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성공인가?
뮤리엘 제임스는 사람은 성공하기 위하여 태어난다고 했는데 성공은 무엇인가?
성공은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을 하는 것이다. 단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의미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실현과 자아실현이 혼용되고 있는데 이유는 영문학자들이 자기전공이 아닌 타전공의 전문용어 self-actualization을 번역할 때 심리학 지식이 없으니까 자기실현을 자아실현으로 잘못 번역해서 학문의 여러 방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흔히 말하는 자아실현은 자기실현이며 자기실현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육체와 정신이 만들어지고 그 육체와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육체는 논외하고 정신은 무의식과 의식 중 무의식이 당연히 기본이다.
사람이 생사를 넘나들 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되긴 하지만 의식이 없다고 죽은 송장 취급하지는 않는다. 의식은 육체의 영역이 아니고 정신의 영역이다. 인간의 무의식을 강조할 때 우선 언제부터 무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무의식은 육체가 만들어 지면서 같이 생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만들어져 본성으로 굳어져 이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행복감마저 좌지우지하는 그 무의식은 언제까지 만들어지는 것일까?
학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세 살 이전에 만들어진 느낌이 무의식이고 세 살 이후 만들어진 생각이 의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에릭 번은 8세 이전에 만들어진 무의식의 틀로 의식세계를 살아간다고 하고 8세 이전의 어린 시절이 몸에 밴 어린이로 성인세계를 살아갈 때 부적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린 시절 몸에 밴 무의식을 의식은 죽어도 깨닫지 못하니 치료자가 지적해주어야 긴가민가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거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날 갑자기 그렇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다.
정신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id, ego, superego 구조의 정신 속에 있는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을 깨닫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할 수 없고 이는 단지 자기 무의식을 아는 것이고 깨달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있을 수도 없고 자아(의식의 핵심)는 의식의 핵심이고 자기실현은 무의식을 알아 가는 것이고 자신의 정신을 깨달음이다.
태어난 아기의 정신은 태아기부터 만들어진 무의식이 기본 틀이다. 이 무의식속에는 이 사람의 잠재력이 있는데 무의식속에 있기에 우리의 의식이 무의식속에 있는 잠재력을 알지 못 한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자극을 받고 경험하면서 무의식속에 있는 잠재능력을 찾아내어 개발하는 것이 자기실현이다.
다시말하면 자기실현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나오고 쌓인 무의식 속에 있는 잠재력을 찾아내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자기의 무의식 속에 꼭꼭 숨어있는 잠재력은 자극과 경험을 통한 통로를 마련해 줌으로서 잠깐잠깐 얼굴을 내밀 때 잡아채 개발하는 것이 자기실현이다.
결국 성공한 사람은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성(잠재력)을 개발하여 자기실현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작업을 하며 자기실현이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조안이 눈은 누굴 닮았나?
조안이가 누굴 닮았지? 눈은 지 엄마를 닮았어야 하는데 하필 안 닮았네. 지 엄마 눈이 예쁜데……. 코나 입은 아빨 닮아도 좋고 눈만은 아빠를 닮지 않았어야 하는데……. 아빠 눈은 올챙이 눈이잖아! 조안이가 엄마 눈을 안 닮았네! 조안이 엄마의 커다란 쌍꺼풀의 까만 눈도 만든 것 아니야! 엄마 아빠 중 닮으려면 우성인 예쁜 눈을 닮았어야 했을 텐데. 안 닮았으니……. 코나 입은 지 엄마를 빼 닮았으면서 예쁜 눈은 왜 안 닮았을까? 눈은 누굴 닮았나?
현재 스코아 눈은 아빠 닮았다. 인간 본성은 나쁜 것은 남의 식구 닮았다고 우기고 싶은 것이다. 눈이 아무리 현재 스코아 아빠를 닮았더라도 감춰진 엄마 눈을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추측해보며 조안이 엄마의 눈을 의심해본다. 확실히 보이는 것도 이러할진대 더군다나 보이지 않는 심성이나 버릇이야 물론 나쁜 것은 나 아닌 타인을 의심해보다가 확정지어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행동이나 성격도 좋은 것은 나 닮고 나쁜 것은 나 아닌 상대방을 닮았다고 우겨본다.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은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그냥 우기고 보는 것이다. 내 아이의 생물학적 모습이 유전학적으로 부모 닮지 않고 나올 수 없듯이 내 아이의 심리적 성격이나 습관과 행동이 부모 닮지 않고 나올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누굴 닮아 저런 아이가 나왔나 라고 쉽게 이야기 한다.
부모는 흔히 나는 어렸을 때 안 그랬는데 애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100% 거짓말이다. 부모가 그랬기에 아이도 그렇다. 부모가 입이 짧기에 아이가 입이 짧고 엄마 아빠가 조용하고 내성적이기에 아이도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고 부모가 화를 잘 내기에 화를 내도 되는 줄 알고 아이도 화를 잘 낸다. 나는 내 아이가 화를 잘 내서 내가 상처를 받고 기분 나쁠 때가 있다. 이 때 왜 애들이 저 모양인지 한심할 때도 있고 상처받아 미워할 때도 많았는데 그게 다 나 닮아서 그런데 말이다. 부모 둘 중 최소한 한 사람이 올챙이 눈이기에 올챙이 눈이 나왔듯이 최소한 부모 중 한 사람은 화를 잘 내기에 화내는 애가 나왔고 부모 중 한명은 비양심적이기에 도둑놈이 나왔다. 외모건, 성격이건 부모를 유전 아니면 경험을 통하여 닮았다. 외모는 유전학적으로 닮았고 성격은 아이가 부모와 생활하면서 부모가 전해준 느낌으로 전달되어 닮았다. 유전이 아니다. 부모의 느낌이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의 무의식이 되고 이 무의식이 팔자의 각본이니 부모가 아이의 팔자를 만들어 준 것이다. 생년월일시가 팔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느낌이 팔자를 만든 것이다.
