 듣는 아이의 부모는 아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 부모는 아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자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현명한 부모가 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모른다. 아이가 말을 듣는 버릇도 듣지 않는 버릇도 부모에 의해 만들어진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듣기 좋은 말, 의미 있는 말을 부드럽게 하지 않는다. 부모는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되는 말만 하기에 아이는 듣기 싫어 말을 듣지 않는 버릇이 생긴다. 이 굳어진 버릇 때문에 부모의 말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아이가 된다. 말을 듣지 못하는 두꺼운 벽창호는 말을 선별해서 듣고 싶은 말만 듣는데 듣고 싶은 말이 잘못하라는 말이다. 부모가 달고 사는 말은 아이가 듣기 싫은 말들이다. 공부해라. 좋은 일 해라. 부모 말 잘 들어라. 부모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라 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아이의 마음에 드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을 못 받아 지식의 배가 고픈 어머니와 사는 아이들은 답답하다. 배고픈 어머니는 아는 것이 없어 자신이 아는 것으로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도 엄마와 같이 고집을 부리는 강한 버릇이 생긴다. 그러한 어머니 밑에서 그러한 아이들이 자랐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의 모습이다. 아이의 성질이 바로 엄마이다. 
 日本의 이큐선사(一休)는 어느 날 강도를 만났다. 강도가 금부처를 내놓으라고 하니 내가 부처라고 했고 강도가 부처가 어디 있냐고 물어 가슴속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강도가 부처를 훔치기 위해 가슴을 콱 찔렀다. 이큐선사는 “벚꽃나무를 베어봐라 그 속에 벚꽃이 있는지”라며 죽어갔다. 벚나무 속에 벚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벚나무 속의 성질은 이른 봄 벚꽃으로 드러난다.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겉모습이 바로 속 모습이고 진정한 나이다. 흔히 겉보다 속이 아름답다든지, 겉을 폄하하고 속을 찬양하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러나 그 속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벚나무 속에 벚꽃의 성질이 있으면 벚나무에 벚꽃이 만발하듯이 속이 찼으면 겉으로 꽉 찬 모습이 드러나리라. 
엄마 속에 화려한 벚꽃의 성질이 있으면 아이는 화려한 벚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나 엄마는 내 모습을 똑바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내 소망이 영향을 주고 나의 편견과 내 느낌이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때는 내 자녀에게 비추어진 내 모습이 아름다운가? 아니면 욕심꾸러기인가? 부끄러운가? 감추고 싶은가? 화를 잘 내는가? 못난 짓을 하는가? 찾아보면 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로서 참모습을 비추어준다. 아이에게 비추어진 모습이 내 모습이다. 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이 내 모습이다. 아이의 행동이 부모 나의 행동이다. 아이라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이라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아이가 바뀌길 바라는 것이 아니고 비춰진 내 모습이 내 맘에 들도록 나를 바꾸어야 한다. 아이를 바꾸려하지 말고 내가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서로 안 바꾸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러면 엄마와 아이는 고집으로 같이 망하게 된다. 엄마만 바뀌면 아이는 저절로 바뀐다.
성인이 되어 유난히 제삼자의 잔소리에 예민한 사람이 있다. 막노동하는 사람 중에 특히 잔소리하면 하던 일을 팽개치고 가버리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는 잔소리를 하면 안 한다며 자신의 성질을 아쌀한 성격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착각이다. 막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대화를 통하여 일을 하기 마련인데 유난히 잔소리에 예민하여 하던 일을 팽개치는 것은 잔소리를 못 견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대상관계에서 잘 해도 잔소리 못 해도 잔소리를 들음으로 힘든 기억때문에 성인이 되어도 어린 시절이 몸에 배어 있어 어린 아이처럼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말을 안 듣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말을 안 듣는 성인이 된 것이다.

부모는 자식 속을 썪이면 안돼

자식은 부모 속을 썩여도 부모는 자식 속 썩이면 안 돼!

자녀를 한명이라도 키워본 사람은 자녀 때문에 속 썩기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집에 속 썩이는 애가 있어 속 썩어 죽겠다고 하소연하는가 하면 속 썩이는 자식조차도 없는 사람은 속 썩이는 자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자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은총이면 속 썩이는 자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겠는가? 속 썩이는 자식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자식은 자라면서 성장단계를 넘기 위해 힘들어 하고 부모 속을 썩이면서 성장한다. 이때 부모 속을 썩인 힘이 자양분이 되어 부모의 썩은 힘으로 자란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한말의 밀알이 나오듯이 모든 생물은 썩어야 자녀를 키운다. 개중에는 죽으면서 새끼를 낳는 송어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유독 사람은 썩지 않으려고 아우성치는지 모르겠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그런데 개중에는 부모가 자식이 어렸을 때 자녀사랑이 아니라 자녀를 지배했던 힘으로 자식  속을 썩인다. 자녀가 커서도 자녀가 어렸을 때 지배했던 심리적 힘으로 부모가 자녀 속을 썩이면 자녀는 꼼짝도 못하고 부모에 지배 받으면서 속을 썩는다. 자녀는 속을 썩으면 행복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자녀는 부모 속을 썩이며 이것이 파지가 되어 성장한다고 하지만 다 큰 부모는 자녀 속을 썩이며 성장할 리가 없다. 자식은 상전이란 말이 있듯이 자식은 내가 속 썩일 대상도 아니고 무시할 대상도 아니고 좌지우지할 대상도 아니다.
자식은 상전이 맞는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나도 자식눈치를 본다, 아직까지는 우리부부 모두가 건강하고 우리부부의 경제력으로 자식을 도와주건만 자식이 행복하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상전이다. 며느리가 들어오고 사위를 얻으면서 상전이 늘어났다.
말도 더욱 조심하고 몸가짐도 단정하게 하며 상전들이 기분 좋게 하려고 한다.
옛날에 중곡동 천주교회 신부님은 미사강연 시간에 “애들한테 그렇게 쩔쩔매서 이다음에 어떻게 하려고 해요!”라고 과잉보호를 하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속 썩이는 것과 과잉보호는 반대개념이다.
과잉보호는 자녀에게 주어야할 훈육이나 제제를 하지 않는 것이고 과잉보호가 아니라 자녀가 귀하고 중하고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모든 부모가 느낀다면 부모가 자녀의 조그만 일 하나 하나에 간섭하지 않고 나아가 직업을 선택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존중해주면 자녀가 속 썩인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테고 자녀도 부모 때문에 속 썩지 않을 것이다. TV드라마에서 보면 부모가 자녀 속 썩이는 일은 대부분 배우자 선택 때 많은 부모는 무슨 권리가 있는 듯이 반대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반대할 자격도 없는 부모가 낳았다는 것 그것 하나 갖고 감 놔라 사과 놔라 하며 간섭하고 반대하는 꼴은 참 가관이다. 특히 자녀의 결혼에 1원 한 푼 지원도 못하면서 자식을 갖고 무슨 문물교환이라도 하는 것처럼 팔아먹으려는 부모도 있는데 원시 비문명 사회에서나 있는 작태가 아닌가한다. 자녀가 배우자 선택 할 때 부모는 절대 반대할 권리가 없고 축하해 줄 의무만 있다. 이러한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아들이 의과대학 졸업하자마자 수련도 하기 전에 결혼한다고 하여 아들 혼사에 나 나름대로 교양 있게 반대했건만 아들은 그 나름대로 매우 속을 썩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두고두고 결혼을 반대했다고 이야기하니 말이다. 자녀의 속을 썩이지 않아야 교양 있고 예의바른 부모가 된다. 특히 교양 있는 부모는 자녀의 결혼을 반대했다 할지라도 결혼이 진행되면 능력껏 지원해주고 축하해 주어야 한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부모도 있는데 이것은 절대 교양 있고 예의바른 부모가 아니다. 자녀는 상전이라는 이야기가 못마땅해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정 상전이어야 행복한 부모자녀관계가 된다.

