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겔러리5

저승에서 나마 다시 태어나 위안을 받으려고 정신을 내놓고 그저 돌고 있는 것인가? 티벧이  쏭짼대왕 때는 당나라 수도 장안(지금의 서안) 까지 점령하고 위세를 떨쳤으나 내부 분열로 1239년에는 몽골의 조공 국이 되었고 5대 롭상가초가 1642년 정교일치를 선언하고 법왕이 되었다. 그 후 6대라마 쌍게가초가 섭정하여 포탈라 궁 홍궁 공사를 마치고 1695년에 5대 라마의 죽음을 발표했고 5대 라마 롭상가초가는 포탈라 궁에 미이라로 지금 영묘탑 속에 앉아 있었다. 포탈라 궁에 버금가며 라싸의 구도시에 있는 조캉 사원은 쏭짼감뽀가 647년 네팔공주를 위해 금동약소 와블을 안치하고 지은 사원으로 오히려 티벧 불교의 중심 사원이자 티벧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듯 했다. 티벧에 재앙이 끊이지 않자 문성공주가 지형을 보니 라싸의 지형이 나찰녀가 누운 모습으로 송산 남동쪽에 있는 연못은 나찰녀의 심장이고 강물은 피였기에 산양을 시켜 호수를 메우고 사원을 짓기를 쏭짼에게 건의하여 지은 사원이 조캉 사원이다. 여기서 나찰녀란 우리나라의 웅녀에 해당한다. 창건설화이다. 조캉 사원 앞에는 티벧 인들의 오체투지로 엎드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이들을 보려는 관광객과 걸인들의 보시도 한 몫 하고 있다. 오체투지란 티벧 각지 선남선녀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한걸음 가고 한번 절하고를 반복해서 라싸에 도착하는 것인데 먼저 조캉 사원에 들러 공양하고 절을 하며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것이다.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은 더욱더 외모로는 일반 사람과 걸인을 구별 할 수가 없었다. 

링꼬라 한 바퀴 돌면 현세에서 죄업이 없어지고 108번 돌면 해탈한다는 믿음으로 한여름에도 두터운 코트까지 입고 한손에 꼬라, 한손에 염주를 돌리며 온 국민이 돌고 있었다. 종교적인 이해 없이 어떻게 보면 미신의 나라, 영혼의 나라, 몸은 이승에 있지만 저승을 염원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1300년 된 티벧의 수도 라싸는 티벧어로는 성지를 의미하기도하고 또는 야크를 의미한다고 한다. 티벧은 처음에 원나라에, 그 후 영국과 인도에, 1951년에는 중국의 인민해방군에 점령되었고 1966년 모택동의 문화혁명 때 티벧의 1300년 된 문화유물인 티벧 불교문화가 탄압을 받아 많이 파괴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온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포탈라 궁은 라싸의 상징이다. 포탈라 궁은 7세기에 쏭첸감포가 당나라 문성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짓기 시작했는데 전쟁을 거치며 훼손되어 17세기중엽에 달라이 라마 5대 응아와롭쌍가초 (1617-82)가 재건하였다. 13층 높이 115m, 길이는 360m가 넘는 홍궁과 백궁은 20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장대하며 산언덕에 있는 비범한 기세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며 칠대불가사의의 하나다. 백궁은 달라이라마의 집무실이고 홍궁은 달라이라마의 거처였다. 정부청사이고 청와대이다. 포탈라 궁은 향과 야크버터 등잔 연기에 그을린 1000여개의 방에 불상과 금은보석으로 치장된 부처와 금빛 기와지붕, 화려한 벽화 등으로 꽉 찬 모습은 음침하기는 했지만 티벧 불교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저들의 말은 있을망정 문자도 문화도 다 빼앗기고 문화는 착취당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인가? 1950년 티벧을 놓고 인도와 중국이 싸우다 인도는 시켐국을, 중국은 티벧을 갖기로 제3자끼리 합의하여 나눠가진 것이 꼭 100년 전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나눠가지려다 청일 전쟁을 일으킨 것과 많이 흡사했다. 1300년의 역사도 찬란한 티벧 불교문화도 예술도 누구의 것인가? 이곳의 주인은 이미 티벧이 아니고 칭짱 열차를 타고 들어온 중국의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도 이미 중국에 잘 길들이어져 있고 라마승과 하층민만이 꼬라로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인가?

1950년 중국이 티벧을 점령한 후 티벧의 북부지역 72만km 가 티벧으로부터 분리됐고 이곳이 청해성이라고 불리어지는데 이 청해성이 원래 티벧 땅이라고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티벧 고원은 지구상에서 태양에 가장 가까운 고원으로 하늘열차가 설산을 통과하는 저녁 내내 불빛이 없어 더욱 캄캄한 하늘에 별들은 별무더기 같았다. 내 생전 가장 하늘 가까이 올라와 있고 불 빛없는 광야에서 보는 밤하늘은 모든 천체를 망원경도 없이 보여주었다. 북두칠성은 물론이고 은하수와 빛나는 금성, 반짝이는 밤하늘은 참 정말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기차여행 내내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꿈같은 밤하늘을 즐겼다.
아시아의 주요하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황하와 양자강과 메콩 강이 그러하다. 티벧은 중국 땅의 1/4이나 되는 큰 영토이며 한반도의 12배에 달할 정도이다. 그 땅속에는 석유를 위시한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중국이 티벧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240만 명의 티벧 사람들은 티벧어인 민족고유어를 사용하고 있고 우리나라 세종대왕 같은 왕이 있어 티벧 문자를 갖고 있으나 중국점령 후 티벧어 말살정책과 함께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우리의 일제 강점기 때처럼 중국성씨 개명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들은 저항할 의지도 갖지 못하는 것인가? 많은 국민이 생산적인 일보다 꼬라를 돌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듯했다. 꼬라는 원이라는 뜻인데 조캉사원 법당을 도는 것을 낭건과자라 하고 조캉 사원 바깥담을 끼고 팔각가(바르코:Barkhor)를 도는 것을 파견과자라 하고 조캉 사원에서 포탈라 궁까지 도는 것을 링꼬라라 하는데 이는 만다라를 라싸위에 실현시키기 위한 온 국민의 염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자매들과 진지한 대화를 2박3일 동안 많이 나누려고했다. 그들이 자기네는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지 않고 중국정부로부터 모든 면에서 지원을 받아 온 국민의 생활이 좋아졌으며 북경유학도 어려서부터라도 원하면 무료로 할 수 있어 좋다는 이야길 했다.
그래서 “너는 친중파가 아니냐? 친중파면 훗날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된다. 라마승도 너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느냐?”등의 질문을 했고 이 자매는 대부분의 티벧인들이 친중파이고 종교적 노예생활로부터 티벧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1951년 해방시켜주어 고맙게 생각한다는 이야길 했다. 이 이야길 들었을 때 내가 왜 티벧을 가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우리나라 일제식민지시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태평성대에서 가짜양반 윤씨가 자기만 빼 놓고 세상이 다 망해도 좋다며 영원히 이런 세상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것이 생각난다. 그러면  중국의 압박을 피해 매년 3000명씩 인도다람실과 마을에 모여드는 티벧인들은 또 무엇인가? 저들은 눈사태나 야생동물보다 중국인이 더 무섭다고 했다. 라싸에서 친중파가 더 무서울 수도..... 옛날 식민지 시대에 한국사람 형사가 더 무서웠다.
2박3일 동안 기차를 달려 저녁 무렵 종착역인 라싸에 도착해서야 내가 타고 온 기차를 보니 열차가 우리나라 KTX처럼은 아니지만 시속 100km로 달리는 멋있는 외형이고 요금도 편도 15만 원 정도이니 중국물가로는 대단히 비싼 요금이었다. 물론 교통비만 그렇고 여섯 끼 식사는 미리 준비하거나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물론 컵라면 종류와 빵을 준비했다. 거울무에서 라싸까지 1142km 구간에 있는 티벧의 설산중턱을 오르는 풍경은 황홀감을 느끼게 했고 떠났기에 행복하다는 말을 되뇌게 했다.

하늘열차의 평균해발이 4000m로 4~5천m대가되면 산소량이 반으로 줄어 고산증 반응을 일으키기 마련이라 어느새 머리 뒷쪽이 당기고 열이 나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열차 내 준비된 온수로 보이차를 쉬지 않고 끓여 마시며 45시간 동안의 총3360km 열차여행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열차에 오르자 승무원이 의례적인 건강 확인표를 형식적으로 제출하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나는 고원지대 여행의 주의 점을 알고 있고 나의 신체 상황은 3000m 이상 고지대를 여행하기에 충분히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설산이 보이며 열차가 쿤룬산맥에 올라서니 산소가 공급되고 있으니 고통스러우면 산소공급기를 이용하고  휴식을 취하며 물을 많이 마시고 말을 적게 하라는 방송이라고 티벧 라싸에서 북경에 유학중이라는 여대생이 통역을 해주었다. 6인용 침대차에 다섯 명이 우리일행이고 이 여대생은  3층 한자리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자기 여동생은 입석을 끊었는데 같이 와도 되겠냐고 예의바르게 물어왔고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 페이지에서 나오는 중국말을 통역해주어 2박 3일 동안 갇혀진 기차여행 내내 도움을 받았다. 기차는 침대 층에 따라 가격이 다르고 돈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입석을 끊고 식당에서 주로 머물거나 복도에서 머무는 것 같았다.
이 자매의 부모는 티벧에서 아버지는 공산당원이고 어머니는 역사학 교수라고 하였으며 언니는 북경에 있는 대학의 영문과에, 동생도 북경에 있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라는 것으로 보아 특혜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티벧 여행을 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때 티벧의 독립운동이 있었고 많은 티벧 사람들이 희생됐던 사건은 60년 전 우리의 독립운동을 상기시키며 티벧을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300년 된 티벧의 수도 라싸는 티벧어로는 성지를 의미하기도하고 또는 야크를 의미한다고 한다. 티벧은 처음에 원나라에, 그 후 영국과 인도에, 1951년에는 중국의 인민해방군에 점령되었고 1966년 모택동의 문화혁명 때 티벧의 1300년 된 문화유물인 티벧 불교문화가 탄압을 받아 많이 파괴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온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포탈라 궁은 라싸의 상징이다. 포탈라 궁은 7세기에 쏭첸감포가 당나라 문성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짓기 시작했는데 전쟁을 거치며 훼손되어 17세기중엽에 달라이 라마 5대 응아와롭쌍가초 (1617-82)가 재건하였다. 13층 높이 115m, 길이는 360m가 넘는 홍궁과 백궁은 20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장대하며 산언덕에 있는 비범한 기세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며 칠대불가사의의 하나다. 백궁은 달라이라마의 집무실이고 홍궁은 달라이라마의 거처였다. 정부청사이고 청와대이다. 포탈라 궁은 향과 야크버터 등잔 연기에 그을린 1000여개의 방에 불상과 금은보석으로 치장된 부처와 금빛 기와지붕, 화려한 벽화 등으로 꽉 찬 모습은 음침하기는 했지만 티벧 불교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저들의 말은 있을망정 문자도 문화도 다 빼앗기고 문화는 착취당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인가? 1950년 티벧을 놓고 인도와 중국이 싸우다 인도는 시켐국을, 중국은 티벧을 갖기로 제3자끼리 합의하여 나눠가진 것이 꼭 100년 전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나눠가지려다 청일 전쟁을 일으킨 것과 많이 흡사했다. 1300년의 역사도 찬란한 티벧 불교문화도 예술도 누구의 것인가? 이곳의 주인은 이미 티벧이 아니고 칭짱 열차를 타고 들어온 중국의 것이었다. 