어떤 노인이 아들 딸 모두 결혼하였다가 이혼하고 원가족으로 돌아와 손자와 외손녀에게 새벽밥을 해주면서 손녀 손자 밥해주는 신세타령을 한다. 자기 팔자는 물론 아들과 딸의 팔자도 자기가 만든 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둘 다 이혼하고 돌아온 아들딸의 팔자는 물론 손자손녀의 팔자도 그들의 엄마 아빠가 아이였을 때 외할머니와 할머니가 자녀를 바라 본 느낌으로 엄마아빠의 성격을 만들었고 이 성격이 팔자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자신들이 만들어 준 자녀의 그 팔자를 고치려면 자녀가 다 크기 전에 자신이 만들어준 팔자를 자신이 다시 재 양육을 통하여 고쳐주어야 한다. 땅에 걸려 넘어졌으면 땅을 짚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은 유전되는가?
아이는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능력도 없이 다만 성장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갖고 태어난다. 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율성이라는 심리적 능력으로서 무엇을 인지하고 인지한 것을 기억하고 기억한 것을 쌓을 수 있는 잠재력을 뜻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 어떤 형의 성격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성격과 같은 성격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어머니와 접촉을 통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자율성이라는 심리기제에 의해 쌓여진 경험으로 갖게 된 것이 성격이다. 그러므로 이 성격이 원래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출생초기 아이가 경험하는 경험 그자체가 바로 아이의 성격을 만들어 내는 자료이고 근본이다. 성격형성과 관계된 중요한 날은 당연히 아이가 태어나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옛부터 뭔가 연관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태어난 생년월일이 팔자를 결정한다고 여겼으며 태어난 생년월일을 사주팔자를 볼 때 꼭 챙겼다. 이는 의미를 모르고 했으니 미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 첫날의 분위기가 좋았다면 아이는 좋은 인생을 살고 아이와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 기뻐하고 축하하면 아이는 괜찮은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난 셈이다. 축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이와 함께 살아갈 마음이기에 그것이 팔자이고 주위의 사람들이 축하하면 아이는 축하받으며 그들을 믿고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
모든 아이가 자폐로 태어나면서 백일이 되면 (약 3개월) 자폐 껍질 속에서 자폐의 껍질을 벗고 공생기로 들어간다. 거친 환경에서는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자폐 껍질을 영원히 벗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새들이 환경이 나쁘면 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곯아버리 듯이 말이다. 자폐기 약3개월이 지나고 이후 공생기가 시작되고 이 기간이 4개월에서 18개월까지이다. 공생기부터 어머니와 관계가 새롭게 시작된다.공생관계가 시작되는 그날이 아이의 백일이다. 아직까지는 세상에 혼자서 살면서 전혀 불편을 모르고 살다가 자폐속에서 나와야 할 때 외부 세상이 냉정하면 그대로 아이는 자폐 속에서 나오지 않으면 되었다. 일종의 방어이다. 외부 세상은 아이를 길러주는 대상이다. 공생기에 아이는 자신을 양육할 사람과 완벽하게 밀착된 관계가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사랑과 보호를 받음으로 양육하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애착형성이다. 애착형성을 위해서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생리적 욕구와 심리적 요구에 지체 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면 된다.
안정애착을 이루는 원칙은 알면 너무 간단하고 쉽다. 안정애착으로 양육자를 믿고 의지하게 되면 아이는 믿음과 의지로 양육자에게서 떨어져 나가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시도 한다. 18개월에서 36개월 사이에 완벽한 독립을 이루면 아이는 에디프스 갈등기를 맞는다. 이성부모를 연인으로 생각하는 시기로 이성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을 때 동성부모와 동일시하고 즉 동성부모를 모방(동일시)하고 동성부모처럼 행동한다. 공생기에 충분한 밀착감을 아이에게 느끼게 해주지 못했다면 아이는 불행한 느낌 속에 격리 개별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왜냐면 공생기를 불행하게 지낸 아이는 격리 개별화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므로 분리독립하지 못하며 에디프스 갈등기 (37개월 ~ 60개월)도 의미 있게 보내지 못한다. 공생기를 원만하게 보내지 못한 아이는 청소년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으면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우울증을 갖게 된다. 우울증은 진화적 적응을 가장 잘 했기에 생긴 것이다. 대부분 우울증은 공생기 (4개월 ~ 18개월) 를 외롭게 보낸 결과이다. 그 후 격리 개별화기에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의존성과 연관된 경계성 증후군을 갖게 된다. 경계성증후군은 격리개별화를 이루지 못한 청소년이 대상에 대한 의존적인 사랑의 욕구로 도둑질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가출을 하고 친구와 싸우고 해야하는 공부는 안하고 전자오락에 빠지곤 하는데 이는 의존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고 의사소통이며 이것 역시 12세 이후 노출된다. 그 후 에디프스 기를 잘못 보내면 청년기가 되어 자기애착증이나 신경증을 앓는다.
왜 소세지의 끝을 잘랐느냐?
왜 아깝게 소세지의 끝을 잘랐느냐? 고 남편이 묻자
아내가 대답하길 “글세 어머니께서 늘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자 장모님이 대답하길 “그것은 나의 어머니께서 하셨던 방법이라네”라고 했다.
그러자 할머님이 대답하길 “그래야만 냄비에 집어넣을수 있었지”
이상의 이야기는 가족의 각본 이야기이다.