안아주기

안아주어야 한다.

 내가 어제 다녀온 수원의 한 보육원의 정의순 원장님은 아기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보육사들이 자원봉사자들에게 아기들을 안아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속상하다고 하셨다. 이유는 봉사자가 떠난 후 아기들이 안아달라고 울고 보채기 때문에 보육사가  못 안아주게 한다고 하는데.... 쉽게 말해 손 탄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버릇이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안나 아주머니의 일화가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독일의 많은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위생상태도 좋고 영양상태도 좋은데 영유아 생존율이 낮아 조사를 해보았더니 아기들을 시간나는 대로 업어주는 안나 할머니가 계시는 뒤셀돌프 어린이 병원에서는 아이의 사망률이 낮았다고 프리츠 탈보트 박사는 보고하였다. 그 후 사랑이 없으면 죽음을 달라고 죽어가는 아이들의 병명을 마라스므스 박사가 마라스므스라고 명명하였다.
 우리는 영아의 생리적 기본욕구에 민감해야 대상과 안정 애착이 형성된다는 것을 잘 안다. 영아의 생리적 욕구는 먹고 배설하는 것만이 아니라 따뜻한 실내온도와 체온유지와 몸의 균형이다. 태아시절 엄마 품에 안겨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 세상에 나와 누워있거나 엄마와 떨어져 있게 되므로 영아는 몸의 균형을 잃게 된다. 그래서 포근하게 안아달라는 것도 생리적 욕구이다. 옛날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고된 시절 며느리는 아기를 안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으리라. 밭에 나가 일하고 부엌일하고 밤에는 길쌈 매고 쉴 시간이 없이 일을 했지만 아기 젖먹이는 시간만큼은 그래도 모성으로서 아기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기를 안아주는 시간이 엄마에게는 물론 아기에게도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고약한 시어머니는 아기가 손 탄다고 아기를 안지 못하게 했다. 요는 며느리 쉬는 꼴을 못 보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 고약한 시어머니의 심통이 보육원에서 보육사에 의해 재현되고 있어 참 슬픈 일이다. 아기는 가능한 많이 안아주어야 한다. 미국의 가족치료자 버지니아 사타이어는 아기가 살기 위해서 최소한 하루 여덟 번,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루 열두 번 안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자녀가 말썽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안아주며 느낌을 말하라고 하면 보통의 부모는 “어쩜 이렇게 잘생겼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길 한다. 자녀를 안아서 보는 것과 안지 않고 보는 느낌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 어찌 자녀에게도 느껴지지 않겠는가? 아기는 안아 주어야 생리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가 충족이 되어 살 수 있고 클 수 있다. 미국이나 구라파 사람들은 성인이 만나도 서로 안아주는 포옹인사를 하는데 우리는 좀 어색하긴 하지만 안아줌으로서 엔도르핀이 나와 면역 쳬계의 변화가 생긴다면 우리도 서로 안아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나는 20-30년 전 서양 사람들이 안아주는 인사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고 어색했다. 무식해서 그랬다. 영국의 정신의학자 위니컷도 충분히 좋은 엄마는 아이를 충분히 안아주어야 하고 아기의 표정에 반영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서양 사람들보다 아이가 어렸을 때 덜 안아 주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안아주는 인사가 멋쩍고 어색한 것이다. 우리 며느리가 아이를 잘 키우는 것 같은데 아이를 하루 최소 여덟 번씩은 안아주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그렇게 많이 안아주어야 하느냐고 놀라더니 그렇게 했는지 아이가 갑자기 할머니에게 안기고 얼굴을 비비고 뽀뽀를 여러 번씩하며 감정이 풍부한 아이로 변했다. 많이 엄마가 안아준 덕에 귀염둥이로 변한 것이다. 정서가 발달한 것이다. 사람은 말과 음식과 스킨십을 통하여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사랑한다는, 잘한다는 긍정적인 말과 달거나 맛있는 음식과 안아줄 때 살갗과 체온과 냄새의 전달을 통하여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데 아기는 엄마(대상)가 안아주면 행복한데 말보다 음식보다 더 쉬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 어려워하는 것은 엄마도 안겨보질 않아서 그럴 수 있다. 알면 결심하고 실천하면 엄마도 변하게 된다.

외할머니가 속 썩여요!

외할머니가 속을 썩여요!

‘SBS의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의 최강엄마 최강아이에서 나오는 태윤이는 동생과 친구들과 싸우고 화를 못 참고 밥상을 뒤집기까지 한다.
어떻게 싸움 닭 같은 애가 있을까? 라고 하겠지만 그런 아이로 엄마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을까? 물론 없다.
태윤이는 엄마라는 환경이 만든 아이다. 그러면 그 엄마는 누가 만들었을까? 물론 태윤이 외할머니가 만들었다. 태윤이 엄마는 항상 목소리가 한 옥타브 정도 높고 괜히 소리 지르고 매는 들고 살며 못살겠다고 남편에게 소리 지르는 강한 엄마다. 그러나 실은 정말 강하다면 소리 지르지 않는다.
태윤 엄마는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태윤이는 엄마를 뱀 같다고 표현한다.
납작하고 갸름한 얼굴형에 예쁜 눈과 오뚝한 코 야무진 입술이 있는 아주 예쁜 얼굴을 가졌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웃음이 이상한 분위기를 갖고 갑자기 돌변하면 아들이 아닌 나도 뱀같이 징그럽게 느껴진다. 이 엄마는 태윤이의 환경이다.
 태윤이 엄마의 환경은 그 또한 태윤이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엄마 내면에 엄마로 있으면서 짜증내는, 후닥닥 때리는 그러다가도 아이들을 위하여 호박죽을 힘들게 쑤는 외할머니가 키운 엄마다.
형을 아무 때나 때려주는 엄마가 미워서 평상시 형과 싸우던 동생 민기까지 순간 발차기로 엄마를 제압한다.
다섯 살 아이가 보기에도 엄마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외할머니라는 엄마의 환경에서 잘못 키워진 엄마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하고 있다. 베트남 승려 틱낫한은 우리의 조상과 미래의 후손은 지금 우리 안에 존재하여 우리 안에 있는 조상 때문에 아직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하지 않으며 그 고통을 아이들에게 대대로 물려줄 것이니 명상을 할 때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 함께 마음챙김수행을 하며 걸으라고 했다. 마음깊이 들여다보는 수행을 할 때 우리 몸의 모든 세포 안에 엄마가 존재하는 것을 목격하고 우리의 몸은 엄마 몸과 이어진 몸이니 “엄마 저와 함께 걸어요.” 라고 말하므로 엄마와 함께 걷고 있음을 느끼면 평화로워진다고 했다. 그래서 조상과 화해해야 내가 나의 후손에게 조상에 대한 미움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것 같다. 대상관계이론에서 세대 전수이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이해를 함으로서 자신의 엄마에게 구박받는 자신을 이해하고 그 자신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모두 외할머니 때문이다.