1950년 중국이 티벧을 점령한 후 티벧의 북부지역 72만km가 티벧으로부터 분리됐고 이곳이 청해성이라고 불리어지는데 이 청해성이 원래 티벧 땅이라고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티벧 고원은 지구상에서 태양에 가장 가까운 고원으로 하늘열차가 설산을 통과하는 저녁 내내 불빛이 없어 더욱 캄캄한 하늘에 별들은 별무더기 같았다. 내 생전 가장 하늘 가까이 올라와 있고 불 빛없는 광야에서 보는 밤하늘은 모든 천체를 망원경도 없이 보여주었다. 북두칠성은 물론이고 은하수와 빛나는 금성, 반짝이는 밤하늘은 참 정말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기차여행 내내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꿈같은 밤하늘을 즐겼다.
아시아의 주요하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황하와 양자강과 메콩 강이 그러하다. 티벧은 중국 땅의 1/4이나 되는 큰 영토이며 한반도의 12배에 달할 정도이다. 그 땅속에는 석유를 위시한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중국이 티벧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240만 명의 티벧 사람들은 티벧어인 민족고유어를 사용하고 있고 우리나라 세종대왕 같은 왕이 있어 티벧 문자를 갖고 있으나 중국점령 후 티벧어 말살정책과 함께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우리의 일제 강점기 때처럼 중국성씨 개명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들은 저항할 의지도 갖지 못하는 것인가? 많은 국민이 생산적인 일보다 꼬라를 돌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듯했다. 꼬라는 원이라는 뜻인데 조캉사원 법당을 도는 것을 낭건과자라 하고 조캉 사원 바깥담을 끼고 팔각가(바르코:Barkhor)를 도는 것을 파견과자라 하고 조캉 사원에서 포탈라 궁까지 도는 것을 링꼬라라 하는데 이는 만다라를 라싸위에 실현시키기 위한 온 국민의 염원이라고 한다. 
링꼬라 한 바퀴 돌면 현세에서 죄업이 없어지고 108번 돌면 해탈한다는 믿음으로 한여름에도 두터운 코트까지 입고 한손에 꼬라, 한손에 염주를 돌리며 온 국민이 돌고 있었다. 종교적인 이해 없이 어떻게 보면 미신의 나라, 영혼의 나라, 몸은 이승에 있지만 저승을 염원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래서 이 자매들과 진지한 대화를 2박3일 동안 많이 나누려고했다. 그들이 자기네는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지 않고 중국정부로부터 모든 면에서 지원을 받아 온 국민의 생활이 좋아졌으며 북경유학도 어려서부터라도 원하면 무료로 할 수 있어 좋다는 이야길 했다.
그래서 “너는 친중파가 아니냐? 친중파면 훗날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된다. 라마승도 너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느냐?”등의 질문을 했고 이 자매는 대부분의 티벧인들이 친중파이고 종교적 노예생활로부터 티벧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1951년 해방시켜주어 고맙게 생각한다는 이야길 했다. 이 이야길 들었을 때 내가 왜 티벧을 가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우리나라 일제식민지시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태평성대에서 가짜양반 윤씨가 자기만 빼 놓고 세상이 다 망해도 좋다며 영원히 이런 세상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것이 생각난다. 그러면  중국의 압박을 피해 매년 3000명씩 인도다람실과 마을에 모여드는 티벧인들은 또 무엇인가? 저들은 눈사태나 야생동물보다 중국인이 더 무섭다고 했다. 라싸에서 친중파가 더 무서울 수도..... 옛날 식민지 시대에 한국사람 형사가 더 무서웠다.
2박3일 동안 기차를 달려 저녁 무렵 종착역인 라싸에 도착해서야 내가 타고 온 기차를 보니 열차가 우리나라 KTX처럼은 아니지만 시속 100km로 달리는 멋있는 외형이고 요금도 편도 15만 원 정도이니 중국물가로는 대단히 비싼 요금이었다. 물론 교통비만 그렇고 여섯 끼 식사는 미리 준비하거나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물론 컵라면 종류와 빵을 준비했다. 거울무에서 라싸까지 1142km 구간에 있는 티벧의 설산중턱을 오르는 풍경은 황홀감을 느끼게 했고 떠났기에 행복하다는 말을 되뇌게 했다.

하늘열차의 평균해발이 4000m로 4~5천m대가되면 산소량이 반으로 줄어 고산증 반응을 일으키기 마련이라 어느새 머리 뒷쪽이 당기고 열이 나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열차 내 준비된 온수로 보이차를 쉬지 않고 끓여 마시며 45시간 동안의 총3360km 열차여행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열차에 오르자 승무원이 의례적인 건강 확인표를 형식적으로 제출하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나는 고원지대 여행의 주의 점을 알고 있고 나의 신체 상황은 3000m 이상 고지대를 여행하기에 충분히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설산이 보이며 열차가 쿤룬산맥에 올라서니 산소가 공급되고 있으니 고통스러우면 산소공급기를 이용하고  휴식을 취하며 물을 많이 마시고 말을 적게 하라는 방송이라고 티벧 라싸에서 북경에 유학중이라는 여대생이 통역을 해주었다. 6인용 침대차에 다섯 명이 우리일행이고 이 여대생은  3층 한자리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자기 여동생은 입석을 끊었는데 같이 와도 되겠냐고 예의바르게 물어왔고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 페이지에서 나오는 중국말을 통역해주어 2박 3일 동안 갇혀진 기차여행 내내 도움을 받았다. 기차는 침대 층에 따라 가격이 다르고 돈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입석을 끊고 식당에서 주로 머물거나 복도에서 머무는 것 같았다.
이 자매의 부모는 티벧에서 아버지는 공산당원이고 어머니는 역사학 교수라고 하였으며 언니는 북경에 있는 대학의 영문과에, 동생도 북경에 있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라는 것으로 보아 특혜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티벧 여행을 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때 티벧의 독립운동이 있었고 많은 티벧 사람들이 희생됐던 사건은 60년 전 우리의 독립운동을 상기시키며 티벧을 마음속으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싸에서 장무까지

티벧의 수도 라싸에서 네팔의 국경도시 장무까지 가기위해서는 육로든 항로든 물론 직행은 없고 중국을 거쳐야 한다. 티벧의 수도라는 말은 반중국적인 나라에서나 사용하는 이야기고 중국에서는 이미 티벧은 중국의 여러 성 중의 하나의 성에 지나지 않는다. 티벧의 수도  라싸에 가기위해서는 2007년 개통한 일명 하늘열차라는 칭짱(청장열차 : 청해성에서 서장 티벧까지) 열차를 타고 북경에서 라싸까지 2박3일 동안 고도 5000m가 넘는 쿤룬산맥을 넘어가야했다. 밤 9시에 북경역을 떠나면서 실컷 끌 수 있는 캐리어를 짐꾼에게 맡기면 줄을 서지 않고도 기차에 정해진 자리이지만 일찍 들어가 짐을 미리 다른 승객보다도 빨리 정리할 수 있어 좋다고 해서 40위안에 맡겼는데 짐꾼에 따라 받는 돈이 5위안부터 40위안까지 짐꾼 마음대로 이고 짐을 따라가도 개찰구에서는 똑같이 기다리는 사기극이었다. 성지 라싸로 향한 출발점 북경역에서부터 13억 인구 중 엉터리 중국인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대라면 나는 당연히 잠을 잘 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잠을 많이 잔다는 의미가 아니다.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잠을 적게 잤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다보면 자동차로 떠나는 국내여행이든 비행기로 떠나는 외국여행이든 출발점에서 떠나는 것조차 모르고 잠이 든다. 고속버스가 터미널을 언제 떠났는지 모르게 곯아떨어지고 비행기에서도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맨다. 잠이 들었을 때 벨트를 매라고 승무원이 깨우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나는 잠이 쉽게 들고 그렇다고 잠에서 깨는 것이 괴로운 편은 아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참 괴로웠다. 나의 아버지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새벽형 인간이셨기에 날이 밝으면 큰소리로 책을 읽으셨고 집안 마당은 물론 골목길까지 귀신이 쓸어놓은 것처럼 큰 길까지 매일 깨끗이 쓸어놓으셨다. 특히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은 더욱 일찍이 그러하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는 것이 당연히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새벽같이 나를 단잠에서 깨우셨고 그때 참말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가 나를 깨워놓으면 나는 동생 방으로 가서 발만 들여 밀고 또 단잠을 잤다. 그러다 내가 세수하러 나오지 않으면 이방 저방 둘러보시고 찾아내어 또 깨우셨고 나는 동생 방에서 끌려 나와서는 또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일어나시고 밥그릇을 묻어 놓기 위해 깔아놓은 조그만 포대기를 이불삼아 덮고 나는 또 단잠을 잤다. 거의 매일아침 아버지와 나는 잠 때문에 숨박꼭질을 하다시피 한 전쟁이 나의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짜증나는 기억이다. 
 왜 그랬을까? 인생을 돌아보건대 나는 잠을 많이 잔 것 같지는 않다. 소녀시절엔 그 당시에는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 1m는 넘는 큰 궤착의 오디오 세트는 있었기에 한국 가곡과 팝송을 즐겨 들었지만 밤에는 책 읽는다고 잠을 못 잤던 것 같다. 12시가 되면 끊어지는 사설 전깃불 때문에 호야 불을 키고 책을 읽다보면 기름이 떨어질 때는 새벽녘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겠다고 춘천여중 때는 도서위원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춘천서점에서 외상으로 한 달에 열권씩은 샀으니까 시간이 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이 월급날 25일이면 외상술값이 아니라 외생책값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커서는 번역되지 않은 소설책을 영어로, 독일어로 읽는 재미에 잠을 최대한 줄였던 것 같다. 평생 잠을 실컷 못 잤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나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버릇이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닌가한다. 젊어서는 공부하고, 일한다고 나이 들어서는 일하며 운동하려니 잠을 줄일 수밖에. 감기가 들려다가도, 슬픔에 빠지려다가도,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인간관계로 화가 나다가도 잠만 자고 나면 거뜬해지니까 잠은 내게 가장 좋은 보약이었다. 

사람이 귀해서 좋다

청자 같은 글을 쓰는 피천득 수필가는 이른 아침 등교하는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을 보며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고 표현했다.
 나도 평생 배워도 못 다 배우는 것이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 이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이가 나를 위해 살면서도 내가 귀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에 함부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같다. 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을 모를 진데, 그런데 하물며 남이 귀하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기에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십대의 비행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있지 않나 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을 사랑이라고 뭉뚱그려 말 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왜 사랑해야 하느냐 물어 들어가면 결국은 사람이 귀중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과부도, 늙은이도, 어린이도, 동성애자도 모두 귀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내게로 오라, 하늘의 나는 새도 걱정을 안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왜 걱정을 하느냐고 하지 않았던가? 내게로 오라가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로 바뀌지 않았을까? 2011년 지난해는 온 나라가 복지 전쟁이었다. 무료급식 전쟁으로 서울 시장이 바뀌더니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복지를 화두로 방패와 탄약 삼아 복지전쟁을 하는 것을 보며 이제는 복지를 국가가 책임진다니 神도 부처도 하느님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될듯 싶다.
 神이 온 세상을 만들고 마지막 전날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이들에게 온 세상을 주지 않았는가? 닷새 동안 만든 온 세상보다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물론 사람이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평생 배우며 배운 것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멋있는 사람의 삶인 것 같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배우는데 왜 이리 힘든 것일까? 평생 배워도 실천을 못하고 있으니……. 이 지구상에 70억 인구가 살고 있다.
사람이 많은 사회 일수록 사람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는 사회도 있는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도 붙잡아 별주부전에나 나오는 이야기처럼 간을 빼가고 신장도 빼가고 눈알도 빼가서 한국 사람한테 팔아넘기면 그것을 좋다고 사서 자동차 부속품처럼 끼고 다닌다는 괴담도 종종 들린다. 괴담에 지나지 않길 바란다. 사람이 사는 사회가 겁나지 않고 안정이 되려면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평생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도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제일의 가치가 아닌가?

내 브랜드는 내가 지킨다.