문화적각본과 가족의 각본이 많은 세대를 거쳐간다.
사람의 행동은 할머니의 성인 자아상태나 양육자의 부모자아상태, 아버지의 아동자아상태등을 닮은 것이다.
한 인간의 부모자아상태에서의 부모자아상태는 대부분 조부모들일 때가 종종있다.
우리부모는 유전과 환경 모두를 제공하기에 부모가 몽땅 자녀를 만드는 것이다.
날씨가 우리가 느끼기에 따뜻하거나 차거나, 온화하거나 거칠거나 도움이 되거나 해롭거나 한것처럼 자녀에게 부모는 날씨이기에 부모는 날씨를 제공하고 그것이 따뜻하거나 차거나 온화한 정서적 분위기를 느낀다.
어떤 부모는 긍정적 쓰다듬기를 하면서 건설적 각본을 갖도록 격려하고 어떤 부모는 파괴적이거나 비효율적 각본을 갖도록 격려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각본을 자녀에게 전해주어도 좋은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각본을 평가하는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죽음이나 유기로 부모를 잃었을 때 잃은 부모를 대체할 부모를 갖지 못하는 경우 아이들은 불안전한 자아상태를 갖게 된다.
니체는 사람들이 좋은 아버질 갖지 못할 때 상상의 아버질 창조하게 된다고 하였다. 대체로 그 상상의 아버지가 하느님이고 부처고 마호멛이다.
그 상상의 아버진 잃어버린 아버지 보다 좀 더 완전한 부모이다. 결점이 없으며 모든 욕구를 채워 줄 수 있어 모든 면에서 이상적이다. 이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 기준에 맞춰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불완전한 부모자아상태는 아동자아상태에서 계속 잃어버린 부모를 찾을 것이며 배우자, 상사, 목사, 친구와 같은 다른 성인들, 심지어 자신의 아이들로부터 부모역할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갖는 모성이 생득적인 것은 아니다. 짐승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자신의 부모로부터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도 아기처럼 울고 싶다. (늙으면 애 된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러시아워에 걸려 어느길로 가든지 30분이상 지체 된다고 표지판이 알려준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갈비뼈가 띄끔띄끔 쑤시기 시작하더니 자동차 계기판에 있는 시계를 보니 1분에 최소한 세 번씩은 쑤시는 것 같다. 아파서 울고 싶은 것인지, 울고 싶어서 더 아픈 것인지 모르겠다.
울고 싶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이 아프다고 아기처럼 울고 싶은데 이 이야길 할 사람이 없는 것이 너무 슬펐다. 어제는 운전하면서 여동생 강숙이한테 이러이러하게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오늘은 약국친구한테 전화를 하니 “네가 살기가 힘든가 보구나! 큰병아니니 걱정마라”고하기에 “네가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다 안다”고 해서 순간이나마나 둘이 크게 웃었다.
퇴근길이 막히면 갈비뼈가 쿡쿡 쑤시는 통증이 심한 것 같은데 몸이 평상시 스트레스에 견디다 견디다 길까지 막히면 통증으로 전환이 되는 것 같다. 흔히 있는 두통이나 배가 아픈 정신 신체 질환도 아니고 이것이 큰병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건강 염려증도 아니고 나는 즉각적으로 나도 모르게 제 3의 통증으로 나타난다. 이 통증을 견디려니 길이 막히는 것도, 스트레스 받는 일도 다 잊어버린다. 이 아픈 통증만 신경쓰면 된다. 내 정신을 간단하게 통일해 버린다. 그러면서 누군가 붙들고 아기처럼 울고 싶은 내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기처럼 울고 싶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를 붙들고 울었듯이 그렇게 울고 싶다, 늙은 여자가 스믈두살 엄마를 붙들고 우는 아기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는 물론 없다. 상상의 엄마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기는 내 속에 있다. 그 아기가 울고 싶은데 붙잡고 울 엄마도. 아기를 껴안아 주며 울음을 받아줄 엄마도 없어서 슬픈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전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부분으로서의 아동자아 상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독일에서 태어난 펄(1893)이 주장한 부모자아상태와 아동자아상태와 성인자아상태 중 아동자아상태인 것이다.
늙으면 애 된다더니 늙은 애가 되어 어제는 오른쪽 갈비뼈가 아프다고 울고 오늘은 왼쪽 갈비뼈가 아프다고 울면서 오다보니 집에 다왔고 통증도 서러움도 시간이 다 해결해 주었다.
내 마음속에는 항상 사랑받고 싶은 아기가 있다. 울며 떼쓰면 받아줄 엄마가 그리운 것이다. 아기가 삐지면 얼른 달려가 유치한 방법이라도 제시하면서 풀어주는 엄마가 그리운 것이다. 늙은 할머니 속에 아기가 살고 있다. 아기였을 때 삐지면 받아주는 엄마가 없었기에 크지 못한 아기가 있다. 28개월 된 아기는 엄마가 달래주는 것이 좋아서 툭하면 삐지거나 삐진척하고 엄마가 달래주면 신이 나서 새로운 관계 맺는 법을 배우며 삐지는 놀이를 한다. 아이는 놀이를 통하여 성장한다. 삐지는 놀이를 싫컨해야 커서도 아기처럼 울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든이 되어서도 삐지고 울고 누가 달래줄 사람이 없나 찾게 된다.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손녀가 세 살인데 할머니가 세 살이네.