 좋은 엄마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아이가 안 먹는다고 속상해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 음식이 아기 성장에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아기가 해롭게 느끼고 안 먹는 것이 잠시 동안임을 잘 안다. 좋은 엄마는 얼마 후에 아기는 잘 먹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야단법석 떨며 그것이 좋은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강제로 아기 입에 집어넣으려 하며 아기에게서 인정받으려하지 않는다.
현실은 아기가 상상하는 세상과 다르며 엄마는 아기의 상상은 아기가 사는 세상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엄마는 유아에게 대상제공을 해야 한다. 아이의 관심의 능력을 발달시키고자 필요한 기회를 제공하며 아무리 작은 것 이라고 할지라도 성취 뒤에 재능보다는 아기의 노력을 평가하는 수용과 인식이 아이의 미성숙을 허용하고 자발성을 질식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엄마는 자신의 가치와 사회의 가치를 전달한다. 아이가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하고 작곡하기 위해서는 배변 활동과 나팔 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기가 처한 대상 환경은 아기의 변화하는 욕구에 적응하면서 그 자체로 성장한다. 아기는 절대적 의존에서부터 상대적 의존을 거쳐 독립을 향한다. 엄마와 융합된 상태에서 분리되는 상태로 가는 것은 엄마가 촉진기능을 할 때 가능하다. 엄마가 젖을 떼야 아기는 젖이 떨어진다.
모성기능의 첫 번째 기능은 유아에게 전능경험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모성기능의 두 번째 기능은 적응에서 벗어나기이다. 적응의 틀은 새 정신기능을 사용하는 아기의 능력을 순간순간 감지할 수 있는 엄마의 기능이다.  아기가  적응의 틀을 벗어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유아의 욕구에 모든 것들이 계속 존재하여 충족된다면 아기는 통제를 획득할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창조적인 몸짓, 울음, 항의, 엄마의 행동을 일으키는 행동이 필요 없게 되어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지 못하고 작은 신호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엄마가 이렇게 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은 엄마로 보이지만 유아를 거세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차례 상을 보자마자 먹을 것이 많아 좋아하는 2살 된 아이에게 차례를 지낸 후에 다 줄 것이니 손대면 안 된다고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24개월이면 말귀를 다 알아 듣는다. 그리고 이 아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우유를 주었더니 빨대를 껴서 주어야 한다며 차례 상에서 관심을 끊었다. 이러한 일은 유아에게 적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 이 가르침이 내재되어 아이를 인내하게하고 통제하게 하는데 이것이 내통제(자기통제)이고 자율성의 획득이다. 이는 분리개별화기에 꼭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4개월 전만 해도 차례 상에 관심을 갖던 28개월 된 아이는 차례 상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고 어른들이 절을 하면 같이 절을 하고 쉬었다가 다시 절을 할 때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소파에서 얼른 내려와 또 어른들을 따라 절을 한다. 그리고 미끄럼을 탈 때 4개월 전 깔아준 방석을 기억하고 방석부터 깔아야 된다고 방석을 옮기는 것은 어른들의 행동 하나 하나는 아기의 기억 속에 알알이 박혀 아이의 정신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성은 아기에게 전능경험을 주기 위하여 아기의 재능보다는 아기의 노력을 평가함으로서 자발성을 질식시키지 않고 두 번째로 아기가 적응의 틀을 벗어나게 함으로서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이는 자기통제와 자율성 획득의 계기가 된다.

유리벽 (의사소통)

시간과 공간을 떨어져 지낼지라도 사람은 관계를 이루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현대인은 인터넷공간에서 서로 알지도 못하면서 본 적도 없으면서 마음 속 깊은 이야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길 하며 심지어 죽음도 같이 간다. 그런가 하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유리벽이 있어 서로 소통하지 않고 관계 맺지 않는 진정한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이 문제이고 제 3의 가상의 공간에서의 소통도 문제이다. 소설이지만 벽을 사이에 두고 남매가 가상의 공간에서 사랑에 빠진 경우도 있다. 같은 공간에서 소통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관계는 환상이다. 현실에서는 유리벽을 만들면서 얼마나 관계를 맺고 싶었으면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남매는 연인이 되었겠는가? 현실에서 유리벽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안 해주니 가상의 공간에서는 해줄 것 같아 가상의 공간으로 간다. 오늘날 젊은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현실을 도피하여 가상의 공간으로 도망치고 있으며 그 속에서 활발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공상의 세계이다. 요즈음은 컴퓨터보다도 아이들이 중독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 한다. 손쉽게 항상 손에 있으니 옆의 사람과는 소통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고 모르는 사람과 소통한다는데 이는 소통이 아니다. 정신병이다.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인간명품 만드는 법)

 풍수지리에 의하면 명당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땅의 장점을 찾아 정을 주면 명당이 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이다. 개개인의 장점을 찾아 인간 명품은 만드는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자기 새끼는 본능으로 잘 키우는 것 같다. 그러나 동물 중에 어떤 어미는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중도에서 새끼를 잃을 수도 있고, 새끼를 잘 양육하지 못 해 야생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 도 있다.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육체적으로 건강해야하고 주위의 더 힘센 야생으로부터 민감하고 이기지 못하면 피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말하듯이 인간도 건강하게 태어나야하고, 건강하게 태어나서도 잘 커야 한다. 
 태어난 후에는 신체적 건강과 정서적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로 신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해도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신체적 건강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때로는 폭력이 되고 무기가 된다.
그래서 모든 모성은 새끼의 신체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에 더욱 민감해야 모성으로서 책임을 다 할 기초가 되어야 한다. 

어떤 모성은 아이를 위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그 모성이 직장까지 그만두고 직장에 있어야 할 그 시간에 집에서 무엇을 할까? 과연 아이를 위해서 그만두었는지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경제활동을 접고 집에만 있으면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 오히려 아이 때문에 희생했다는 억울함이 모성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된다. 
 집에서 집안일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둔 것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위해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지도 않다. 엄마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 또 아이가 행복하라고, 아이가 꼭 먹어야 하는 시금치와 브로콜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아이는 그 반찬이 먹기 싫다고 아이는 엄마에게 빵점을 주었다.
아이가 빵점 준 반찬을 강제로 먹이려니 엄마와 아이는 실랑이를 할 수 밖에 없고, 그나마 엄마가 직장을 나갔으면 아홉 시간이나마 아이들이 엄마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온 종일 한 공간에서 통제를 하니 아이들은 감시 속에 자유를 잃고 독립심이 없어지는 노예로 사육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자립심을 잃었으니 언제까지나 엄마의 통제 속에 있어야 하고 자율성을 잃었으니 혼자 성장할 수 없다. 아이가 세상에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닐지라도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난다. 그런 아이가 자기 인생을 위하여 성장할 수 없다. 아이는 오직 성장 할 수 있는 능력만 갖고 태어났는데 말이다.
 엄마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투자한다고 하는데 중요한 일의 순서를 정하지 못하고 노력만 하다가 아이들의 성장에 적응 못하고 지치고 말아 내가 이런 아이들을 위하여 돈도 벌고 내 자신도 발전할 자기실현의 기회를 다 버린단 말인가? 후회하고 불행해진다. 어떻든 엄마는 애들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엄마와 아이와의 관계에서 먼저 움직여야 할 사람은 엄마이다.
 엄마가 브로콜리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을 애들이 싫어하면 안하면 되고 브로콜리 대신 다른 것을 자연스럽게 먹게 하면 된다. 좋은 엄마는 아이가 훗날 브로콜리가 몸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는 엄마이다.
 옛날 엄마는 시금치를 강제로 먹이려고 해서 뽀빠이 시금치아저씨 이상용이 나타나더니만, 요즈음은 브로콜리다.
 애들이 엄마가 혼내지 않길 원하면 엄마는 혼내지 않으면 된다.
엄마가 화 안내기를 원하면 화 안내면 된다. 엄마가 애들이 원하는 것은 안하고 엄마가 원하는 것을 애들에게 강요하면 엄마와 아이는 원수가 된다. 애들이 어려서는 힘이 없어서 좀 거리를 두고 할 수 없이 의존하여 살지만 커서는 더 떨어져 있으며 모성이 키운 대로 무의식속에 불덩어리 같은 화를 품고 원수처럼 살게 된다. 이 관계 속에서 아이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크지 않는다.