내가 내 가치를 만들어가고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명품이 명품을 지키기 위해 OEM 방식이나 로얄티를 대여하지 않아야 진짜 명품으로 오랜 수명을 지킬 수 있다. 에르메스나 샤넬이 루이브똥이나 구찌나 MCM과 차별화 되는 것은 샤넬과 에르메스는 절대 OEM이나 로얄티 대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브랜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다.
내가 브랜드를 지킨다고 할 때 브랜드는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Korea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삼성이나 현대나 포철이나, LG가 처음에는 값으로 경쟁하다가, 그 다음에는 언제부터인가 질로 승부를 걸다가 이제는 브랜드로 경쟁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삼성TV가 SONY를 앞지르고 애니콜이 노키아를 앞지르고 현대차가 세계5대 메이커가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made in Korea라는 이유로 디스카운트(discount)되어 평가 된다고 하는데 나 자신도 내가 가진 가치보다 평가절하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질도 높이지 않고 브랜드만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질은 당연히 0.1%라도 높이며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브랜드를 지켜야 한다. 브랜드를 지키는 방법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을 주는 방법은 국가는 국가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가진 것만큼 베풀므로서 위치에 맞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 개인은 고유하고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치가 지닌 위치만큼 행동해야한다.
10여 년 전 나의 남편이 동생들에게서 존경받고 싶은 소망으로 부모님의 유산을 우리는 하나도 갖지 말고 동생들에게 나눠가지게 하자고 해서 아깝지만 흔쾌히 동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남편은 큰형, 큰오빠라는 브랜드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형제들에게서 권위를 갖고 있다. 겉으로는...
국가도 마찬가지다. 5000만 명의 국민이 20,000불의 G.N.P.인 국가가 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세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에 이어 7번째 되는 국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큰 오빠가 브랜드를 지키기 위하여 형제들을 대표해서 성묘에 돈도 내고 만나면 밥값도 내고 제사도 지내야 큰 오빠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신(神) 앞에 당당함이 인생의 목표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자
  25년간 소식이 없던 동생이 연락이 왔다. 그간 매시간 항상 생각난 것은 아니지만 가끔 가끔 생각이 나고 그때마다 가슴이 아려서 매우 아팠었는데....
25년이란 그긴 세월을 어떻게 지냈을까? 학교도 다니다 말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건장한 체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야생적이지도 못하고,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당기던 그 가냘픈 손가락과 계집애처럼 예쁘게 생긴 조그맣던 아이가 어떻게 밥 먹고 어디서 자며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오히려 소년소녀가장이라면 나라에서 지원금도 주며 보살피기라도 하지. 정서적으로 병든 나의 계모가 지 새끼만 데리고 떠나 공간적으로 법적으로 혼자 남겨진 상태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누나들도 지 살기 바빠 맘에 안 든다고 냉대하니 자존심 센 아이는 친누나가 아니라고 가족이란 고리를 끊고 독한 마음을 먹고 혼자 살다 젊음을 다 허송세월 한 후 늦은 중년에 나타났다.
네 나이 아무리 마흔아홉 이라고 해도 내게는 어린 다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아우야!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할 텐데.... 좀 더 일찍  나타났더라면 몸도 이토록 망가지지 않았을 텐데. 아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일찍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이니. 더 늦게 나타나지 않아서 몸이 더 망가져 누워있는 환자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서, 또 고칠 수 없는 암환자가 아니라서, 또 네가 바보가 아니고 똑똑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며칠 전에 10년 전에 가신 아버지가 꿈에 보이더니 너를 보내시려고 미리 자리를 마련하셨던가보구나! 아버지가 못 거둔 너를 부축해 주라고 하는 계시였던 것 같다. 그래그래, 내 마음속엔 너는 나의 아들이었다. 네 어미가 뭔가에 미쳐서 너를 버리고 떠난 그 날 이후 나는 네게 밥을 먹이고 세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했지. 
네게 가장 급한 치과치료와 법적인 안정과 당장 거쳐할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무엇이든 자격증과정을 거치는 동안 뾰족한 수가 나겠지. 이제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기댈 둔덕이 되어 줄 테니……. 네가 그만 두라고 할 때까지 기본 생활비는 줄 테니 오늘 하룻밤을 어디서 지낼까 걱정하지 말거라. 하늘에 나는 새도 걱정하지 않거늘…….그간 미안하다. 네가 연락하고 싶어도 연락을 못하도록 우리가 했던 것이겠지.
네가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일곱 살 때 만났던 내 아들의 모습을 서른 살이 넘은 청년의 얼굴에서 찾아냈단 말이냐. 한 달 전 초저녁 실수로 길을 잃고 애경백화점 앞에 서있는 청년이 내 아들이라고 느낀 네 그리움에 가슴이 메이는구나. 너의 전화목소리를 들었을 때 울려오는 너의 두려움과 너의 모습을 25년 만에 보았을 때 무엇인가 매우 두려워하는 그 모습 뒤에는 그리움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이제 보고 싶고 안기고 싶고 기대고 싶고, 의존하고 싶은 가족을 만났으니 너의 두려움도 없어지겠지. 두려워하지 말자. 무엇이 두렵니?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랑이 있으면 무엇이 두렵겠니?
우리의 神앞에 당당하게 살아보자. 그러면 神은 우리에게서 두려움대신 용기와 희망을  주실 것이다.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자.

이름과 자아정체성

이름은 사람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인생각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르기 쉽게 임시로 이름을 지은 경우 종종 뿌리 없는 느낌을 받거나 자아정체감을 부인한다.
미국에서는 여자는 결혼하므로 원가족의 성을 버리고 난 후, 아주 다른 가계의 사람처럼 변할 수 있고, 스페인에서는 자녀는 아빠의 성에 엄마의 성을 덧붙이게 되므로 자녀는 두 가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특히 여성 학자들 사이에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모두 붙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또한 요즈음 신혼부부에게 유행하는 태명이나 별명, 애칭, 놀림이름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준다.
만일 어떤 별명이 어린이를 비현실적이거나 비정상적으로 각본화한다면 결과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외모 때문에 생긴 뚱보, 키다리, 점순이, 땅딸이, 면장님(얼굴이 길다는 뜻) 등 별명이 부정적 영향을 주고 괴물, 얼간이, 시골뜨기, 천사, 호랑이 등 행동적 특징은 성인이든 아이든 그렇게 살도록 한다. 딸아이가 아기를 갖았다. 축복이고 기적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다 갖는 아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즈음은 세 쌍에 한 쌍이 자연임신이 안된다고 하는데 내 딸이라고 세 쌍 중 한 쌍에 해당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뱃속의 아기가 엔젤이란다. 천사가 왔다. 기쁜 소식을 항상 전하길 바란다.
키커라는 별명을 아버지가 붙여준 아이는 맘에 안 들거나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을 때 이 아이는 옆에 아이를 차버리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의 별명으로 공격적으로 행동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셈이다.
아이에게 화가 나면 차버리라는 식의 각본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인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 람은 자기이름을 람지라고 소개했다. 우리가 인도 말을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이름 람에 선생님이라는 존칭어 지를 붙여 람지라고 부르게 하였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인도인의 자긍심처럼 느껴져 밉지 않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진 않았어도 자신은 매번 존경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름은 항상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자아정체감은 물론 자신의 인생의 각본에 영향을 주니 따라서 팔자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작명소에서 짓는 이름이 팔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작명소에서 짓는 이름이 대체로 물론 부정적 영향을 주는 이름은 아니다. 이왕이면 부르기 쉽고 뜻도 좋은 예쁜 이름으로 지어준다. 그래서 작명소 이름은 한반에 서너 명씩 될 때도 있는데 이 이름이 팔자를 결정한다면 동명이인이 팔자가 같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절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이름은 고유명사니까 고유성이 있어야 하고 이름자체가 의미가 있어서 정체감에 도움을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한다.
며느리가 둘째 아이를 낳은 지 4주가 지났다. 그간 손자 아이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심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이름 짓는 사람에게 지은 이름을 물어보니 앞의 획수가 26이라 안된다고 하니 돌림자를 따르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어 와서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도 좋으나 돌림자를 따르라고 확고히 선을 그어주었다. 돌림자를 따르지 않는 것은 대개가 부모가 무식해서 일 수 있는데 우리문화에서는 학열을 따지기 때문에 본인도 살아가는데 정체성을 갖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돌림자 석(錫)자에 재를 붙여서 한자는 뜻글자이니 뜻글자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재상이라는 재(宰)로 하여 상공부장관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내가 살아생전 보진 못하겠지만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살리라 본다. 

이름 값
만물에 이름이 있고 모두가 이름값을 한다.
세상의 모든 만물에 이름이 있다.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다. 성씨(姓氏)는 전해오기에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성씨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김씨(金氏)네는 금(金)을 좋아해서 김씨(金氏)가 됐고, 안씨(安氏)는 여자마저도 갓 쓰고 집에서 ‘에헴’하고 싶은 사람들이 안씨(安氏)가 됐다. 내가 보기에 나도 안씨(安氏)지만, 안씨(安氏)만큼 딱 부러질망정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성씨(姓氏)가 없는 것 같다. 
우리역사에서만도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 유학을 들여온 문선공 안향선생, 안창호선생, 안중근의사,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선생, 독도대장 안용복 등 특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친 사람들이 많은 성씨(姓氏)이다. 
이 지구상에 1000년 이상 된 왕조를 꼽으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로마일 것이고 동양에서는 천년신라일 것이다. 천년신라를 세운 알지가 대대로 금을 좋아해서 金알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 알지는 고조선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사실은 천년이 넘게 번영한 왕조이다. 
천년이 넘게 김씨(金氏)가 번영하였고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난히 나라에 목숨 바친 성씨(姓氏)이고, 내가 그 성씨(姓氏)에 자부심을 느끼며 나의 자부심의 근원이 안씨성(安氏姓)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임학(林學)을 전공하시면서 당신이 전공하는 림(林)자를 내게 붙여주셨다.
나를 키우는 것도 그분의 인생에서 전공이셨던 것이다. 향기 나는 나무가 되라고 향기 나는 숲이 되라고, 향기 나는 정원이 되라고 하셨나보다. 티벧 어에서는 임(林)이 정원, 공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나는 아버지의 인생의 목표에 도달해야하는 사명감을 갖고 산다. 향기 나는 정원이 되려고... 아버지는 나무를 무척 사랑하셨다. 60년대 외국에 가셨다가 돌아오시는 트렁크에는 각종 나무만 그득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나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주 흔하지만 예쁜 우산하나 갖고 싶었으니까
아버지가 소천하신날도 식목일 아침이고 소천하시기 전날 나를 못 만나시고 떠나시면서 나의 사촌오빠를 불러 내가 갖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어주라고 유언까지 하고 가셨다.
나는 그 땅에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향기 나는 꽃나무를 가득 심었고 봄이면 아버지 본 듯이 꽃구경을 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셨지만 아버지가 주신 이름값을 하려고 숙제하는 마음으로 산다.
나는 내가 35년 전 용마산 둔덕에 자리를 잡을 때는 남들은 큰 돈 들여가며 주말에는 복잡하고 막히는 교통도 마다하지 않고 별장을 따로 두고 왔다 갔다 하며 사는데 이곳을 별장삼아 이 세상에 사는 날까지 살리라 하며 터를 잡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산 꼭대기 대중교통이라곤 버스도 없는 곳, 식료품가게는커녕 라면, 얼음과자도 살 구멍가게 하나 없는 그곳에 어떻게 사냐고 하던 그 곳도 한집 한집 속칭 빌라라고 하는 연립주택동네로 변해갔다. 결국에는 나도 세월 따라 내가 살던 땅에 11가구의 빌라를 짓게 되었다. 내가 아끼던 젊음과 행복과 추억이 담긴 집이다. 나의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소녀소년 시절, 대학생활이 이루어진 곳, 나의 부모님들이 정신과 몸이 쇠약해져 떠나실 때까지 홍시와 대추를 실컷 잡수셨던 집이다. 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보답으로 좋은 집을 짓기로 했고 경제적 타산은 안 맞지만 튼튼하고 예쁜 집을 짓고 예쁜 이름을 붙이기로 하였다.
용마산 산자락에 있기에 산마을이라 했고 앞 동을 솔동, 뒷동을 학동이라고 이름지어 홍익대 교수님께 문패도 멋있는 디자인을 부탁해서 벽에 박아 넣었다. 앞가슴 왼쪽에 명찰을 달듯이 이름을 붙였다. 산마을에 절개 있는 푸른 소나무에 고귀한 하얀 학이 날아들기를 고대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집의 등기부등본도 산마을 솔동, 산마을 학동으로 올리며 나의 셋째 넷째 아이로 호적에 올리는 마음이었다. 
이집에 사는 사람들이 산마을의 솔과 학처럼 살기를 바라며 이집을 예쁘고 튼튼하게 지었고 감이 주렁 달리면 맛있게 따먹으라고 나의 시부모님께서 맛있게 드시던 20년 된 큰 감나무도 옮겨 심었다.