한 때 묵은지가 인기있는 메뉴인 적이 있다. 아직도 두부와 같이 먹는 묵은지가 인기가 있고 고등어조림에 묵은지와 같이 끓이면 묵은맛이 고등어의 비린맛을 없앤다. 묵은지는 특히 고등어조림이나 생두부와 같이 있을 때 궁합이 맞고 맛이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낸다. 묵은지에서는 겉절이나 배추김치의 원맛을 찾을 수 없고 퀴퀴하면서 그리운 깊은맛을 준다. 그러나 묵은지 맛을 아는 사람만 좋아하지 3년이나 최소한1년 묵은 묵은지맛을 모르는 사람은 썩은 김치맛이다. 김치만 묵은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감정에도 묵은 감정이 있다. 묵은 감정이 새로운 사건에 접목되면 자신에게 묵은 감정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은 현재의 사건이 묵은 감정과 융합되어 다르게 보일 뿐이다. 묵은 감정은 지금의 현실의 눈으로 보면 맞지가 않는다. 묵은 감정이 현실을 희석해버리거나 아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게 된다. 현실에서 아주 동떨어질 수 있다. 과거의 묵은 감정을 다룰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그 상황에 부적합하게 보이는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저녁에 TV를 보고 있을 때 우울하고 불안해한다. 그녀는 우울감의 근원을 찾아보기 위해 혼자 조용히 감정의 근원을 되짚어보았다. 남편의 TV보는 광경은 무엇을 자신에게 상기시켰는지? 전에 이처럼 느꼈던 때는 언제였는지?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고 정신질환을 앓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 그녀는 우울했고 공포감마저 느끼곤 했다. 이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스러웠던 묵은 감정을 이해하고는 이제 그녀는 과거 해묵은 감정을 재생하지 않고 TV보는 남편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 묵은 감정을 다시 융합하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반응을 배우게 되었다. 묵은 감정이 지금 여기에 작용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묵은 감정이 지금 여기에 작용하는 것이 노이로제이다. 묵은지처럼 어릴적 배운맛은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어 음식의 맛을 바꾸듯이 묵은 감정이 삶과 함께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우울하고 불안할 필요가 없는데 우울하고 불안했던 것이고 묵은감정없이 편안하게 보도록 묵은 감정을 깨닫는 것이 팔자를 고치는 길이다.
정신이 바뀌어야 말이 바뀐다
서로 다른 것이 둘이 만나면 충돌이 생기며 그것이 전쟁이고 전쟁후에는 문명이 발생한다. 문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지구별과 금성이 부딪히면 굉장한 충격이 있을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면 저들은 모든 것이 다르기에 충격을 받고 갈등을 해결하는데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보낸다. 동서양이 만난 곳에서는 문명의 충돌은 전쟁을 일으켰으나 문명의 충돌이 일어난 곳에서는 문화가 더더욱 빛났다. 동서양의 문화가 만난 터키의 이스탄불과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난 스폐인의 문화가 얼마나 빛났던가?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만남, 이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만남에는 다른 것이 있기에 충돌이 일어난다. 충돌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으로 승자의 문화가 우세하지만 패자의 문화도 흡수된다.
문화가 다를 때 다른 것을 인정하고 경계를 분명히 하여야 견딜 수 있다. 다른 것을 나쁜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보기가 쉬운데 그렇게 되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우리말에서 가끔 사람들은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어휘를 잘 못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속에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우리의 정신이 바뀌면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것과 저것이 틀리지요? 라고 흔히 사용하므로 한국말을 배우는 다른 언어권 사람들에게 혼돈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틀리다 라고 말해놓고도 다른 것으로 인식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만물 모든 것이 다르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할 때 충돌하지 않고 새로운 문화가 생기고 그 문화의 꽃이 찬란하고 아름답다. 가족 체계에서도 작게는 부부간에 넓게는 원 가족 간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라는 것이 아니고 다르다고 보면 된다. 부부체계에서 특히 평생을 살아도 다르니 틀리다고 보지 말고 다른 것을 다르다고 인정해 버리면 된다. 그러면 싸움은 끝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무의식 속에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둘이 같지않은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한 우리는 나와 같지않은 것을 틀리게 인지할 수 밖에 없고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신에서 무의식의 틀이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같지않은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의 두 번째 수필집 “그래도 당신과 나는 다를 뿐이다”에서 부부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일심동체가 되지않고 오히려 다르고 다른 것을 인정하는데서 기능적 부부관계가 시작된다는것을 강조했다. 다른것이 틀린것이 아니라 같지않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상대방을 받아 들일 수 있고 관계가 소통된다.
팔자를 고칩시다.
아이가 말을 안들을 때 우리는 애들은 맘대로 안 된다고 하고 어른 맘대로 안 되는 그 원인이 아이에게 있는 것으로 단정한다. 그래서 어른 입장에서 보면 말썽부리는 자녀가 참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어머니와 자식관계는 자녀는 전혀 선택권이 없는 어머니의 독선적 관계다. 그러한 관계에서 어머니가 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결함에서 생겨난 잘못된 어머니의 모성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 경우이다. 이 세상 자녀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자녀는 없다. 그런가하면 부모도 낳고 싶어 낳은 것이 아니라는 부모도 있다. 대체로 그런 엄마는 아이를 잘 기르지 못하는 엄마이고 일반적으로 남편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다. 남편과 관계가 좋다면 자녀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가 부모의 참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만 자식 된 도리를 하라고 강요하는 부모가 있다. 이는 부모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의 역할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모의 역할을 알려면 나는 현재 어떤 부모인가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부모인가를 알기위해서는 내 아이가 되어 보는 것 이다. 다시 말하면 바람직한 부모가 되는 길은 말썽부리는 아이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는 아이들 같다. 어린이 같은 부모가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으며 어른도 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부모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자녀가 말썽을 부릴 때 역할을 바꾸어 역할극을 해본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T-A이론이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매를 때리면 자녀의 잘못된 행동은 지속된다. 행동주의 이론으로 보면 이것은 보강이다. 매를 맞으려고 한 자녀의 행동에 매를 때렸으니 자녀는 잘못된 행동을 한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잘못해도 때리지 않으면 더 기고만장해서 잘못 할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잘못해도 안 때리면 매 맞고 싶은 아이의 괴로움은 배로 증가하기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매 맞을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옳지 않은 행동을 스스로 하고도 매를 맞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기에 그 고통을 만들어 내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점차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같은 잘못을 할 때 부모가 잔소리를 하나 안 하나 보면서 부모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아이는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잘못된 행동을 그만둔다.