나눔

부처님께서 이웃의 배고픈 것을 지나치면서 내게 불공을 드리면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교도인 사마리아 여인의 자선을 이야기하며 “네가 이웃에게 베푼 것이 내게 베푼 것이니라.”라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도 않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믿을 소냐!
그러면 이웃은 누구일까? 나 아닌 모든 사람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부모, 형제, 친척, 친구이다. 부모형제가 배고프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 그들을 돌보지 않고 누굴 돌보겠는가? 부모형제이기에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어 남에게 할망정 가까운 이웃에게 못할 수 있다. 부모형제를 용서 못하고 먼 이웃에게 베푸는 것은 오만이다. 부모형제를 용서 못하면서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부모형제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용서는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이것은 신(神)의 몫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네가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가라지를 뽑지 않아도 하느님이 뽑아줄 것이라고 믿으니 화가 없어지고 원수 갚을 일이 없어 편안해진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서 같은 대목이 많이 보인다. 배고픈 이웃에게 베푼 것이 내게 베푼 것이지 내게 따로 불공을 드리려 하지 말라. 내 부모에게 못하면서 남의 부모에게 잘하는 것은 금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공자도 이야기했다. 이는 내 부모, 남의 부모를 구별 못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하는 仁이란 남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을 느끼는 것이 仁이다. 仁은 감각이 있는 미학이고 不仁은 무감각이라는 마비의 뜻이다. 仁을 느끼지 못하면 감정이 마비된 것이다.
남을 도우려면 내 부모 형제에게 하면서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제적으로 먼 아프리카를 돕기 전에 북에 있는 내 형제를 도와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이다. 금수보다 못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성전 신축 헌금으로 1900만원이나 내고 장로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부모님에게 용돈 한 푼 안 드리면서 성당을 짓는데 200만원씩 냈다고 하는데 왜 냈을까? 누굴 위해 냈을까? 이것마저도 자신을 위해 쓴 것이다. 자신은 이웃을 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내 부모 형제도 모르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자세히 들어본 즉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돈이 붙더라고 답한다. 그러니 결국 재물을 더 달라고 교회에 낸 것이니…….
이것 역시 이웃과 나눈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나눈다고 하면 갖고 있는 소유물을 둘로 이등분하거나 1/100을 떼어서 다른 공간에 있는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이양시킴을 뜻한다. 그러나 진정한 나눔은 다른 공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내 공간으로 초대함이다. 나누는 대상이 소유물 뿐 아니라 시간, 생각, 공간에 타인을 들어오게 허용하는 결정이다.
우리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소유물은 미운 사람과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것은 미운 사람과 할 수 없는 것이다. 미운 가족관계에서 먹는 것은 얼마든지 정 없이 줄 수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싫어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같이 있게 되면 불쾌하기에 싫어하는 사람을 안 보기 위하여 시어머니방문의 문틈이 조금만 열려도 닫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며느리가 미운 시어머니를 보지 않기 위해 미운 시부모의 방문을 슬쩍 닫거나 내놓고 쾅쾅 닫는 경우는 내 공간으로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이요, 나누지 않으려는 것이다. 돈이 얼마든지 들더라도 같이 살지 않으려는 것이 의미하듯이 물질을 나눌망정 마음은 나누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이기주의다.
마음이 가는 곳에 물질이 가기에 물질의 나눔 운동을 펴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최근 사회복지 경향은 최상위 수급권자를 도움에 있어 물질이 아니라 저들의 의존성을 줄이는 훈련에 중점을 둔다고 한다. 우리의 복지정책도 퍼주기 식에서 자립성 확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가족이라고 무조건 의존해도 된다는 의존성

아이의 얼굴은 엄마의 얼굴



얼굴은 그 사람의 간판이고 그의 인생을 포현한다. 특히 오래된 얼굴은 인생을 고스란히 나타낸다. 그래서 중년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외형은 그동안 살아온 나의 인생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 어딘가 맑지가 않다든지, 음흉스럽다든지, 여우같다든지 오만하다든지 또는 심술궂거나 어둡다든지, 자신이 없다든지 하는 것은 그의 살아온 인생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것이다.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다. 내면이 비밀스런 상태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많이 배웠으면 배운 것이 나타나고 사기 쳤으면 사기 친 행적이 나타나고 도둑질을 했으면 도둑질한 얼굴을 보인다. 이런 궤도를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쉬나무르티는 눈이 사물을 볼 수 있으려면 신의 은총이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티벧 불교에서는 제3의 눈이라고 해서 명안을 강조했고 사원에도 커다란 눈을 그려놓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제3의 눈을 목에 걸고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아는 엄마가 있는 그대로 반영해줄 때 정체성을 찾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엄마와 유아가 서로 바라보면서 아이의 눈이 8~10인치(20cm~25cm) 떨어진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 눈과 눈이 접촉하면서 자신의 아기와 동일시 된 엄마는 아기의 눈을 바라본다. 아기도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을 본다. 아기는 자신을 엄마의 눈을 통하여 비춰본다. 엄마와 아기는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대부분의 엄마는 아이가 곤란한 처지에 있거나 공격적일 때 또 아기가 아플 때 아이를 위해 반응 할 수 있다. 아기는 그가 볼 때 보이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엄마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때 엄마의 얼굴은 거울이 아니다. 엄마의 얼굴은 내 얼굴이다. 아이가 거울을 볼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끔찍하지 않겠는가?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끔찍한 것이다. 엄마는 아기에게 얼굴을 자주 보여줘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성숙해지면서 동일시가 증가되어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서 자기가 반사되어 덜 의존한다. 초기에 엄마의 반영은 어느 정도 내면화된 환경, 내적 자원이 된다. 내사와 투사는 프로이드가 최초로 이야기 했으며 멜라니클라인이 발달시킨 개념이다. 내면화 된 좋은 환경이 내사이고 아이가 자신의 내적 삶의 표본들로 세상을 보는 것이 투사이다.
24개월 된 유아는 자신의 모습을 모른다. 엄마의 모습이 자신의 얼굴인줄 안다. 그러나 28개월이 되면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 4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사진을 보고 아기라고 하던 유아가 28개월에는 자기 사진을 보고 자기 이름을 댄다. 자기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엄마가 "얘, 밥 먹어야지"라고 했는데 "조안이라고 해야지 왜 얘라고 해!" 라며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엄마와의 융합에서 분리되어 자아개념이 생성되는 시기이다. 나. 내꺼. 안 해. 아니야, 라는 표현을 하며 "아니야"의 시기를 맞는다. 엄마의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며 대상환경이 하는 이야길 곧이곧대로 듣질 않는다. 대상이 옆에 존재하는 환경에서 환상의 세계에 빠져 환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고 환상 속에서 놀이를 한다. 이 때 대상이 없는 환경은 끔직한 것이다. 유아에게는 놀이가 성장이고 삶이다. 18개월 된 유아가 30~40% 정도 주도권을 갖고 논다면 자립심이 생기고 24개월 된 유아는 70~80% 정도 주도권을 갖고 활발하게 놀음으로써 자율성을 발달시킨다. 30개월이 되면 유아는 싫으면 싫다고 의사표시를 하고 거짓놀이도 할 수 있고 손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기 싫으면 잠든 척도 한다. 엄마의 반영이 내면화되어 분리독립의 자원이 된 것이다.