세느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에펠

이름과 자아정체성

이름은 사람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인생각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르기 쉽게 임시로 이름을 지은 경우 종종 뿌리 없는 느낌을 받거나 자아정체감을 부인한다.
미국에서는 여자는 결혼하므로 원가족의 성을 버리고 난 후, 아주 다른 가계의 사람처럼 변할 수 있고, 스페인에서는 자녀는 아빠의 성에 엄마의 성을 덧붙이게 되므로 자녀는 두 가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특히 여성 학자들 사이에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모두 붙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또한 요즈음 신혼부부에게 유행하는 태명이나 별명, 애칭, 놀림이름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준다.
만일 어떤 별명이 어린이를 비현실적이거나 비정상적으로 각본화한다면 결과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외모 때문에 생긴 뚱보, 키다리, 점순이, 땅딸이, 면장님(얼굴이 길다는 뜻) 등 별명이 부정적 영향을 주고 괴물, 얼간이, 시골뜨기, 천사, 호랑이 등 행동적 특징은 성인이든 아이든 그렇게 살도록 한다. 딸아이가 아기를 갖았다. 축복이고 기적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다 갖는 아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즈음은 세 쌍에 한 쌍이 자연임신이 안된다고 하는데 내 딸이라고 세 쌍 중 한 쌍에 해당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뱃속의 아기가 엔젤이란다. 천사가 왔다. 기쁜 소식을 항상 전하길 바란다.
키커라는 별명을 아버지가 붙여준 아이는 맘에 안 들거나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을 때 이 아이는 옆에 아이를 차버리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의 별명으로 공격적으로 행동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준 셈이다.
아이에게 화가 나면 차버리라는 식의 각본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인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 람은 자기이름을 람지라고 소개했다. 우리가 인도 말을 모르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이름 람에 선생님이라는 존칭어 지를 붙여 람지라고 부르게 하였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인도인의 자긍심처럼 느껴져 밉지 않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진 않았어도 자신은 매번 존경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름은 항상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자아정체감은 물론 자신의 인생의 각본에 영향을 주니 따라서 팔자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작명소에서 짓는 이름이 팔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작명소에서 짓는 이름이 대체로 물론 부정적 영향을 주는 이름은 아니다. 이왕이면 부르기 쉽고 뜻도 좋은 예쁜 이름으로 지어준다. 그래서 작명소 이름은 한반에 서너 명씩 될 때도 있는데 이 이름이 팔자를 결정한다면 동명이인이 팔자가 같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절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이름은 고유명사니까 고유성이 있어야 하고 이름자체가 의미가 있어서 정체감에 도움을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한다.
며느리가 둘째 아이를 낳은 지 4주가 지났다. 그간 손자 아이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심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이름 짓는 사람에게 지은 이름을 물어보니 앞의 획수가 26이라 안된다고 하니 돌림자를 따르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어 와서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도 좋으나 돌림자를 따르라고 확고히 선을 그어주었다. 돌림자를 따르지 않는 것은 대개가 부모가 무식해서 일 수 있는데 우리문화에서는 학열을 따지기 때문에 본인도 살아가는데 정체성을 갖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돌림자 석(錫)자에 재를 붙여서 한자는 뜻글자이니 뜻글자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재상이라는 재(宰)로 하여 상공부장관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내가 살아생전 보진 못하겠지만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살리라 본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 

참새가 세 마리 앞마당에 날아왔다. 참 겁도 없이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더니.... 왜 그럴까? 뻔한 이치다. 날이 추워지니 날아다니는 날벌레도, 기어다니는 애벌레도 땅속으로 꼭꼭 숨었을테니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겁이 없이 용감해질 수 밖에....
 방글라데쉬의 호랑이 밀림지역 순나르반스에선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사는 밀림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겁도 없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어느날은 반대로 호랑이가 굶어 죽지 않고 살려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지붕위에 웅쿠리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새가 날이 추워지면 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해 잡힐 각오까지는 안하더라도 겁을 먹으며 사람들 앞으로 나오듯이 이 지역에서는 사람도 호랑이도 겁을 먹으며 서로 침범을 한다. 그래서 사람한테 막대기로 맞아서 다리를 다친 어미 호랑이가 다리를 절며 갓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했고, 사람도 호랑이한테 머리를 물려 머리통이 찌그러진 큰 상처를 갖고 살거나 팔다리를 호랑이한테 물려 한 개씩 뜯긴 사람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 호랑이굴 앞에서 물고기를 잡아 우리 돈으로 하루 7000원에서 9000원 정도 번 돈으로 대 여섯식구가 몇일을 연명해야 하는 방글라뎃시 사람들을 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은 자제능력으로 종족보존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겁을 극복하고 고통을 견디며 경쟁사회에서 자기스스로 살아남는다. 종족보존의 성향으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는 그 유전자를 유전받고 그 유전자가 성공하게 만든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라 희생하지 못하나 살아남기 위해 희생을 조율해가며 성공한다. 자녀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견디는 자제력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이를 이기적 희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파랑새 증후군도 있다. 마테를링크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힘들면 직장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통을 피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본인들은 더 많은 돈과 인기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직장을 옮긴다고 하지만 결국 직장을 옮겨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능력이 확장되여야하고 능력확장을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노력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나면 저절로 능력확장이 되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게된다. 
조급하게 본인은 노력하지 않고 이리저리 직장과 때로는 직업까지 바꾸어가며 방황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짜증쟁이 아줌마.

나는 왕십리역사에 붙어있는 동네에 살기에 왕십리 대형마트가 가까이 있다. 특히 우리 동네는 E마트로 난 쪽대문이 있기에 E마트 접근성이 좋은데도 나는 멀리 재래시장을 찾는다. 내가 재래시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대형마트보다 웰빙 식단 마련을 쉽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가지 다양한 나물이나 해산물 또는 전통 음식 재료를 원자재 그대로 볼수있고 성인병에 나쁜 식자재의 유혹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는 아무래도 다양하고 맛있는 그러나 달고 기름지고 가공된 식품이 많아 하나씩 집어넣다보면 나의 몸이 병들게 될 것이다. 또 한편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보다 영세한 재래시장상인을 나는 생각한다. 재래시장에는 여러 가지가 다 있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성향의 상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중에 가장 친절한 한과주인은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한과 좀 먹어보라고 대형마트에서 하는 것처럼 시식을 시키는 맘 좋은 아줌마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꼭 사야하는 북어조림이나 팥죽 등 맛있는 음식을 팔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장사하는 아줌마도 있다. 살 때 마다 소비자에게 옆에서 남편이 빠릿빠릿하지 못해서 자신이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려고 애쓰는 이 아줌마를 나는 보기 싫어 꼭 필요하지 않으면 안 가려한다. 
왜 보기 싫은 것일까? 짜증내는 모습은 내게 무엇을 연상시킬까?
내 성장기동안에 아버지인가? 누군가?
모든 소비자가 짜증내는 아줌마에 예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짜증과 연관된 내 무의식이 있기에 나는 짜증쟁이 아줌마에게서 자극 받지 않기 위해 그 집을 될 수 있으면 안 간다. 
그러니 자연히 장사가 잘 안되어 짜증은 심해지기 마련이다.
짜증부리는 사람이 내 가까운 사람 중에 있었기 때문에 짜증에 민감한 모티브가 있다.
나도 일이 많거나 신체적으로 힘들 때면 짜증을 부리게 되고 나의 딸이 또 짜증을 부리는 엄마를 보며 컸고 내가 저 아이를 키우면서 짜증부리는 모습을 보여 줬을 테고 저 아이는 그것을 보고 배워서 내게 짜증을 부리는 것이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실감한다. 
짜증쟁이 부식가게 아줌마가 나를 깨닫게 해준 것이니 공자는 도처에 모든 사람이 스승이라더니 짜증쟁이 아줌마는 나의 스승인데 내가 나를 알도록 하는 것이 괴로워 그를 피했던 것이다.

이름 병

성철스님이 이름 병이라 칭한 명예욕은 말 그대로 병이다. 물욕, 성욕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망하게 할 수 있는 3대 욕심이다.
욕심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니 자아가 강하면 자연히 욕심을 포기하게 되고 욕심을 포기하면 자연히 물욕과 성욕이 통제되고 명예욕도 자제되면 이름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그 이름 석 자가 무엇이라고 그 이름을 빛내려고 노력할 때 그 이름에는 더덕더덕 군살들이 붙어 본래 이름은 가려지고 더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얼이 아니라 얼굴에 칠하고 분장되었을 때 나의 본래의 얼굴은 안보이고 제 3의 얼굴이 된다. 나의 부모님이 내게 붙여준 이름을 본래대로 지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쉬운 것 같지만 물욕이나 성욕처럼 먹을 것도 아닌데 명예 같아서 마구잡이로 먹다가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 남이 알아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 어디에서나 나서야 나인 사람, 높은 장 자리는 다 맡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하다못해 사기꾼 소굴에서도 장 자리를 맡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욕심으로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그래서 성철스님도 인간 공부(선)를 방해하는 세 가지에 돈과 이성(異性)과 명예를 꼽은 것 같다. 인간 공부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노릇 하는데 방해요소로 돈과 섹스와 잘나 보이려는 욕심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은 이성적이지 않고 동물적이어서 돈과 섹스와 명예욕이 같이 돌아간다.
교수까지 하면서도 돈에 지저분한 사람은 남녀관계에서 지저분하고 따라서 이름이 더러워진다. 그래서 이름이 더러워지는 것은 돈과 섹스와 관련이 많다. 황우석 박사처럼 연구에서 아무리 굉장한 업적을 냈다 하더라도 더 빛나고 더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욕심을 부리면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의 요직에 올라서도 욕심 때문에 장/차관을 물러나야하는 것을 보면 명예는 욕심으로 기어오른다 하더라도 돈과 섹스로 무너짐을 볼 수 있다. 명예와 돈과 섹스가 한통속에 있다.
순간의 엑스타시를 위하여 이성을 놓치면 세계 IMF 총제도 물러나야하는 것을 볼 때 섹스 때문에 평생을 노력해서 쌓아온 이름 탑이 무너진다. 반대로 이름 탑을 위하여 돈으로 메지를 쑤셔 넣고 바르고 다져도 그 이름값을 못하면 이름 탑은 흉상이 되어 우리 앞에 우뚝 서있게 된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명예를 위하여 인생을 바치는 것이 거룩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길지 모르나 그 이름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며 인생 소비하다보면 이것 역시 아주 헛된 욕심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목표를 두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다보면 욕심 없이 이름을 얻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이를 사람답게 사는 최상의 바람인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목숨을 걸고 시간을 낭비하다보면 명예의 노예가 되어 이름 병을 앓으며 즐겁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디 셀러

우리는 옛날을 그리워한다. 왜 그리워할까? 옛날이 좋아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옛 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리 상황을 오디셀러라 한다. 2011년도 다 가는데 TV나 매스메디아는 회상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특히 지금은 잘 살고 있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조그만 행복을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보릿고개는 있을망정 간식이라고 없던 시절의 까만 갱엿이 그립고, 막과자나 뻥튀기가 그립고 까만 고무신을 그리워한다. 또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다다미 소리를 그리워한다. 이미 우리는 풍요 속에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에 맘 놓고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그때의 갱엿이 그립고 개떡이 그립고 앉은뱅이 썰매를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
이번 방학에 북인도에 다녀왔다. 인도에도 상류층문화는 있겠지만 인도의 대중문화는 하층문화이다.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나고 집은 도시를 벗어나면 옛날 우리 뒷간 같은 것이 주택이고 쓰레기와 오물 속에 악취는 진동하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그러니까 1950년 6.25 동란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산적은 없었다. 가난할망정 더럽지는 않았다. 내가 우리 아이가 철없을 때 가난한 친척집에 데리고 가면 엄마친척들이 못살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못사는 친척집에 가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나는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싫다.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나는 청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만큼 살아온 것이 대견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다. 인도에서 단기간 짧은 시간에도 대중 속에 섞여 여행하는 것이 호기심은 있었지만 편치 않았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지 정말 가난하고 힘들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디셀러는 단지 그리운 감정이다. 그리운 감정은 추억할 것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게 한다.