그러나 아이의 무의식의 틀 속에 때리고 맞는 기능이 이미 있다면 때리고 맞는 관계가 없어지지 않는다. 만일 때려서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때려서 맞는 만큼 아이가 올바로 자랄 수 있다. 때려서 된다면 때리지만 잘 자란다 하더라도 아이가 잘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 매를 맞지 않았다면 더 잘 자랄 수 있지 않을까?
매를 맞아도 매만 축낼 뿐 고쳐지지 않으면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서로 고생만 하는 것이니 때릴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도 매질을 하는 것은 화가 나서 감정을 발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명목상 교육적이라고 찍어다 붙이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매질을 그만 두기로 할 경우는 이러다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때리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아이를 포기하는 것 이다. 자신의 감정하나 통제 못하는 미숙한 부모의 성격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아이들보다 잘한다고 착각하고 부모노릇이라고 하는 것이니 참 안타깝다.
부모는 자녀의 무의식의 틀속에 때리고 맞는 관계의 기능을 애당초 넣지 말아야 한다. 자녀가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폭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도 그의 부모에게서 그러한 관계기능을 무의식의 틀속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의 틀을 지속적인 인내로 깨닫고 버려야 한다. 무의식의 틀을 바꾸는 것이 팔자를 고치는 것이다. 팔자를 고치면 엄마도 아이도 행복해진다.
걱정이 많은 부모
마흔이 넘어 장가간 아들이 겨우 며칠을 전화 안 했다고 화가 난 부모가 있다. 왜 화가 났냐고 아들이 물으니 걱정이 되어서 불안했다고 하는데 무엇이 걱정이 되느냐고 또 물으니 온갖 것이 다 걱정이 된다면서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부모에게서 떨어져나가고 싶은 아들은 내가 마흔이 넘어 한가정의 가장인데 뭘 걱정하시냐고 귀찮다는 식으로 이야길 하니 부모는 며칠만 전화가 안 되면 걱정이 된다며 부모마음을 못 알아준다고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것은 아들이 떨어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감지하고 또 걱정을 하는 자신의 본심을 아들한테 들켰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귀뀐 놈이 화내는 것이다.
이 부모는 진정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아들의 끈을 붙잡고 있는데 너무 멀리 가서 며칠만 안보이면 아들을 붙잡고 있는 끈이 끊길까봐 걱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안할까? 아들이 끈을 끊어 아들에게서 내버려지게 될까봐 불안한 것이다. 유기불안이다. 보통은 덜 떨어진 아들이 아직은 젖이 덜 떨어진 부모에게서 유기될까봐 불안해하고 이것이 분리불안인데 이는 반대로 다 성장한 아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말은 아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고 하지만 실은 아들이 부모를 버릴까봐 자신을 걱정하면서 아들에게 걱정이 된다고 부모랍시고 큰소리치고 매달리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덜떨어진 아들은 잘 크면 부모가 버릴까봐 성장하지 않고 딴 길로 나간다. 그래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낙제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직업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결혼도 못한다고 하는데 안하고 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꾸 문제를 일으키며 부모 옆에 붙어서 부모를 걱정시킨다. 그러면 부모는 걱정하며 불안하여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붙잡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모는 다 큰 아들을 옆에 두고 생활비, 사업자금, 유흥비 대주며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가 능력도 없으면서 잘 살고 있는 아들을 걱정하는 것은 반작용으로 아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아들이 문제가 있을 때 부모는 도와줄 능력이 있는가? 아들을 도와줄 능력도 없는 부모는 아들 걱정이 자신의 문제인 것을 깨닫고 화내지 말고 자식 걱정을 끊는 연습을 해야 한다. 능력도 없는 부모가 잘 살고 있는 자식을 걱정하는 것은 자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기 걱정이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분리불안이다. 이것을 본인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은 병이다. 쓸데없는 짓이고 오히려 걱정이 독이 되어 자식을 병들게 할 수 있다. 부모가 불안해서 걱정을 하면 걱정하는대로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자녀가 밖에 나가 다칠까봐, 남들과 싸울까봐, 직장을 잃을까봐, 시부모 때문에 부부싸움할까봐 걱정하며 아들에게 자꾸 물으면 내가 싸우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싸움을 걸 수도 있다. 걱정은 걱정거리를 만든다. 걱정은 걱정하는 사람의 불안이 전치되어 주위를 오염시킬 수 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은 원래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건드려지게 하면 안되고 잘 다둑거려 가만히 있게 하여야 한다. 나의 무의식에 잠자고 있는 불안을 섣불리 건드려 치료할 것도 아니면서 성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공연히 남의 걱정하지 말아야한다. 걱정의 맨 밑바닥엔 공격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분노와 함께 유기불안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쓸데없이 다 큰 아들이 떨어져 나갈까 걱정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부모로 부터 유기될까봐 걱정하던 그 분리불안이 있기 때문이고 이 분리 불안으로 부모대신 아들을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장성한 아들이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는 아들의 할머니가 할머니의 아들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다. 그 때 만들어진 것이 불안자리이고 대부분의 피조물이 갖는 미숙한 정신이다.