안개낀 로마의 아침

친밀함의 능력

 나는 어려서부터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였다. 천방지축 나서는 것보다 침착해보이고 순진해 보였지만 외향적이며 적극적이고 사람을 잘 사귀는 사람을 보면 많이 부러웠다. 나는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 명확해져서 좋다.
사람과 잘 사귀고 친근해지는 능력은 단순히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이 정말 큰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사회에서 승리자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립감에서 벗어나 이 친밀함을 위하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패배자 아틀라스도 역시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주 조그만 결과를 얻기 위해서도 세상사는 도전해야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친밀한 능력을 갖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시도해 보고 도전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자율적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자율성은 유아가 엄마로부터 분리개별화되는 18개월부터 36개월 시기에 획득해야 하는 과업이다. 이때 이 자율성과업을 이루었으면 대상 즉 사람과 친밀함을 위하여 좀 힘이 들더라도 노력하면 로빈슨 크루소에서 벗어나 친밀함의 능력을 갖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남이 보기에는 사람을 잘 사귀는 것으로 보이는가 본데 실은 친근해지는 능력이 없어 혼자 외롭고 왕따가 된 기분을 자주 느끼며 서운해 하기도 하고 힘들어 한다. 친밀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자율적 인간의 특징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았으니 사람들과 잘 지내기로 결정하면 된다. 괜히 위신 찾고 젊잔 빼고 하는 것이 외롭고 불편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28개월 된 아이가 부쩍 사람들 등에 기대고 얼굴을 타인의 얼굴에 비비며 친밀성을 나타낸다. 아이 엄마가 요즈음 많이 안아주고 의도적으로 스킨십을 한 것 같다. 사람한테 어설퍼하지 않고 착착 달라붙는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른도 아이가 얼굴을 비벼대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아이는 물론 어른이 스킨십을 하면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그 행동을 자기도 하며 사랑받을 짓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모든 엄마가, 엄마가 되기 전에 알았더라면 모든 아이가 살아가면서 외롭지 않고 어설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것이다. 친밀함이 몸에 배어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친밀함이 몸에 배어 있지 않다. 왜냐면 그렇게 해 줄 엄마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상대가 먼저 친밀함을 보이면 좋아하고 편안한 관계가 된다. 성인이 되어 맺는 인간관계의 질은 어렸을 때 만들어준 친밀함의 능력에 좌우된다. 28개월 된 아이는 2층층계를 먼저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 뒤쫓아 오는 할머니, 고모, 엄마, 아빠의 손을 잡아 올린다. 기가 막히게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지가 오히려 끌려 내려올 판이면서 성인이 이를 받아주니 아주 기분 좋아한다. 남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모습을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 아이가 하는지는 몰라도 처음 한번은 누군가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시작은 사랑받기 위함이었다. 사랑받기 위한 행동에 성인이 반응해주었기에 사랑받는 행동은 증가되어 익숙해졌고 친밀함이 몸에 밴 아이는 동년배 아이가 말이 서툴러 중얼거리면 "뭐라고?"하며 끼어들어 참여한다. 이를 통하여 인지가 무섭게 발달하는 단계이다. 대상관계가 쌍방의 모자관계에서 세상과의 관계로 넓혀지며 세상일에 흥미를 느끼고 대상관계를 넓히려는 단계가 28개월부터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병적으로 빠진 사람이 제 분수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친절한 경우 그것도 사랑받기 위함이고 가식이다. 아무나 손잡고 할렐루야! 를 외치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고 무엇이든 과하면 이상한 것이다. 친밀함과 가식은 구별되어야 한다.

남이섬의 저녁노을

묵은 감정

한 때 묵은지가 인기있는 메뉴인 적이 있다. 아직도 두부와 같이 먹는 묵은지가 인기가 있고 고등어조림에 묵은지와 같이 끓이면 묵은맛이 고등어의 비린맛을 없앤다. 묵은지는 특히 고등어조림이나 생두부와 같이 있을 때 궁합이 맞고 맛이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낸다. 묵은지에서는 겉절이나 배추김치의 원맛을 찾을 수 없고 퀴퀴하면서 그리운 깊은맛을 준다. 그러나 묵은지 맛을 아는 사람만 좋아하지 3년이나 최소한1년 묵은 묵은지맛을 모르는 사람은 썩은 김치맛이다. 김치만 묵은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감정에도 묵은 감정이 있다. 묵은 감정이 새로운 사건에 접목되면 자신에게 묵은 감정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은 현재의 사건이 묵은 감정과 융합되어 다르게 보일 뿐이다. 묵은 감정은 지금의 현실의 눈으로 보면 맞지가 않는다. 묵은 감정이 현실을 희석해버리거나 아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게 된다. 현실에서 아주 동떨어질 수 있다. 과거의 묵은 감정을 다룰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그 상황에 부적합하게 보이는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저녁에 TV를 보고 있을 때 우울하고 불안해한다. 그녀는 우울감의 근원을 찾아보기 위해 혼자 조용히 감정의 근원을 되짚어보았다. 남편의 TV보는 광경은 무엇을 자신에게 상기시켰는지? 전에 이처럼 느꼈던 때는 언제였는지?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고 정신질환을 앓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 그녀는 우울했고 공포감마저 느끼곤 했다. 이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스러웠던 묵은 감정을 이해하고는 이제 그녀는 과거 해묵은 감정을 재생하지 않고 TV보는 남편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 묵은 감정을 다시 융합하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반응을 배우게 되었다. 묵은 감정이 지금 여기에 작용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묵은 감정이 지금 여기에 작용하는 것이 노이로제이다. 묵은지처럼 어릴적 배운맛은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어 음식의 맛을 바꾸듯이 묵은 감정이 삶과 함께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우울하고 불안할 필요가 없는데 우울하고 불안했던 것이고 묵은감정없이 편안하게 보도록 묵은 감정을 깨닫는 것이 팔자를 고치는 길이다. 


엄마 배는 많이 먹어서 부른 거야!

사람은 원래 욕심을 갖고 태어났고 이것이 본능이다. 본능 중 사랑받고 싶은 본능이 식욕 다음일 것이다. 식욕은 특히 생명과 관계있다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랑받고 싶은 욕심도 생명과 관계가 있다. 26개월된 조안이가 임신 7개월인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조른다.  엄마가 동생이 뱃속에 있어 조안이를 안으면 배가 아프다고 말하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보다. 

“아니야 엄마가 많이 먹어서 배가 아파!”라고 야물딱지게 동생의 존재를 부정한다. 조안이는 자기가 많이 먹으면 배가 볼록해지니까 엄마의 배도 많이 먹어서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 일가?. 
조안이는 요즈음 부쩍 어른들이 하는 이야길 비판하고 자기 생각대로 정리를 하곤 한다. 추우니 코트를 입고 나가자고 하면 “코트가 아니고 잠반데!”라든지 아빠 만나러 가자고하고 식당엘 가면 “아빠 만나러 온게 아니네, 밥 먹으러 왔네!”라고 한다. 그리고 조금 후 아빠가 식당에 나타나면 자신이 잘못 판단했던 것을 수정하는 눈치다.
 엄마가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 것은 인정 할 망정 엄마 뱃속에 동생이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쟁자가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부정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즈음 아이의 성장발달을 보면 우선 타인의 이야길 부정하고 지 나름대로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 이것이 자아의 발달이다.

양수리의 새벽

팔자를 고치면 행복해진다.