<컴퓨터 중독>

오늘 9시뉴스에 중학교 2학년부터 컴퓨터게임을 하던 학생이 학교도 중퇴하고 매일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한밤중에 복면을 하고 편의점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사건이 나왔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임상적으로 말하면 컴퓨터 중독이란 아이가 엄마와 대상관계에서 대상결핍이 만든 현상이다. 무슨 뚱딴지 같이 컴퓨터가 좋아서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이지 어떻게 대상결핍이 되어서 그런것이냐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밥도 굶고 학교도 안가고 돈도 잃어가며 비현실의 세계에 빠져 정신착란을 일으키기까지하며 죽게까지 하는 원인이 단순히 게임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독성 성격은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이 가지는 이차적 문제이다. 중독자들의 사고에 의해 나오는 행동은 원시적인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정상을 일탈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중독성 특성을 갖고 있으며 그 특성은 초기 인간관계의 실패에 의한 자구책이다. 인간관계를 실패한 이들의 문제해결은 상실된 양육자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복원해 주는 것이다. 충족 되지 못한 대상 에너지를 다시 공급 받아 대상과 관련된 느낌이 포만감을 갖게 함으로써 대상결핍에 의한 문제로서 나타난 컴퓨터 중독현상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대상관계에서 주도권은 대상에게만 있다. 아이는 다만 환경이 바뀌면 좋아하거나 슬퍼하거나 즐겁거나 할 뿐이다.
나쁜 대상에 의해 양육된 영아는 자폐기, 공생기를 힘들게 괴롭게 보내며 격리개별화기에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에디프스 갈등기를 잘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것이 청소년기에 자폐증, 정신분열증, 우울증을 앓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은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만족스러움에 의한 것이고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도 또한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부족함에 의한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인가 공급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분 또는 괴로운 기분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의 필름에 영상이 맺힌다. 그 영상화된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자신의 느낌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느껴진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의 느낌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갖고 평생 살아간다.

명품

명품은 가장 고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명품! 여성이면 누구나 명품을 좋아한다고 하면 틀린 이야기일까? 루이비통이 본토 불란서보다도 또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비똥은 국민가방으로 불릴 정도다. 한국의 명품시장은 매년 12%씩 성장하여 2010년에 45억 달러(5조원) 규모라 한다. 가계소득에서 명품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5%로 일본의 4%를 넘어섰다. 명품소비 1위는 미국이고 2위는 일본이다. 1억2000만 인구가 명품의 23%를 소비한다니 한때는 엔고를 무기로 유럽을 누비며 명품을 싹슬이 하여 명품업계를 회생시키더니 그 뒤를 이어 한국이 회생시키고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명품이라는 상표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상품의 가치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상표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명품중의 명품 샤넬. 한 사람의 여성, 하나의 이름, 하나의 전설, 아우라.
“유행 그것은 나다”라고 불길처럼 나타난 인간 가브리엘 샤넬을 생각해본다. 샤넬이 만들어낸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브랜드 때문에 가짜 브랜드가 생기었다.
정품의 품질은 조악한 싼 물건이 있을 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반상품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명품의 희소성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가브리엘 사넬이 내놓은 검은 수트나 인조보석을 상용하고 있다. 이미 사넬의 모조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고 모조품 존재자체가 브랜드 정품의 값어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얼마나 갖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들을 위하여 모조품도 인기가 있느냐 말이다. 명품에 대한 모조품은 명품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은 모조품은 이미 우리는 그것이 사넬의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일반화하고 있다. 이때는 미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지니지 않은 현시적 낭비가 명성에 버금가는 이유는 그것이 금전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금전적 능력이 명성과 명예에 지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명품이 성공과 탁월한 힘을 입증하기 때문이고 중세나 근대사회의 명가의 명예대신에 오늘날은 돈이 말해주는 세상이 왔다. 돈으로 산 명품이 중세의 명예에 버금가는 능력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치하지 않게 세련되게 자신의 고귀함을 말해준다.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건만 1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를 찼을 때 그의 명성을 다시 보게 된다. 이것이 명품의 역할이다.

크라카우는 현재 인구 80만의 폴란드 제3의 도시로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동쪽으로 위치한 도시이다. 크라카우는 독일 발음이며 폴란드 현지 발음으로는 크라코프(krak'ow)로 불리는데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각지에서 유대인을 강제 이동시킬 수 있는 철도 요지였으므로 유대인 최고 밀집지역이 되었고 여기에서 50Km 떨어진 현지발음으로 오시비엥에 오시비엥침 세구역이 설치되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곳이다. 

폴란드의 군대막사 28개동이 있는 아우슈비츠까지 오는 긴 여정에서 유대인의 반은 배고프고 목마르고 병들어 죽었고 살아남은 유대인중 늙고 병들고 약하고 어린 70퍼센트 유대인은 긴 여행에서 지쳐있을 때, 그들은 목욕물이 식으니 빨리 옷 벗고 들어가라는 명령에 따라 속아서 가스실로 들어가 학살당하였고 살아남은 자의 30퍼센트 유대인은 맹물 같은 밀가루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견디며 노동을 하다 쓰러지는 죽음의 공포에 익숙해지며 살아남아야 했다. 30퍼센트의 유대인 중에 끝까지 살아남아 그날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아무리 가혹한 환경일지라도 인간의 내적 자유는 앗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프랭클은 1942년부터 3년간을 아우슈비츠에서 보내면서 시련의 이유를 알면 고통은 멈추고 시련의 이유가 삶의 진정한 의미이고, 삶의 의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깨닫고 잠재능력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논리의 ‘의미치료’ 창시자가 되었다.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옛날 내가 모방송국에서 야간에 생방송을 하고 아침 등교 길에 나는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한참을 달렸다한다. 반대편 차선의 트럭이 멈추고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내 차가 트럭 앞에서 멈춘 일도 있었다. 내가 오늘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다. 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자고 졸라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니 내려올 승객의 줄이 길어 예약된 서울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 버스가 출발한지 30분 만에 대관령 입구에서 충돌사고로 우리가 끊었던 좌석의 1,2번 승객이 저 세상으로 갔다. 우리에게 표를 끊어주신 친정아버님 친구 분은 우리가족이 죽은 줄 알고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 적이 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닌가! 또 어려운 실업난에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직장에 들어간 것도 기적이고 건강한 것도 기적이고 착한 배우자 만난 것도 기적이고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난 것도 기적이다. 기적은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부관계

부부관계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원하지 않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쉬울것 같지만 부부갈등은 부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수가 많다. 바람을 피거나 도박을 하거나 술을 먹는 것은 물론 손 씻지 않고 밥상에 오는 남편을 싫어하는데도 어린시절이 몸에 배어있어 몸에 밴대로 행동하면 아내가 그렇게 싫어해도 고치지 못하는 수도 있다. 흔히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절대로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것이다.
특히 부부사이에는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에게 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것도 상대에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남편은 아내가 밥상 앞에서 양말벗는것을 싫어하는데 양말을 벗어 일부러 아내의 얼굴에다 들여대므로 아내가 원수처럼 대하는 것을 볼수 있다. 이 남편은 아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서 아내가 까다롭다고 하는데 까다로운 아내가 까다로와서 싫어하는 행동을 안하는 것이 부부의 사랑이다.
자사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공자의 애제자 자사가 말하길 공자의 길은 부부관계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우주의 본질은 생명이고 생명은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의 지속이며 어느 공간에 속한 공간화를 거부하고 창조되는 것이고 창조란 창조적인 창조성이고 끝없는 창조는 부부관계에서 시작한다. 이 창조적인 창조성은 사랑에서 시작한다. 모든 만물이 사랑에서 창조가 시작하지만 부부관계의 창조성은 특히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에서 시작되어야지 욕망에서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 남녀 사랑은 창조성을 통하여 우주의 본질인 생명을 만들고 끝없는 창조 속에 사람을 만들어 간다. 이 창조성이 슈벨트도 만들고 슈바이처도 만들고 살인자 유영철도 만든다.
서양의 가족치료이론에서 모든 문제는 부부관계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나 자사의 사람사는 길이 부부관계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같은 시각이다.

대상관계와 전능경험

대상이란 주체의 반대의 의미로 쓰면 된다. 대상은 사물보다는 사람에 사용되고 실제로 인격적관계라는 개념이다. 절대적 의존기에서 상대적 의존기로 넘어갈 때 유아는 ‘나는’, ‘나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엄마의 돌봄은 유아에게 단순히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유아로 하여금 대상을 발견하고 대상과 친하게 하는 것이다. 엄마가 제공한 환경적 구조와 기술도 중요하지만 환경에 주도된 행동이 아니라 유아에 의해 주도된 행동이 중요하다. 
유아의 욕구에 충분히 좋은 엄마의 적응해주는 행동에 의해 욕구가 충족되면 “이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야.”라는 경험이 반복되어 “내가 이것을 창조했다.”라고 유아는 인식한다.
여기서 환상과 현실이 하나가 되며 유아는 자신의 세계의 창조가가 된다. 이 세계는 유아에게는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것으로 느껴 유아는 전능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유아가 배고플 때 엄마의 반응으로 엄마의 불룩한 젖가슴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욕구에서 자기가 창조한 것으로 경험한다. 유아는 진짜 젖가슴을 자신의 욕구에서 창조된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된다. 그리고 보이는 것, 냄새, 맛을 어딘가에 기록한다. 이것을 임종렬은 필림에 남긴다고 했다.
이 때 여기서 유아는 세상은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란다. 그 결과 아기는 내적 실재와 외적 실재사이에 엄마가 할 일은 유아를 보호하고 유아가 엄마를 통해 알게 되는 세상 경험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명품이라는 상표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상품의 가치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상표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명품중의 명품 샤넬. 한 사람의 여성, 하나의 이름, 하나의 전설, 아우라.
“유행 그것은 나다”라고 불길처럼 나타난 인간 가브리엘 샤넬을 생각해본다. 샤넬이 만들어낸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브랜드 때문에 가짜 브랜드가 생기었다.
정품의 품질은 조악한 싼 물건이 있을 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반상품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명품의 희소성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가브리엘 사넬이 내놓은 검은 수트나 인조보석을 상용하고 있다. 이미 사넬의 모조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고 모조품 존재자체가 브랜드 정품의 값어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얼마나 갖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들을 위하여 모조품도 인기가 있느냐 말이다. 명품에 대한 모조품은 명품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은 모조품은 이미 우리는 그것이 사넬의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일반화하고 있다. 이때는 미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지니지 않은 현시적 낭비가 명성에 버금가는 이유는 그것이 금전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금전적 능력이 명성과 명예에 지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명품이 성공과 탁월한 힘을 입증하기 때문이고 중세나 근대사회의 명가의 명예대신에 오늘날은 돈이 말해주는 세상이 왔다. 돈으로 산 명품이 중세의 명예에 버금가는 능력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치하지 않게 세련되게 자신의 고귀함을 말해준다.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건만 1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를 찼을 때 그의 명성을 다시 보게 된다. 이것이 명품의 역할이다.