가족무의식이 만들어낸 거식증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의외로 아이의 밥먹는 것 때문에 고생을 하고 아이가 밥을 안먹는다든지 편식이나 과식으로 걱정을 많이 한다. 또 고기를 안 먹으려 한다든지 야채를 안먹으려한다고 신경을 쓴다.
밥을 잘 안 먹으려는 아이에게 밥을 먹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자녀에 대한 생각을 우선 바꾸면 된다. 밥을 잘 안 먹는다든지, 밥을 안 먹으려고 하는 아이라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밥을 잘 먹는 아이라는 생각을 갖고 대한다. 밥 때가 되면 밥 먹으라는 말을 한 번만하고 절대 두 번 하지 않아야 한다. 두 번 하면 두 번을 말해야 듣는 아이가 된다.
필자가 고급레스토랑에서 웨이터에게 18개월 된 필자의 손녀를 위하여 빵을 추가로 주문 할 때다. 나는 손녀가 듣도록 천천히 손녀의 눈도 보며 웨이터에게 부드럽게 구워서 더 갖고 오라고 말했을 때 아이엄마가 다시 통역을 하는 것을 제지시켰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두 번을 꼭 이야기해야 듣는 아이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밥먹으라고 여러번 하여야 밥 먹으러 오던 아이는 한번만 밥먹으라고 하면 오지 않고 있다가 식사시간이 다 끝나고 이상하다 여기며 늦게 나타날 수 있다. 이때 늦게 나타나 밥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아야 한다. 밥을 주면 오라고 할때 안와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또 안먹으면 먹여줄 것을 기대하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주지 말고 다음 밥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밥때가 되면 한번만 밥 먹으라고 하고 다른 간식을 주지 않으면 아이는 밥을 먹을 수밖에 없게 되고 모자간의 고집전쟁은 끝이 난다. 어떤 상황이든 밥을 거부하는 관계는 이 가족의 무의식이 만든 관계이다. 상담을 받으며 아직까지 익숙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롭게 낯설은 관계로 즉 알아서 밥 먹는 관계로 만든다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가족 무의식을 고치기 싫어 자녀도 부모도 말을 안 듣는 경우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면 어느누가 서로 하기싫은 전쟁을 하겠냐고 할것이다. 무의식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런 관계가 좋아서 만든것이다. 나의 수필집 3권“저기요 우리집에 속 썩이는 아이가 있는데요!”에 나오는 말 안듣는 미국의 입양소녀 혜원이도 혜원이 양모가 외로워서 한마디 할 것을 세 번씩 하다 보니 세 번할 때까지 기다리는 말 안듣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밥 뿐 아니라 아이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도 이런 가족의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익숙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가족의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상담을 받으며 가족 무의식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해결의 우선이고 쌍방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
가족 무의식
모든 사람은 문제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를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가족은 문제를 갖는데 문제를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가족이 문제를 가질 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가족평가를 해야 한다.
가족을 이해하고 평가할 때 가족구성원간 상호작용하는 거래형태와 특성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 구성원간에 참는 능력 수준과 자기 방어를 사용하는 환상의 내용을 평가해야 한다. 가족원은 서로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무의식적 약속을 한다. 가족원끼리 서로 약속을 하는 것이지만 그 약속이 무의식적이기에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가족원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을 가족 무의식이라 한다.
가족 무의식은 부모자녀관계에서 경험이 내면화 한 것이다. 자라면서 부모의 이미지가 느낌으로 마음 속 깊이 있다가 생각으로 떠올라 이상한 행동을 하게한다. 아이의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느낌을 표현 하는 바로 그것이다. 가족 무의식은 이 가족이 자녀를 돕는 가정인가 방해하는 가정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많은 경우 사실상 서로가 서로를 버리지 못하도록 또 버리고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서 자녀가 자율성을 갖고 독립되는 것을 막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족의 자녀는 떠나지 못하고 부모 곁에 있다. 성장하고 발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삶이 무엇 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뚜렷한 설계도 없이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세상만사에 능통한 것처럼 간섭하고, 삼신할머니처럼 장래를 점지해주려는 것이 오늘 날의 부모상이고 가족무의식이다.
부모가 고집을 부리면 자녀도 자신의 고집의 노예가 되어 서로 괴롭히면 고집 때문에 치러야 하는 값이 얼마인가? 부모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버리면 자녀 역시 고집 부리지 않고 버릴 것이다. 고집의 시작은 부모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집을 버리고 부모는 자녀가 해달라고하면 해주고, 하기 싫다고 하면, 하고 싶을 때 하라고 내버려 두면 된다. 그러면 아이는 고집부릴 필요가 없어진다. 무엇을 하라는 말을 안 하고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된다.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부모요. 해달라는 것을 해주는 사람도 부모다. 부모가 하라고 하지 않고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부모 자녀 관계의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면 아이가 버릇없는 천하무적 지가 제일 잘난 줄 알텐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는 부모가 많다. 해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한다. 이런 부모는 걱정을 해야 아이가 잘된다고 믿는 부모다.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며 키웠는데 오늘날 아이는 왜 그런가? 처음에는 아이의 요구가 하늘을 찌를지도 모른다. 부모의 인내심을 테스트 할 것이다. 이때 부모가 지면 안 된다. 자녀와 경쟁에서 지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에서 지면 안 된다. 자녀와 경쟁에서 지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테스트 하는데 부모의 사랑으로 지면 안 되고 이때 자녀의 요구를 잘 들어주고 지는 것이 사랑이다. 한 달만 참고 견디면 더 참아야 할 필요 없이 고집부리는 사람 없고 말 안 듣는 사람 없는 가족이 될 것이다. 가족 무의식을 깨닫게 되고 무의식을 고치는 것이 팔자를 고치는 것이 된다. 부모의 팔자도 아이의 팔자도 한꺼번에 고치는 것이다.