아이가 말을 안들을 때 엄마는 애들은 맘대로 안 된다고 한다. 어른 맘대로 아이가 안 되는 그 원인이 아이에게 있는 것으로 단정한다. 어른 입장에서 보면 말썽부리는 자녀가 참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어머니와 자식관계는 자녀는 전혀 선택권이 없는 어머니의 독선적 관계다. 그러한 관계에서 어머니가 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준비되지않은  결함에서 생겨난 잘못된 어머니의 모성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

 이 세상 어떤 자녀도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자녀는 없다. 그런가하면 부모도 낳고 싶어 낳은 것이 아니라는 부모도 있다. 대체로 그런 엄마는 아이를 잘 기르지 못하는 엄마이고 일반적으로 남편과 관계가 좋지 않은 엄마이다. 남편과 관계가 좋다면 자녀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가 부모의 참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만 자식 된 도리를 하라고 강요하는 부모가 꽤 많다. 이는 부모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의 역할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모의 역할을 알려면 나는 현재 어떤 부모인가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부모인가를 알기위해서는 내 아이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이다. 다시 말하면 바람직한 부모가 되기위하여  말썽부리는 아이의 처지가 되어보는 것이다.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는 어린애 같다. 어린애 같은 부모가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으며 어른도 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부모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자녀가 말썽을 부릴 때 역할을 바꾸어 역할극을 해본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T-A이론이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매를 때리면 자녀의 잘못된 행동은 지속된다. 행동주의 이론으로 보면 이것은 보강이다. 매를 맞으려고 한 자녀의 행동에 매를 때렸으니 자녀는 잘못된 행동을 한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잘못해도 때리지 않으면 더 기고만장해서 잘못 할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잘못해도 안 때리면 매 맞고 싶은 아이의 괴로움은 배로 증가하기에 아이는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자연스럽게 매 맞을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옳지 않은 행동을 스스로 하고도 매를 맞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기에 그 고통을 만들어 내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점차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같은 잘못을 할 때 부모가 잔소리를 하는지 안 하는지 보면서 부모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아이는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잘못된 행동을 그만둔다.

 그러나 아이의 무의식의 틀 속에 때리고 맞는 기능이 이미 고착되어 있다면 때리고 맞는 관계가 없어지지 않는다. 만약에 때려서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때려서 맞는 만큼 아이가 올바로 자랄 수 있다. 때려서 된다면 때리지만 잘 자란다 하더라도 아이가 잘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 매를 맞지 않았다면 더 잘 자랄 수 있지 않을까? 
 매를 맞아도 매만 축낼 뿐 고쳐지지 않으면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서로 고생만 하는 것이니 때릴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도 매질을 하는 것은 화가 나서 감정을 발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명목상 교육적이라고 찍어다 붙이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매질을 그만 두기로 할 경우는 이러다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때리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아이를 포기하는 것 이다. 자신의 감정하나 통제 못하는 미숙한 부모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아이들보다 잘한다고 착각하고 부모노릇이라고 하는 것이니 참 안타깝다.
 부모는 자녀의 무의식의 틀 속에 때리고 맞는 관계의 기능을 애당초 넣지 말아야 한다. 자녀가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폭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도 그의 부모에게서 그러한 관계기능을 무의식의 틀 속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의 틀을 지속적인 인내로 깨닫고 버려야 한다. 무의식의 틀을 바꾸는 것이 팔자를 고치는 것이다. 팔자를 고치면 엄마도 아이도 행복해진다. 

신데렐라 컴플렉스

항상 부엌 아궁이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일을 하는 여자라는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

 프랑스소설가 샤를 페로(1628-1708)가 유럽의 곳곳에 전해오는 전래동화를 상드리용(cendrillon)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 썼다는 의미이다. 신데렐라 동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다. 계모와 이복언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마음씨착한 주인공은 착해서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구전동화로 전래된 이 프랑스 동화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매스터슨(James Masterson)은 모자 관계인 대상관계에서 자신의 친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나쁜 계모로 느끼는 감정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명명하였다. 사실은 모든 유아의 엄마가 계모가 아닌데 모든 유아는 자신의 엄마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나쁜 계모로 여긴다는 것이다. 모든 엄마가 항상 다 좋은 엄마일 수 없다. 엄마가 잘해주면 좋은 엄마이고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나쁜 엄마로 보는 유아는 제1 분리개별화기(18개월-36개월)에 대상을 좋은 엄마 나쁜 엄마로 자아분화(ego splitting)한다. 유아가 느끼기에 대상이 한 가지가 좋으면 모두 좋은 사람이고, 한 가지가 나쁘면 모두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로 자아분열 방어기제이다. 모든 사람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데 나한테 잘해주면 모든 것이 좋고 나쁜 면을 보지 않으려는 all good. 나한테 잘 못해주면 all bad로 보려는 방어기제는 대상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물론 잘못된 방어기제이다. 이 잘못된 시각이 유아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가 자아분열(ego splitting)을 통해 사람을 이분법으로 분류한다. 이분법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또 어떤 이는 예쁘냐 안 예쁘냐, 또 공부를 잘하냐. 잘못 하냐, 하다못해 키가 크냐, 안 크냐, 일류대학을 나왔냐, 아니냐, 토머스 울프를 읽었냐, 안 읽었냐로 구분하려든다. 이 모든 것이 자기만의 잣대로 분류하는 자아분열(ego splitting)이다.
 자아분열은 대상을 전체로 보지 않고 일면만 보는 것이고 이는 물론 잘못된 시각이다. 예를 들면 미국을 모든 문화가 융화된 합리적이고 다양한 나라라고 보지 않고 총 쏘고 무법자의 나라로, 일본을 일본의 질서 정연하고 안정되고 예의 바른 면을 보지 않고 한국을 짓밟은 무지한 나라로 보면 안 되듯이 사람도 한 면만 보면 보는 사람이 잘못 본 그 책임을 면치 못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잘못 보게 만드는 자아분열은 유아가 엄마와 공생에서 분리 개별화되는 과정 속에 자기의 엄마인 대상을 좋은 엄마 또는 나쁜 엄마로 보면서 만나는 대상을 모든 것이 좋은 사람, 모든 것이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게 된다.
 자기의 엄마를 나쁜 엄마로 보며 계모로 환치시키고 살아남기 위해 계모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재는 다 뒤집어쓰고 궂은일을 맡아서 하는 신데렐라가  훗날 왕비가 되어서도 계모에게 잘 보이려고 계모와 의붓 언니까지 궁궐로 모셔가는 천사표가 된다. 누구나 우리 마음 속에 대상에 대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이 치우치고 편파적인 자아분열이 일어나 충족되지 않는 의존적 욕구를 가진 것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욕구충족이 안되어 친엄마를 심지어 나쁜 계모라고 여기면서도 그 나쁜 계모에게서 라도 사랑을 받으려고 재를 혼자 몽땅 뒤집어쓰고 애쓰는 처절한 상태가 된다. 신데렐라는 언니와 엄마는 한통속이 되어 엄마는 언니만 예뻐한다고 느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 엄마의 사랑을 받으려 하는 것일까? 
 이는 충족될 수 없는 사랑의 욕구 때문이다. 대상관계에서 생리적, 심리적 욕구충족으로 애착관계가 이루어 진 후 분리개별화 되어야 하는데 분리 개별화 되지 않으면 평생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엄마와 젖을 떼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도 젖이 덜 떨어진 상태로 대상만 옮겨갈 뿐 누구에겐가는 의존하려고 한다