이름 병

성철스님이 이름 병이라 칭한 명예욕은 말 그대로 병이다. 물욕, 성욕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망하게 할 수 있는 3대 욕심이다.
욕심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니 자아가 강하면 자연히 욕심을 포기하게 되고 욕심을 포기하면 자연히 물욕과 성욕이 통제되고 명예욕도 자제되면 이름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그 이름 석 자가 무엇이라고 그 이름을 빛내려고 노력할 때 그 이름에는 더덕더덕 군살들이 붙어 본래 이름은 가려지고 더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얼이 아니라 얼굴에 칠하고 분장되었을 때 나의 본래의 얼굴은 안보이고 제 3의 얼굴이 된다. 나의 부모님이 내게 붙여준 이름을 본래대로 지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쉬운 것 같지만 물욕이나 성욕처럼 먹을 것도 아닌데 명예 같아서 마구잡이로 먹다가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 남이 알아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 어디에서나 나서야 나인 사람, 높은 장 자리는 다 맡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하다못해 사기꾼 소굴에서도 장 자리를 맡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욕심으로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그래서 성철스님도 인간 공부(선)를 방해하는 세 가지에 돈과 이성(異性)과 명예를 꼽은 것 같다. 인간 공부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노릇 하는데 방해요소로 돈과 섹스와 잘나 보이려는 욕심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은 이성적이지 않고 동물적이어서 돈과 섹스와 명예욕이 같이 돌아간다.
교수까지 하면서도 돈에 지저분한 사람은 남녀관계에서 지저분하고 따라서 이름이 더러워진다. 그래서 이름이 더러워지는 것은 돈과 섹스와 관련이 많다. 황우석 박사처럼 연구에서 아무리 굉장한 업적을 냈다 하더라도 더 빛나고 더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욕심을 부리면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의 요직에 올라서도 욕심 때문에 장/차관을 물러나야하는 것을 보면 명예는 욕심으로 기어오른다 하더라도 돈과 섹스로 무너짐을 볼 수 있다. 명예와 돈과 섹스가 한통속에 있다.
순간의 엑스타시를 위하여 이성을 놓치면 세계 IMF 총제도 물러나야하는 것을 볼 때 섹스 때문에 평생을 노력해서 쌓아온 이름 탑이 무너진다. 반대로 이름 탑을 위하여 돈으로 메지를 쑤셔 넣고 바르고 다져도 그 이름값을 못하면 이름 탑은 흉상이 되어 우리 앞에 우뚝 서있게 된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명예를 위하여 인생을 바치는 것이 거룩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길지 모르나 그 이름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며 인생 소비하다보면 이것 역시 아주 헛된 욕심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목표를 두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다보면 욕심 없이 이름을 얻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이를 사람답게 사는 최상의 바람인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목숨을 걸고 시간을 낭비하다보면 명예의 노예가 되어 이름 병을 앓으며 즐겁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름 값
만물에 이름이 있고 모두가 이름값을 한다.
세상의 모든 만물에 이름이 있다.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다. 성씨(姓氏)는 전해오기에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성씨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김씨(金氏)네는 금(金)을 좋아해서 김씨(金氏)가 됐고, 안씨(安氏)는 여자마저도 갓 쓰고 집에서 ‘에헴’하고 싶은 사람들이 안씨(安氏)가 됐다. 내가 보기에 나도 안씨(安氏)지만, 안씨(安氏)만큼 딱 부러질망정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성씨(姓氏)가 없는 것 같다. 
우리역사에서만도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 유학을 들여온 문선공 안향선생, 안창호선생, 안중근의사,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선생, 독도대장 안용복 등 특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친 사람들이 많은 성씨(姓氏)이다. 
이 지구상에 1000년 이상 된 왕조를 꼽으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로마일 것이고 동양에서는 천년신라일 것이다. 천년신라를 세운 알지가 대대로 금을 좋아해서 金알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고, 알지는 고조선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사실은 천년이 넘게 번영한 왕조이다. 
천년이 넘게 김씨(金氏)가 번영하였고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난히 나라에 목숨 바친 성씨(姓氏)이고, 내가 그 성씨(姓氏)에 자부심을 느끼며 나의 자부심의 근원이 안씨성(安氏姓)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임학(林學)을 전공하시면서 당신이 전공하는 림(林)자를 내게 붙여주셨다.
나를 키우는 것도 그분의 인생에서 전공이셨던 것이다. 향기 나는 나무가 되라고 향기 나는 숲이 되라고, 향기 나는 정원이 되라고 하셨나보다. 티벧 어에서는 임(林)이 정원, 공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나는 아버지의 인생의 목표에 도달해야하는 사명감을 갖고 산다. 향기 나는 정원이 되려고... 아버지는 나무를 무척 사랑하셨다. 60년대 외국에 가셨다가 돌아오시는 트렁크에는 각종 나무만 그득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나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주 흔하지만 예쁜 우산하나 갖고 싶었으니까
아버지가 소천하신날도 식목일 아침이고 소천하시기 전날 나를 못 만나시고 떠나시면서 나의 사촌오빠를 불러 내가 갖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어주라고 유언까지 하고 가셨다.
나는 그 땅에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향기 나는 꽃나무를 가득 심었고 봄이면 아버지 본 듯이 꽃구경을 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셨지만 아버지가 주신 이름값을 하려고 숙제하는 마음으로 산다.
나는 내가 35년 전 용마산 둔덕에 자리를 잡을 때는 남들은 큰 돈 들여가며 주말에는 복잡하고 막히는 교통도 마다하지 않고 별장을 따로 두고 왔다 갔다 하며 사는데 이곳을 별장삼아 이 세상에 사는 날까지 살리라 하며 터를 잡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산 꼭대기 대중교통이라곤 버스도 없는 곳, 식료품가게는커녕 라면, 얼음과자도 살 구멍가게 하나 없는 그곳에 어떻게 사냐고 하던 그 곳도 한집 한집 속칭 빌라라고 하는 연립주택동네로 변해갔다. 결국에는 나도 세월 따라 내가 살던 땅에 11가구의 빌라를 짓게 되었다. 내가 아끼던 젊음과 행복과 추억이 담긴 집이다. 나의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소녀소년 시절, 대학생활이 이루어진 곳, 나의 부모님들이 정신과 몸이 쇠약해져 떠나실 때까지 홍시와 대추를 실컷 잡수셨던 집이다. 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보답으로 좋은 집을 짓기로 했고 경제적 타산은 안 맞지만 튼튼하고 예쁜 집을 짓고 예쁜 이름을 붙이기로 하였다.

바늘구멍

옛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바늘구멍이라는 골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동지방에서의 교통수단은 오늘날 관광자원으로나 볼 수 있는 낙타이다. 부자의 낙타는 살이 찌고 짐도 많이 싣고, 장식도 주렁주렁 달았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나 가난한 사람의 낙타는 말라 비틀어졌을 뿐 아니라 장식도 없고 실을 짐도 많지 않기에 바늘구멍 골목을 잘 빠져 다녔다고 하여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을 비천하고 뒤쳐지고 오갈 데 없는 자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비유했다.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의 고대도시 패스의 매디나 시장골목은 정말 바늘구멍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좁고 미로 같았으나 낙타들이 오늘날도 그 바늘구멍 같은 좁은 골목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낙타가 짐을 싣고 빠져 나갈 때 나는 벽 옆에 종잇장 같이 달라붙어 길을 내주었다.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은 권세와 간교함으로 검은 돈을 모았거나 깨끗한 돈이라 할지라도 강박적인 증세로 부자가 되었을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관심이 소유하는 쪽에 쏠리어 신보다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받고,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물질보다 이웃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오히려 가난한 것은 사회제도의 피해자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발달과정 속에서 특히 여섯 살부터 열두서너 살 때까지 근면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부모의 근면한 생활태도를 보고 자라면서 근면한 생활태도를 익혔을 때 큰 부자는 못 될망정 중산층의 작은 부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게으름은 자아의 에너지 소멸상태이고, 자아의 에너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기에 가난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 가난한 사람들이 나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도 있다. 나이 쉰 살이 다된 남동생이 25년 만에 무일푼으로 나타났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멀쩡한 사지와 좋은 머리 갖고 그 동안 돈을 하나도 못 모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누나들은 이렇게 재산을 모았는데 너는 뭐했냐고 물으니 가족이 없으니 돈을 모아야겠다는 목표가 안생기고 의지도 안 생겼다고 한다. 결국 돈도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으는 것이다.
요즈음 이기적 자본주의의 피해가 늘어나면서 자본주의를 이기심에 충실한 제도로 이윤이 생기면 승자 독식하는 자본주의는 물러가라고 뉴욕의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고 있다. 기업은 이윤독식을 하면 안 된다. 기업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기업의 가치실현을 위하여 나누어야 한다. 이것을 실천하는 기업을 요즈음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는데 모든 기업은 사회적 기업이어야 되고 자본주의 역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자본주의 일 때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가난한자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쉬워진다. 왜냐하면 곡간에서 인심나기에 부자는 맘만 먹으면 훨씬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자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불쌍하고 연민스러워하는 사람은 권력과 금력을 모두 거머쥐고도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사회를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7,80년 지나다 보니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극도로 심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그대로 좋은가하는 논의가 일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적 사회주의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본주의가 그대로 발전하려면 좀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인데 자본주의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는 민주주의의 철학이고 더 올라가면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 기본적 가치를 망각하고 기업은 이윤만 추구하였다. 그 가치는 모든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고 최소한 동등한 기회를 갖고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이다. 그리고 사회는 책임을 갖고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

예술은 사람을 만든다.

예술가는 신이 창조한 것을 가다듬어 사람이 보게 한다.
예술가는 창작활동으로 여러 가지 예술의 언어를 통해 대중과 의사소통한다. 신이 이미 돌 속에, 소리 속에, 창조한 것을 조각을 통하여 음악을 통하여 그 속에 이미 신이 존재했고 지금도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눈이 끄집어내어 우리의 의식세계에 보여줄 때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우리는 감동케 되고 신이 창조한 세계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를 경애하고 고맙게 느끼고 그를 따른다. 청소년들은 록가수들에게 환성을 지르고 중년의 여인은 젊은 음악가에게 빠지고 노인은 자연을 보며 신의 섭리에 몰입하게 된다. 올해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K-POP의 멜로디와 춤에 젊은이들이 빠졌다. 그래서 대중은 예술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과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신을 만나게 한다. 예술가는 신의 영역인 창조의 영역으로 들어가 대중을 깨운다.
예술가는 우리 보통사람보다 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먼저 느끼고 듣고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저들이 본 것을 무의식속에서 꺼집어내어 의식화 시키면 우리는 예술가가 의식화한 것을 의식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으로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는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화시킴으로 성숙시키는 현자들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천재이다.
천재는 예민한 지성과 감성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꺼내어 예술이란 창작으로 승화시켜 의식화한다. 우리는 천재의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만들어낸 예술품을 보고 우리 자신 내부의 무의식이 건드려져 의식적으로 감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 속에 빠지고, 예술에 몰두하며 예술을 사랑한다. 모든 예술에 모든 사람이 감명 받는 것은 아니다. 천재의 예술에 의해 무의식이 건드려진 사람만이 “아! 좋다! 너무 좋아!” 하며 탄성을 자아낸다. 천재 예술가는 예술을 조작하며 무작정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무의식을 꺼내어 자신 특유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는 각자 특유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표현하려는 무의식의 소재도 일정한 동기의 패턴이 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이 다르고 그들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가 있는데 이것이 예술가의 주 동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광수는 육체가 아닌 정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이문열이 민족의 아픔과 저항을 나타내듯이 모든 작가는 주 패턴이 있다. 무의식 저변에 깔린 주 동기(motif)를 예술이란 작업을 통하여 의식화하고 의식화된 예술은 보편적 사고를 하는 우리에게 의식을 통하여 무의식을 건드려 공명을 얻고 공감을 얻고 사람을 변하게 한다. 예술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가면 그가 설계하여 세기를 걸쳐 건축되는 성가족성당이나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람블라스 거리 근처에 있는 자연그대로 삐뚤삐뚤한 건축물이나 구엘 공원은 얼마나 아름다울 뿐 아니라 편리 하며 자연스러운가? 그곳에서는 사람도 또 하나의 조형물이 된다. 필자인 나도 그 속에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참 아름다운 추억이다. 예술을 사람이 만들지만 사람을 예술이 다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휴일이면 예술을 접하려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변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이면 공짜로 볼 수 있는 화랑가를 누비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대학로 노천 카페도 가며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받아들이려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전달하려는 것은 항상 새롭고 감동을 주고 보람을 느끼게 하고 깨달음을 주기에 나는 항상 그 영향을 받는다. 예술은 나를 변하게 하고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는 천재로서 존경받기 마련이고 그들은 우리보다 무의식을 더 먼저 의식으로 깨달은 사람들이기에 성숙한 사람들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한 사람이 道人이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있으면 좋고 편안함을 느낀다.