엄마는 신(神)이다.
“어디 팔자 도망가서 살겠습니까? 결혼은 팔자대로 하게 되는 것이므로 팔자대로 만나게 됩니다.” 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다 큰 어른이 하는 결혼도 두 눈 크게 뜨고 하면서 팔자한테 져서 팔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하니 그 팔자는 무엇인가? 팔자란 놈이 있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팔자는 나의 대상이 만들어준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나의 인생경로이다. 사람들은 보통 팔자를 내가 만들어 질 때 동시에 삼신할머니가 만든 인생경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 팔자는 나를 점지한 삼신할머니가 만든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내게 주신 내 수호천사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 수호천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신(성령)일 것이다. 나는 그 성령이 본능과 양심을 지배하는 한 단계 높은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괜찮은 일을 했을 때 성령이 인도했다고 믿는다. 그 성령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나 자신이고 내 자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다. 의식은 생각을 만들어내고 무의식은 느낌을 만들어낸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느낌이 팔자이다. 의식이 만들어낸 생각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느낌보다 힘이 약하다. 그래서 무의식이 만든 느낌대로 행동하기 쉽다. 그 느낌은 누가 만들었을까? 느낌은 대상관계 속에서 대상이 느끼는 대로 만들어진다. 엄마가 아이의 대상이고 엄마가 느끼는 대로 아이는 만들어지고 변한다. 엄마가 느끼는 대로 아이의 팔자는 좋은 팔자가 되기도 하고 힘든 팔자가 되기도 한다. 엄마가 아이를 좋게 느끼면 좋은 팔자를 가진 사람이 되고 엄마가 아이를 귀찮게 느끼면 귀찮은 사람이 된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스럽게 느끼면 아이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고 얼굴에 사랑스러움이 있다. 엄마가 아이를 못생겼다고 보면 미운아이가 된다. 그래서 사랑받는 팔자가 되기도 하고 미움받는 팔자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고귀함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팔자가 되기도 하고 지지리 한 많은 팔자가 되기도 한다. 엄마가 떡 주무르듯이 느끼는 대로 아이는 만들어진다.
그래서 엄마는 창조주다. 왜 창조주가 사람을 직접 만들지 않았을까? 사람 만드는 것이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어렵기 때문에 천지창조 때도 마지막 날에 제일 늦게 겨우 한 사람을 만들었고, 모든 인류를 똑같이 만들 수는 없고 신이 되어서 힘든사람, 외로운 사람, 사악한 사람, 나쁜 사람, 아픈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 등등 을 만들자니 공평하지 않고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니 창조주는 자신의 창조능력을 각각의 그 사람의 엄마에게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쉬우면 신이 다 만들었을 것이다. 어려우니 우리 피조물에게 창조능력을 이양한 것이다. 신도 자연속에 있는 창조의 기운으로 이 세상을 만들었듯이 사람들도 이미 원초부터 자연속에 있는 창조의 기운으로 생명을 만든다. 그러니 모든 엄마는 모신(母神)이고 창조주이다. 엄마는 내 아이의 신이고 내 아이의 창조주다. 그래서 모든 엄마는 神이다.
“참 좋구나!”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물과 물 사이가 창공이 생겨 갈라져라.” 하시자, 갈라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어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라.” 하시니, 낱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났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렇게 되어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다음날, “바다에는 고기가 우글거리고, 땅위 하늘 창공아래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 여자를 만든 다음, 아담에게 데려왔다. 아담은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했다. 우리도 우리의 아이를 만든다. 하느님이 창조의 기운이 이미 있는 자연 속에서 말씀으로 창조 하듯이 우리도 창조의 기운이 있는 자연 가운데 아이를 하나하나 만들어 간다.
임신된 순간에는 그 아이의 성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 태아에게 엄마가 행복한 느낌을 갖느냐 아니면 불행한 느낌을 갖느냐, 그리고 태어난 후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보는 대로 만들어진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들고 보시니 참 좋았다 라고 했다.
우리 엄마는 아이를 만들고 보니 참 좋다 라고 하는가? 보니 참 좋고 행복하다면 언제까지 좋고 행복한가? 하느님은 자녀가 어버이를 떠나 짝과 한 몸이 될 때도 보니 참 좋다 라고 했다. 그러한 부모도 물론 있다.
하느님이 사람을 왜 만들었을까? 이 세상을 다 주기 위해서 만들었다. 부모는 자녀를 왜 낳는가? 우리가 만든 행복한 가정, 행복한 세상을 다 주기 위해서 자녀를 낳는다. 자녀를 대를 잇기 위해서 행복한 세상도 못 줄 것이면서 억지 춘향 격으로 낳으면 안 된다. 사람은 애 낳는 틀이 아니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다 만들어 사람에게 줄 준비가 되었을 때 아담을 만들었듯이 아이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줄 준비가 된 다음 낳아야 한다.
준비가 된 부모가 낳는 자녀의 팔자는 행복한 팔자이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부모가 낳은 자녀는 불행한 팔자를 갖는다. 사주팔자는 출생 년, 월, 일, 시가 결정 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녀를 만들면서 자녀에게 전달되는 무의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무의식이 뭔지 모르니까 무엇인가에 찍어다 붙여야 되니까 출생 년, 월, 일시를 찍어다 붙여 팔자라고 했다. 부모가 자녀를 보고 “보니 참 좋구나.” 하는 느낌으로 키우면 자녀의 팔자는 좋은 팔자이다.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태초의 팔자는 원죄도 없는 좋은 팔자였다.