까꿍

까꿍!
18개월 된 조안이가 요즈음 들어서 가장 즐거워하는 놀이는 "까꿍"놀이이다.
가족이 다함께  뷔페레스토랑에 갔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아빠가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조안이는 어느새 예쁘게 생긴 언니 한명을 찍어서 졸졸 따라 다니다가 까꿍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를 꽤나 좋아하는 웨이트레스 언니인 것 같다. 
 18개월 된 아이가 별것도 아닌 일에 천진난만하게 까르륵 웃는 모습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어느새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를 아이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 언니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닐 것이다. 조안이는 요즈음 누굴 만나든 까꿍 놀이로 유도하는 재주를 갖고 있다. 자신의 놀이에 참여 가능한 사람을 어느 곳에 가든 곧 찾아내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아이는 저와 같이 놀아줄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촉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잠시 안보이다가 둥근 기둥 뒤에서 상대를 만나면 자지러지게 웃으니 어느 누가 같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같이 웃기만 해도 엔돌핀이 100만원어치는 나온다는데...  걷기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쫓아다니면서 온몸으로 웃어대니 근무시간에 방해는 될망정 슬슬 눈치봐가며 아이와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 모두 행복해 보였다..
언니가 잠시 눈에 안 보여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 어딘가에 있다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찾다가 눈에 보이면 까르륵 웃는 모습은 아기 천사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기 천사들이 성장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놀이에 자신들도 모르게 같이 까꿍 놀이를 하게 된다.
아이는 까꿍 놀이를 통하여 잠시 엄마가 사라졌다가도 금방 나타나면서 "까꿍!" 할 때의 엄마의 표정 속에서 엄마는 눈에 잠시 안 보여도 어딘가에 있다가 곧 “까꿍”하며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아이의 놀이는 서서히 엄마로부터 분리 독립해 나가는 훈련이다. 특히 가족놀이치료는 그러하다.

매조키즘(자학증)

매조키즘(masochism)
 오스트리아 소설가 mosoch의 작품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만족을 느끼는 메가니즘을 작가의 이름을 따서 masochism이라 부르게 되었고 새디즘과 상반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학대를 받으면서도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K의 부모는 꽤도 싸웠다. K의 엄마는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잔소리했고 그때마다 남편은 잔소리 한다고 더 화를 냈다. 엄마는 말이 먹히지 않자 싸우다 싸우다 포기하고 그 잔소리가 3남매의 맏이인 K에게 향했다. 아내나 엄마가 남편이나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애착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이고 이를 피하는 것은 독립하려는 것이다. 밀착과 분리의 충돌이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K는 엄마의 말을 아버지처럼 반격을 한다거나 반대로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움츠러드는 철수의 방어기제를 썼다. 일찍 일어나라고 하면 늦잠을 자고, 학교도 안가고, 공부도 안하고 엄마가 원하는 행동을 숫제 안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나를 이렇게 만든 엄마는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미안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히는 엄마를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사춘기가 되어 친구들에게서 왕따를 당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왕따를 시킨 친구들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성인이 되고 연애관계에서 여자에게 채이고 배신당하고 나면 매우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배신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어렸을 때 가족관계에서 언제 기분이 좋았냐고 물었을 때 자신을 파괴하면서 기분이 좋았었다는 느낌을 떠올렸다. 왜 이 K는 친구들에게서 왕따 당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연인에게서 배신당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어렸을 때 엄마의 잔소리에 자신이 망하는 쪽으로 자신을 몰고 가면서 기분이 좋았던 느낌이 든다고 K는 치료자에게 말하고 나서도 자신은 자신의 느낌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이고 치료자가 이것을 잡아서 물어주어야 자신의 무의식을 깨닫는다. 자신을 파괴하면 상대가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점점 더 자신을 파괴해가는 사람이 매조키스트이며 이것을 그대로 두면 점점 더 자신을 파괴하며 폐인이 된다. 내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면 상대방이 어렸을 때 엄마처럼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괴로워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나만 망할 뿐이다. 나를 왕따 시킨 친구들은 엄마처럼 괴로워 하지 않는데 나를 왕따 시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그들은 괴로울 것이라는 망상을 내 자신이 하면서 만족해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현실을 잘못 보고 나를 파괴 하면서 만족 해하니 이것을 치료자는 환자가 깨닫도록 해야 한다. 물어들어 가지 않으면 못 알아 먹는다. 

공감(共感, empathy)

준희가 금자랑 말이 얽혔다고 속상해했다.
넉넉지도 않은 벌이에 압구정에 사는 금자가 준희에게 돈 많이 주면 머리가 예쁘다며 강북 변두리에서 3만 원짜리 파머하고 강남의 20만 원짜리 파머하고 질이 다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이야기는 안했지만 돈 많이 들이면 예뻐지고 부럽다는 뜻이였겠지
이 말을 듣던 준희는 “그럼 너도 이십만 원짜리 해!”라고 했더니 금자는 평소 친구들이 준희를 빗대어 흉보던 보따리의 봇물이 터진 것이다“너도 애들이 그러는데 돈도 안 쓰고 옷도 안 해 입고 약국에만 틀어박혀 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얼마나 한심스러워 하는지 아니!”라고 하더란다. 이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빠진 준희는 내게 전화를 세 번이나 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 했다.
이런 소릴 들은 것이 속상해서 나한테 이해받고 싶은 것이었겠지. 그래서 명희에게 이야기하니 명희는 준희를 공감하며 “문제가 많은 애는 무슨 예길 들어도 문제를 삼는다!”라고 名言을 하더란다. 준희는 금자가 이해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어 한 이야기를 한방으로 받아쳐 비참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저는 돌아온 부메랑에 상처받아 공감받고 싶어 여기저기 다이알을 눌러서 명희에게서 이해를 받았다.
“준희야 왜 그렇게 이야기했어?” 이렇게 말하면 어땠을까? 3만 원짜리나 20만 원짜리나 똑같은 파머야. 미장원 위치에 따라 가게 월세가 다섯배 내지 열배 비싸니까 파머 값을 세 배, 다섯 배, 열 배, 받는 거야. 나도 3만 원짜리 파머하고 다녀. 금자야! 너도 20만 원짜리 파머하면 조금 더 예쁠 순 있겠지만, 그런데 17만원 어치 네가 다른 좋은데 투자 했잖아!”
라고 했으면 안 싸웠잖아! 너 네가 나한테 알려줬지. 인간관계를 잘 하는 것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길 하는 것이라고 인터넷에 있더라고. 이 바보야! 15년 전 내가 쓴 수필집에 여러 번 이 말이 나오는데 무슨 인터넷에 있어!
그런데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물었지? 그래서 내가 가르쳐 주었잖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이니까 어렵지 않다고. 그런데 싸우고 기분 나쁘면서도 네 기분만 풀려고 명희한테 전화해서 들은 명희 말이 명언이라며 마음이 풀렸지? 명희는 네가 듣고 싶은 이야길 네 편에서 해줬거든. 준희야 금자가 듣고 싶은 이야길 하면 어색한 관계가 풀려. 지금 전화해!
어제 저녁 장가간 아들이 우리가 사준 새 차를 몰고 왔다.
그동안 10년이 넘은 차를 몰고 길거리를 나가면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자 나의 남편이 “그러면 몰지말지!” 라고 말하여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준희가 금자 보고 “너도 20만 원짜리 해!” 하고 이야기 한 것이나 똑같은 맥락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가족이기에 터놓고 이야기 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의미적 내용이 안 맞잖아! 노후차를 운전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라고 남편을 나무라고 아들에게 “미안하다 좀 더 일찍 사줄 것을……. 차가 오래되긴 했지만 버리기에는 마일리지도 10만km가 안되고 외형이 깨끗해서 쓰게 했었는데…….”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각이 있어요. 그럴 때는 그 시각을 맞추어 주는 것도 적응인 것 같아요.” 라고해서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동의해주며 차를 사주고 오히려 늦게 사주어서 미안하다고 했으니 아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마음이 전달되었겠지. 이것이 공감을 통한 의사소통이다. 여기서 한마디 더하자면 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시각이 있어 그 시각에 맞추어 주는 것이 적응이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잘못된 시각인줄 알면서도 그 시각에 맞추는 것은 노이로제이다. 병리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결과가 노이로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감은 요즈음 우리사회의 화두이다. 
공감은 “그렇구나!”하며 그의 느낌에 머물러 있어주므로 본인이 가치 있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걱정이 믾은 부모