오디 셀러

우리는 옛날을 그리워한다. 왜 그리워할까? 옛날이 좋아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옛 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리 상황을 오디셀러라 한다. 2011년도 다 가는데 TV나 매스메디아는 회상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특히 지금은 잘 살고 있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조그만 행복을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보릿고개는 있을망정 간식이라고 없던 시절의 까만 갱엿이 그립고, 막과자나 뻥튀기가 그립고 까만 고무신을 그리워한다. 또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다다미 소리를 그리워한다. 이미 우리는 풍요 속에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에 맘 놓고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그때의 갱엿이 그립고 개떡이 그립고 앉은뱅이 썰매를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
이번 방학에 북인도에 다녀왔다. 인도에도 상류층문화는 있겠지만 인도의 대중문화는 하층문화이다.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나고 집은 도시를 벗어나면 옛날 우리 뒷간 같은 것이 주택이고 쓰레기와 오물 속에 악취는 진동하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그러니까 1950년 6.25 동란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산적은 없었다. 가난할망정 더럽지는 않았다. 내가 우리 아이가 철없을 때 가난한 친척집에 데리고 가면 엄마친척들이 못살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못사는 친척집에 가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나는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싫다.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나는 청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만큼 살아온 것이 대견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다. 인도에서 단기간 짧은 시간에도 대중 속에 섞여 여행하는 것이 호기심은 있었지만 편치 않았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지 정말 가난하고 힘들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디셀러는 단지 그리운 감정이다. 그리운 감정은 추억할 것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게 한다.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40년 전 기적(미라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게도 살아가면서 저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했다.
기적 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에 총알은 귀밑을 지나가고 혼자 살아남는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기적의 순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젊었을 때는 그 기적의 순간을 기적인지 모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기적이고 은총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내일 눈을 뜨면 기적이 일어나 있었으면 좋겠다. 기독교 모임에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며 하다못해 아름다운 빛나는 태양을 주심에 감사하고 날씨가 따듯함에 감사하고 우리 모두 이렇게 모이게 해주심에 감사하고 모두 건강하고 즐겁게 해주심에 감사한다는 감사기도를 들을 때 별것을 다 감사한다니 참 웃긴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오만덩어리였다.
나는 이 나이까지 병원에 누워있지 않고 건강하여 내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느낀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요양 서비스를 받겠다고 건강보험 등급판정을 신청한 사람들을 판정하며 나라고 그런 상황에 놓이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내가 건강한 것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일찍 엄마 잃고 서울에 올라와 교수까지 하며 건강한 몸으로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나는 이것이 기적이고 은총인데 얼마 전까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이 건강하다고 내가 건강한것이 당연한 것, 다른 사람은 건강하지 못할망정 나만은 건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오만이었고,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은총이고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아이가 그 스트레스 많은 청소년 시절에 미치지 않고 일류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떤 지인이 고마워하라며 모든 부모가 나만큼은 다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고마워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내 아이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제 보니 신께 감사하고 기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이 세상 좋은 일은 모두 기적이었다. 

게으름도 오복(五福)의 하나다.

 느림과 게으름은 얼른 보기에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른 것이다. 느림은 빨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느림 이 자체가 그리 큰일 날 것은 없다. 늦게 할 뿐이다. 그러나 게으름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거나 늦게 했기 때문이니 좀 일이 나지 않을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느리거나 게으른 것이나 결과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속담에 게으름도 오복의 하나라고 했는데……. 

지난 봄 가뭄이 계속되어 산야는 타들어가고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밭두렁은 돌덩이처럼 딱딱해 지고 한여름이 되어도 비 한 방울 오지 않아 밭작물은 심는 대로 말라 비틀어지는 형편이라 농사지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런데 봄이 다가는 초여름 초입에 단비가 내려 풀을 뽑고 콩을 심었다. 비가 내리기 전까지는 풀뿌리가 딱딱한 흙속에 박혀 풀도 뽑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비가 안와도 잡초는 잘 자라 명아주 키는 내 키만 한 놈도 제법 있을 지경이었다. 봄이 지나고 늦게 검은콩 서리태 두 됫박을 심었다. 한 되는 일주일 먼저 심고 한 되는 그 다음 주에 심었다가 늦게 심은 것은 추수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콩밭도 매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무더운 더위가 지나고 콩은 무럭무럭 시퍼렇게 잘 자라주었고 가을이 지나 가을 끝자락에 서리가 와서 가을걷이를 하는데 이 웬일일까? 수확을 못 할 것 같던 일주일 늦게 심은 콩이 더 대글대글하고 쓸데없는 떡잎은 다지고 수확을 많이 거두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이 서리태인가? 서리가 올 때까지 여물어 주기에... 게으른 자에게도 복을 주는 것일까? 게으름도 오복의 하나라더니 게으르고 싶다고 게으를 수 있는가? 게으름도 타고나야지! 

사 향 첩

 사슴은 우리가 오늘날 무스크향으로 알고 있는 사향주머니를 차고 있다. 숫사슴이 암사슴을 홀리기 위해 생식기에 달아둔 사향 때문에 10 리 밖의 포수한테 들켜 총을 맞듯이 사향첩의 주인인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그림을 모아 만든 그림첩에 재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경고로 사향첩이라고 표지 제목을 붙였다 한다. 사향첩이라고 지은 이유는 그림 그리는 이 재주 때문에 죽을 수 있으니 가족 외 에는 사향첩을 보여주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니 내가 진정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얼마큼 겸손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슴의 고유의 향인 정말 기분 좋은 무스크 향 때문에 포수에게 들켜 숫사슴이 죽 듯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죽게 되고 산을 잘 타는 사람은 산 타는 재주로 산에 가서 죽고 돈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강도한테 죽고 힘센 사람은 그 힘 때문에 싸움꾼한테 죽는다. 그래서 단속하는 의미에서 사향첩이라고 책 제목을 붙였다. 사향첩의 자손도 그 사향첩을 자랑하였기에 우리가 오늘 날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기 재주는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명예욕인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랑했으니……. 반대로 명예가 더럽혀지면 죽음을 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은 사람을 만든다.

예술가는 신이 창조한 것을 가다듬어 사람이 보게 한다.
예술가는 창작활동으로 여러 가지 예술의 언어를 통해 대중과 의사소통한다. 신이 이미 돌 속에, 소리 속에, 창조한 것을 조각을 통하여 음악을 통하여 그 속에 이미 신이 존재했고 지금도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눈이 끄집어내어 우리의 의식세계에 보여줄 때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우리는 감동케 되고 신이 창조한 세계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를 경애하고 고맙게 느끼고 그를 따른다. 청소년들은 록가수들에게 환성을 지르고 중년의 여인은 젊은 음악가에게 빠지고 노인은 자연을 보며 신의 섭리에 몰입하게 된다. 올해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K-POP의 멜로디와 춤에 젊은이들이 빠졌다. 그래서 대중은 예술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과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신을 만나게 한다. 예술가는 신의 영역인 창조의 영역으로 들어가 대중을 깨운다.
예술가는 우리 보통사람보다 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먼저 느끼고 듣고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저들이 본 것을 무의식속에서 꺼집어내어 의식화 시키면 우리는 예술가가 의식화한 것을 의식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으로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는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화시킴으로 성숙시키는 현자들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천재이다.
천재는 예민한 지성과 감성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꺼내어 예술이란 창작으로 승화시켜 의식화한다. 우리는 천재의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만들어낸 예술품을 보고 우리 자신 내부의 무의식이 건드려져 의식적으로 감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 속에 빠지고, 예술에 몰두하며 예술을 사랑한다. 모든 예술에 모든 사람이 감명 받는 것은 아니다. 천재의 예술에 의해 무의식이 건드려진 사람만이 “아! 좋다! 너무 좋아!” 하며 탄성을 자아낸다. 천재 예술가는 예술을 조작하며 무작정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무의식을 꺼내어 자신 특유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는 각자 특유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표현하려는 무의식의 소재도 일정한 동기의 패턴이 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이 다르고 그들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가 있는데 이것이 예술가의 주 동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광수는 육체가 아닌 정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이문열이 민족의 아픔과 저항을 나타내듯이 모든 작가는 주 패턴이 있다. 무의식 저변에 깔린 주 동기(motif)를 예술이란 작업을 통하여 의식화하고 의식화된 예술은 보편적 사고를 하는 우리에게 의식을 통하여 무의식을 건드려 공명을 얻고 공감을 얻고 사람을 변하게 한다. 예술 속에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가면 그가 설계하여 세기를 걸쳐 건축되는 성가족성당이나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람블라스 거리 근처에 있는 자연그대로 삐뚤삐뚤한 건축물이나 구엘 공원은 얼마나 아름다울 뿐 아니라 편리 하며 자연스러운가? 그곳에서는 사람도 또 하나의 조형물이 된다. 필자인 나도 그 속에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참 아름다운 추억이다. 예술을 사람이 만들지만 사람을 예술이 다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휴일이면 예술을 접하려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변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이면 공짜로 볼 수 있는 화랑가를 누비고, 젊은이들이 모이는 대학로 노천 카페도 가며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받아들이려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전달하려는 것은 항상 새롭고 감동을 주고 보람을 느끼게 하고 깨달음을 주기에 나는 항상 그 영향을 받는다. 예술은 나를 변하게 하고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는 천재로서 존경받기 마련이고 그들은 우리보다 무의식을 더 먼저 의식으로 깨달은 사람들이기에 성숙한 사람들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한 사람이 道人이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있으면 좋고 편안함을 느낀다.

아킬레스근

  아킬레스근 하면 약점, 상처받을 수 있는 부위, 콤플렉스, 예민한 주제, 사람의 가장 미약한 부분으로 잘 겨냥된 화살로 쏘아 마치 전복되는 탑처럼 심리적으로 좌절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두루두루 쓰인다.
 트로이 전쟁의 막바지에 아킬레스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물에 포획된 도시의 성문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구름 속에 숨어있던 아폴로가 쏜 화살이 그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관통했다. 그는 심한 고통으로 신음소릴 내며 마치 전복된 탑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그녀의 아들 아킬레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지옥의 강 스틱스에 담갔다. 일단 지옥의 강처럼 강한 스틱스에 한번 담겨지면 담금질되어 강해졌을 텐데 테티스가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잡고 담가야 했기에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는 담겨지지 않았다. 
 아킬레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테티스가 손으로 잡았던 부위인 발뒤꿈치뿐이기에 이를 잘아는 아폴로는 아킬레스의 오직 약한 발뒤꿈치를 명중하였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부분이 각기 다르더라도 테티스가 잡은 부분은 있기에 어딘가 누구나 아킬레스근이 있기 마련이다. 신체적으로도 누구나 힘이 들면 발병하는 부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이 병이나고 어떤사람은 간이나 소화기관이 병이나고 나는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허리병이 난다.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근이고 치료자는 우선 이 아킬레스근을 찾아 건드려 치료를 시작한다.

나는 마음을 열고 아우슈비츠의 슬픔을 같이 하기 위하여 64년 전의 빅터 프랭클과 함께 2만kw의 전류가 흐르는 가시철망으로 둘러싸인 죽음의 문을 통과했다. 바로 이곳 2층 벽돌로 된 막사 앞에 세워진 교단에는 유대인 중에서 뽑힌 악사들이 불어대고 두들겨대는 행진곡에 발맞추어 유대인의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희극적인 표정을 띤 게스타포의 두 번째 손가락이 잔인하게 삶과 죽음을 구별하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다. 그날도 서 있었고 오늘도 하늘로 팔을 뻗쳐 들고 쭉 늘어 서 있는 미루나무가 이처럼 공포에 질려 말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없다. 저 미루나무는 그날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면서 말 못했고 오늘도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하여 벙어리가 된 듯 저들의 바람소리는 싸늘했다.

게토집단 이주로 알고 살림살이를 커다란 가죽가방에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유대인들은 죽음의 문에서 가방도 빼앗기고 법랑으로 된 냄비며, 주전자, 세숫대야 등 살림살이를 몽땅 빼앗기고 모직옷감을 짜기 위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머리도 깎이고 쇠붙이가 될 만한 것은 안경테며 장애인 보장구까지 모두 빼앗겼던 것이다. 

게으름도 오복(五福)의 하나다.

 느림과 게으름은 얼른 보기에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른 것이다. 느림은 빨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느림 이 자체가 그리 큰일 날 것은 없다. 늦게 할 뿐이다. 그러나 게으름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거나 늦게 했기 때문이니 좀 일이 나지 않을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느리거나 게으른 것이나 결과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속담에 게으름도 오복의 하나라고 했는데……. 

지난 봄 가뭄이 계속되어 산야는 타들어가고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밭두렁은 돌덩이처럼 딱딱해 지고 한여름이 되어도 비 한 방울 오지 않아 밭작물은 심는 대로 말라 비틀어지는 형편이라 농사지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런데 봄이 다가는 초여름 초입에 단비가 내려 풀을 뽑고 콩을 심었다. 비가 내리기 전까지는 풀뿌리가 딱딱한 흙속에 박혀 풀도 뽑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비가 안와도 잡초는 잘 자라 명아주 키는 내 키만 한 놈도 제법 있을 지경이었다. 봄이 지나고 늦게 검은콩 서리태 두 됫박을 심었다. 한 되는 일주일 먼저 심고 한 되는 그 다음 주에 심었다가 늦게 심은 것은 추수하게 될 것 같지 않아 콩밭도 매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무더운 더위가 지나고 콩은 무럭무럭 시퍼렇게 잘 자라주었고 가을이 지나 가을 끝자락에 서리가 와서 가을걷이를 하는데 이 웬일일까? 수확을 못 할 것 같던 일주일 늦게 심은 콩이 더 대글대글하고 쓸데없는 떡잎은 다지고 수확을 많이 거두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이 서리태인가? 서리가 올 때까지 여물어 주기에... 게으른 자에게도 복을 주는 것일까? 게으름도 오복의 하나라더니 게으르고 싶다고 게으를 수 있는가? 게으름도 타고나야지! 

오디 셀러

우리는 옛날을 그리워한다. 왜 그리워할까? 옛날이 좋아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옛 날로 돌아가고 싶은 심리 상황을 오디셀러라 한다. 2011년도 다 가는데 TV나 매스메디아는 회상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특히 지금은 잘 살고 있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조그만 행복을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있다. 보릿고개는 있을망정 간식이라고 없던 시절의 까만 갱엿이 그립고, 막과자나 뻥튀기가 그립고 까만 고무신을 그리워한다. 또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다다미 소리를 그리워한다. 이미 우리는 풍요 속에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다시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에 맘 놓고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그때의 갱엿이 그립고 개떡이 그립고 앉은뱅이 썰매를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
이번 방학에 북인도에 다녀왔다. 인도에도 상류층문화는 있겠지만 인도의 대중문화는 하층문화이다.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나고 집은 도시를 벗어나면 옛날 우리 뒷간 같은 것이 주택이고 쓰레기와 오물 속에 악취는 진동하고 우리 부모님 세대에도 그러니까 1950년 6.25 동란 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산적은 없었다. 가난할망정 더럽지는 않았다. 내가 우리 아이가 철없을 때 가난한 친척집에 데리고 가면 엄마친척들이 못살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못사는 친척집에 가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나는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싫다. 젊음을 되돌려 준다고 해도 나는 청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만큼 살아온 것이 대견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다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다. 인도에서 단기간 짧은 시간에도 대중 속에 섞여 여행하는 것이 호기심은 있었지만 편치 않았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마음뿐이지 정말 가난하고 힘들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디셀러는 단지 그리운 감정이다. 그리운 감정은 추억할 것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게 한다.

내 브랜드는 내가 지킨다.

내가 내 가치를 만들어가고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명품이 명품을 지키기 위해 OEM 방식이나 로얄티를 대여하지 않아야 진짜 명품으로 오랜 수명을 지킬 수 있다. 에르메스나 샤넬이 루이브똥이나 구찌나 MCM과 차별화 되는 것은 샤넬과 에르메스는 절대 OEM이나 로얄티 대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브랜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다.
내가 브랜드를 지킨다고 할 때 브랜드는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Korea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삼성이나 현대나 포철이나, LG가 처음에는 값으로 경쟁하다가, 그 다음에는 언제부터인가 질로 승부를 걸다가 이제는 브랜드로 경쟁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삼성TV가 SONY를 앞지르고 애니콜이 노키아를 앞지르고 현대차가 세계5대 메이커가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made in Korea라는 이유로 디스카운트(discount)되어 평가 된다고 하는데 나 자신도 내가 가진 가치보다 평가절하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질도 높이지 않고 브랜드만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질은 당연히 0.1%라도 높이며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브랜드를 지켜야 한다. 브랜드를 지키는 방법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을 주는 방법은 국가는 국가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가진 것만큼 베풀므로서 위치에 맞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 개인은 고유하고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치가 지닌 위치만큼 행동해야한다.
10여 년 전 나의 남편이 동생들에게서 존경받고 싶은 소망으로 부모님의 유산을 우리는 하나도 갖지 말고 동생들에게 나눠가지게 하자고 해서 아깝지만 흔쾌히 동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남편은 큰형, 큰오빠라는 브랜드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형제들에게서 권위를 갖고 있다. 겉으로는...
국가도 마찬가지다. 5000만 명의 국민이 20,000불의 G.N.P.인 국가가 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세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에 이어 7번째 되는 국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큰 오빠가 브랜드를 지키기 위하여 형제들을 대표해서 성묘에 돈도 내고 만나면 밥값도 내고 제사도 지내야 큰 오빠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옛날 이종사촌언니네 결혼식에 가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어리고 그때는 특히, 남편이 유학생 시절이라 힘들 때 자기네 친형제 결혼식에서 6남매는 가만히 있고 사촌인 내게 그 비싼 호텔 커피 값을 내게 한 후 나는 사촌언니들과 관계를 끊은 적이 있었다. 언니들이 언니노릇을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언니로서 모시기 싫어 관계를 끊었던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20000불의 5000만 인구로서 세계7번째 큰 국가라면 긍지를 갖고 개발도상국을 도와야한다. 우리보다 잘 살던 나라들이 왜 우리보다 못살게 되었는가? 물론 당연히 질도 문제이거니와 브랜드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60년대 우리보다 잘살던 필리핀이 우리나라가 체육관하나 없을 때 장충동에 체육관을 지어 준 것이 장충체육관이고 여기서 대통령선거도 하고 대통령배 농구시합 등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며 유일하게 우리의 실내 스포츠 문화를 이어갔었다.

명품

명품은 가장 고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명품! 여성이면 누구나 명품을 좋아한다고 하면 틀린 이야기일까? 루이비통이 본토 불란서보다도 또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비똥은 국민가방으로 불릴 정도다. 한국의 명품시장은 매년 12%씩 성장하여 2010년에 45억 달러(5조원) 규모라 한다. 가계소득에서 명품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5%로 일본의 4%를 넘어섰다. 명품소비 1위는 미국이고 2위는 일본이다. 1억2000만 인구가 명품의 23%를 소비한다니 한때는 엔고를 무기로 유럽을 누비며 명품을 싹슬이 하여 명품업계를 회생시키더니 그 뒤를 이어 한국이 회생시키고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명품이라는 상표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상품의 가치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상표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명품중의 명품 샤넬. 한 사람의 여성, 하나의 이름, 하나의 전설, 아우라.
“유행 그것은 나다”라고 불길처럼 나타난 인간 가브리엘 샤넬을 생각해본다. 샤넬이 만들어낸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브랜드 때문에 가짜 브랜드가 생기었다.
정품의 품질은 조악한 싼 물건이 있을 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반상품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명품의 희소성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가브리엘 사넬이 내놓은 검은 수트나 인조보석을 상용하고 있다. 이미 사넬의 모조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고 모조품 존재자체가 브랜드 정품의 값어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얼마나 갖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들을 위하여 모조품도 인기가 있느냐 말이다. 명품에 대한 모조품은 명품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은 모조품은 이미 우리는 그것이 사넬의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일반화하고 있다. 이때는 미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지니지 않은 현시적 낭비가 명성에 버금가는 이유는 그것이 금전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금전적 능력이 명성과 명예에 지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명품이 성공과 탁월한 힘을 입증하기 때문이고 중세나 근대사회의 명가의 명예대신에 오늘날은 돈이 말해주는 세상이 왔다. 돈으로 산 명품이 중세의 명예에 버금가는 능력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치하지 않게 세련되게 자신의 고귀함을 말해준다.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건만 1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를 찼을 때 그의 명성을 다시 보게 된다. 이것이 명품의 역할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원래 명예도 돈으로 매매되었다. 재력이 있는 부르주아는 작위는 물론 족보를 사서 진짜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양반이 되고 싶어 맹진사 같은 가짜 양반이 나타났다. 구라파에서도 가짜귀족이 출현했으나 어딘가 어색했다. 가짜귀족들은 선조의 문장을 찾을 만한 문장원에 드나들며 찾은 문장을 마차나 그릇에 커다랗게 새기고 재고 다녔으며 가구에 조각해 넣었다. 가짜문장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차 앞에는 커다란 문장이 위엄을 떨치고 있는 모습을 영화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오늘날 로고를 과시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루이비통은 단지 루이비통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 루이비통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가방과 같은 액세서리에 붙는 로고가 옷에서는 목 뒤에서 가슴팍으로 옮겨왔고 심지어 소매 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속빈 현대인은 로고의 노예가 되어 돈을 쓰고 있다. 운동화도 로고 자체가 디자인이다. 운동화의 기능이 아니라 로고 값으로 값이 매겨진다.

유행은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나 다음계절에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다. 유행은 기원이라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브랜드는 반드시 기원을 갖는다.
전통이라는 가치와 유행이라는 순간의 빛, 상반된 두 개념 사이를 오가는 외줄타기를 하는 이 어려운 감각이 체질화한 브랜드만이 슈퍼 브랜드가 된다.
“소비 욕망은 문화적 유전자가 되어 여자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시대를 뛰어넘어 생존한다.” 이 명품에 대한 욕망을 상위 0.1%만이 가지면 된다. 문제는 명품에 대한 욕망이 일반화 되는 것이 문제다. 

옛날 내가 모방송국에서 야간에 생방송을 하고 아침 등교 길에 나는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한참을 달렸다한다. 반대편 차선의 트럭이 멈추고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내 차가 트럭 앞에서 멈춘 일도 있었다. 내가 오늘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다. 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자고 졸라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니 내려올 승객의 줄이 길어 예약된 서울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 버스가 출발한지 30분 만에 대관령 입구에서 충돌사고로 우리가 끊었던 좌석의 1,2번 승객이 저 세상으로 갔다. 우리에게 표를 끊어주신 친정아버님 친구 분은 우리가족이 죽은 줄 알고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 적이 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닌가! 또 어려운 실업난에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직장에 들어간 것도 기적이고 건강한 것도 기적이고 착한 배우자 만난 것도 기적이고 주위에 좋은 사람을 만난 것도 기적이다. 기적은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겨울 부부동반을한 열차를 운행하는 노동자 일행들과 같이 파리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가 큰맘 먹고 루이비통 가방을 하나씩 다 사들고 돌아왔다. 철도 노동자라 할지라도 월급이 많아서 별 부담 없이 샀을런지 몰라도 그 가방에 들어간 남편들의 노동이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가? 특히 그 가방을 들고 다니면 모조품으로 알 테니 걱정이다. 명품은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 마무리로 사용하면 고상하게 진가를 발휘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떨어진 명품은 가짜로 둔갑된다. 진가를 나타낼 때만 명품으로 사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명품을 나도 갖기만 하면 부티나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달라 보일 것 이라는 명품이라는 미신을 믿고 있어 잘못된 이 미신의 명품을 갖기 위해 도둑질도 하게 만들고 남자친구 선택의 잣대가 되고 못가지면 불행하게 느끼게까지 만들고 있다.
잡신을 맹신적으로 믿는 것보다 보이는 미신이니 생각이 없는 사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명품에 매달리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병든 사회의 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