걱정이 많은 부모

 마흔이 넘어 장가간 아들이 겨우 며칠을 전화 안 했다고 화가 난 부모가 있다. 왜 화가 났냐고 아들이 물으니 걱정이 되어서 불안했다고 하는데 무엇이 걱정이 되느냐고 또 물으니 온갖 것이 다 걱정이 된다면서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부모는 아들과 며칠만 전화가 안 되면 아들이 걱정된다며 부모마음을 못 알아준다고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것은 아들이 떨어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감지하고 또 그 걱정을 하는 자신의 본심을 아들한테 들켰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귀뀐 놈이 화내는 것이다.

 이 부모는 진정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부모는 아들의 끈을 붙잡고 있는데 며칠만 안보이면 아들을 붙잡고 있는 끈이 끊길까봐 걱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안할까? 아들이 끈을 끊어 버려 아들에게서 영영 내버려지게 될까봐 불안한 것이다. 유기불안이다. 집에서 키우던 애완동물 야옹이만 유기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덜 떨어진 아들이 아직은 젖이 덜 떨어진 부모에게서 유기될까봐 불안해하고 이것이 분리불안인데 이는 반대로 다 성장한 아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말은 아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고 하지만 실은 아들이 부모를 버릴까봐 자신을 걱정하면서 아들이 걱정이 된다고 부모랍시고 큰소리치고 매달리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덜떨어진 아들은 크면 부모가 버릴까봐 성장하지 않고 딴 길로 나간다.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낙제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직업을 갖지 못한다. 또 결혼도 못한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꾸 문제를 일으키며 부모 옆에 붙어서 부모를 걱정시킨다. 이러하면서 유기불안에서 벗어나려한다. 그러면 부모는 아들을 걱정하며 한편 불안하여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붙잡고 있기 마련이다. 부모는 다 큰 아들을 옆에 두고 생활비, 사업자금, 유흥비까지 대주며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능력없는 부모는 아들에게 의존하려한다. 부모가 능력도 없으면서 잘 살고 있는 아들을 걱정하는 것은 아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아들이 문제가 있을 때 부모는 도와줄 능력이 있는가? 아들을 도와줄 능력도 없는 부모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자신의 문제인 것을 깨닫고 화내지 말고 자식 걱정을 끊는 연습을 해야 한다. 능력도 없는 부모가 잘 살고 있는 자식을 걱정하는 것은 자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기 걱정이지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분리불안이다. 이것을 본인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은 병이다. 쓸데없는 짓이고 오히려 걱정이 독이 되어 자식을 병들게 할 수 있다. 부모가 불안해서 자식걱정을 하면 부모가 걱정하는 대로 문제만 일으키는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자녀가 밖에 나가 다칠까봐, 남들과 싸울까봐, 직장을 잃을까봐, 시부모 때문에 부부싸움 할까봐 걱정하며 아들에게 싸우지 않았냐고  물으면 내가 싸우지 않는 것이 이상한가라고 생각하며 부부간에 싸움을 걸 수도 있다. 

걱정은 걱정거리를 만든다. 걱정은 걱정하는 사람의 불안이 전치되어 주위를 오염시킬 수 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은 원래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건드려지게 하면 안 되고 잘 다둑 거려 가만히 있게 하여야 한다. 나의 무의식에 잠자고 있는 불안을 섣불리 건드려 치료할 것도 아니면서 성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공연히 남의 걱정하지 말아야한다. 
걱정의 맨 밑바닥엔 공격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분노와 함께 유기불안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쓸데없이 다 큰 아들이 떨어져 나갈까 걱정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부모로 부터 유기될까봐 걱정하던 그 분리불안이 심연의 맨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고 이 분리 불안으로 지금 부모는 없으니 부모대신 아들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장성한 아들이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는 아들의 할머니가 할머니의 아들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다. 그 때 만들어진 것이 불안자리이고 대부분의 피조물이 갖는 미숙한 정신이다





가족무의식

모든 사람은 문제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를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가족은 문제를 갖는데 문제를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가족이 문제를 가질 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가족평가를 해야 한다. 

 가족을 이해하고 평가할 때 가족구성원간 상호작용하는 거래형태와 특성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 구성원간에 참는 능력 수준과 자기 방어를 사용하는 환상의 내용을 평가해야 한다. 가족원은 서로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무의식적 약속을 한다. 가족원끼리 서로 약속을 하는 것이지만 그 약속이 무의식적이기에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가족원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을 가족 무의식이라 한다.

가족 무의식은 부모자녀관계에서 경험이 내면화 한 것이다. 자라면서 부모의 이미지가 느낌으로 마음 속 깊이 있다가 생각으로 떠올라 이상한 행동을 하게한다. 아이의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느낌을 표현 하는 바로 그것이다. 가족 무의식은 이 가족이 자녀를 돕는 가정인가 방해하는 가정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많은 경우 사실상 서로가 서로를 버리지 못하도록 또 버리고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서 자녀가 자율성을 갖고 독립되는 것을 막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족의 자녀는 떠나지 못하고 부모 곁에 있다. 성장하고 발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삶이 무엇 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뚜렷한 설계도 없이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세상만사에 능통한 것처럼 간섭하고, 삼신할머니처럼 장래를 점지해주려는 것이 오늘 날의 부모상이고 가족무의식이다.

부모가 고집을 부리면 자녀도 자신의 고집의 노예가 되어 서로 괴롭히면 고집 때문에 치러야 하는 값이 얼마인가? 부모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버리면 자녀 역시 고집 부리지 않고 버릴 것이다. 고집의 시작은 부모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집을 버리고 부모는 자녀가 해달라고하면 해주고, 하기 싫다고 하면, 하고 싶을 때 하라고 내버려 두면 된다. 

그러면 아이는 고집부릴 필요가 없어진다. 무엇을 하라는 말을 안 하고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된다.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부모요. 해달라는 것을 해주는 사람도 부모다. 부모가 하라고 하지 않고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부모 자녀 관계의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면 아이가 버릇없는 천하무적 지가 제일 잘난 줄 알텐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는 부모가 많다. 해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한다. 이런 부모는 걱정을 해야 아이가 잘된다고 믿는 부모다.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며 키웠는데 오늘날 아이는 왜 그런가? 

처음에는 아이의 요구가 하늘을 찌를지도 모른다. 부모의 인내심을 테스트 할 것이다. 이때 부모가 지면 안 된다. 자녀와 경쟁에서 지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에서 지면 안 된다. 자녀와 경쟁에서 지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테스트 하는데 부모의 사랑으로 지면 안 되고 이때 자녀의 요구를 잘 들어주고 지는 것이 사랑이다. 한 달만 참고 견디면 더 참아야 할 필요 없이 고집부리는 사람 없고 말 안 듣는 사람 없는 가족이 될 것이다. 가족 무의식을 깨닫게 되고 무의식을 고치는 것이 팔자를 고치는 것이 된다. 부모의 팔자도 아이의 팔자도 한꺼번에 고치는 것이다.

엄마는 신이다.

참 좋구나

무의식이 팔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