걱정이 팔자다.
팔자를 알아야 팔자를 고치지!
팔자가 있는 것인가?
우리 속담에 걱정이 팔자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속담이다. 그런데 뜻도 다 알까? 우리나라 사람 보고 팔자가 있는 것 같으냐고 물으면 아마 거의 팔자가 있다고 대답한다.
태어나기 전부터거나 아니면 태어나는 순간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신이거나 귀신이거나 자연이거나 어떻든 나보다 힘 있는 타인으로부터 팔자를 받거나 팔자가 정해지는 것으로 느낀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인간이해에 관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 팔자라는 놈이 우리가 가진 무의식이고 그 무의식속에 팔자의 틀이 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TV 드라마에 대본이 있어 연기자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내조의 여왕이 되기도 하고 이혼을 당하고 쫄딱 망하기도 하고 그 대본대로 움직이는 것 같이 각자 인생 대본이 있어 그 대본대로 각자 자기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 대본이 어떤 것이고 그 대본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다르다. 일반인과 인간의 정신에 관한 공부를 한 사람과는 대본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그렇지만 어떻든 우리 각자는 어떤 대본을 작가로부터 받았는지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내가 인생연기를 어떻게 할런지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연기자가 쪽대본이 아니라 전체 대본을 미리미리 받아야 알아서 잘 하듯이 우리도 대본을 미리 알면 알아서 잘 할 수 있고 고칠 수도 있다. 고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고치면 내 인생이 편할 수 있는데 못할게 무엇이람.
어떤 사람이 알에서 막 깨어난 독수리 새끼를 주워와 닭장에 넣고 키웠더니 닭처럼 순하고 땅에 떨어진 모이만 주워 먹는 닭이 되었다. 이 독수리를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산꼭대기에 올라가 날려보아도 땅에 내려앉아 닭 행세만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시도에서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한다.
우리도 내가 가진 무의식속에 있는 각본대로 닭 행세를 할 수 있으나 독수리가 되기위한 시도를 여러 번 하므로 독수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진 각본은 내게 마술을 거는 주문이다.
이 주문은 물론 어렸을 때 가까운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느낀 느낌이 내 느낌이 되어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나를 조정하게 된다. 내 엄마가 나를 걱정했거나 걱정하는 느낌을 내게 가졌더라면 내가 근심하는 각본을 갖고 그 근심은 나를 조정하며 그 걱정이 내 현실인 인생이 되고 그 인생을 내 팔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걱정하는 각본을 갖고 있으면 걱정하는 팔자가 된다. 그래서 걱정이 팔자라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이미 500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수리는 맹금류답게 자기 자신에게도 독하기로도 유명하다. 서른살이 넘어 늙어서 살찌고 털은 덥수룩하고 발톱은 늙고 꼬부라져 그 발톱으로는 도저히 참새새끼하나 못 잡는 늙은 독수리는 어느 순간에 자신의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꼬부라지지 않고 날카로운 새 발톱이 나길 기다리고 무거운 날개 때문에 날지 못하니 새털 같은 가벼운 털로 털갈이를 하고 제2의 새 인생을 시작한다고 한다. 사람보다도 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독수리는 팔자를 고치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떠한가?
걱정을 많이 하며 사는 사람은 걱정을 안 하는 편안한 생활보다는 걱정을 하는 괴로운 생활을 더 좋아 할 수 있다. 아이를 위해 걱정을 하는 것이 걱정을 안 하는 것보다 어머니다운 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하고 보람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싶으면 걱정 할 일이 생기고 그러나 걱정을 안 하면 걱정 할 일이 없어진다.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걱정거리가 혼자서 솟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은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이 걱정이 무엇인가?
걱정은 화를 부르고 화는 소리 지르게 하고 또 따라서 매가 따라오고 매는 미움을 부르고 미움은 관계를 끊게 하고 좌절하게 만든다. 이렇게 걱정은 부정적 관계를 한 단계 한 단계 상승시키며 인간을 파멸시킨다. 걱정은 안 하는 것이 좋다. 오죽하면 예부터 걱정이 팔자라고 하였겠는가? 걱정을 안
무의식은 의식보다 깨어있다.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북쪽으로 난 창문에 비추이는 가을 하늘의 구름이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답다.
머그컵에 담긴 향기로운 커피도 마실 시간이 아까워 그대로 내버려둔채 밖으로 나섰다.
저 구름이 흩어져 가버리기전에 얼른 쫓아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뭉개구름이 어느새 새털구름이 되고 또 남이섬 가까이오니, 또 다시 티벳의 고원에서 본 아주 커다란 뭉개구름이다.
남이섬에서 건너다본 강원도 골짜기는 그림같이 아름다워 강가를 따라 가보니 멀리서 본 그것이 아니었다. 상상속의 그림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혼 전에 본 아내와 결혼하고 난 후 아내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결혼전에 그사람의 모습을 못보았던 것일까?
나는 결혼한지 40년이 지났다. 우리부부는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잘지내지 못한다.
우리부부 두 사람이 기본은 서로하고 있으니 잘 지내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두사람 모두 놀지 않고 돈 벌고, 건전하게 생활한다고 할까? 사행심을 일으키는 도박도 안하고 도덕적으로 바람안피고 거짓말 안하고 사치낭비 안하고 살았으니 기본은 한것 같다.
그러나 가끔 서로 가진 특질을 비난하며 상처를 살짝살짝 주기도 했다. 성생활이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다느니 또는 사람이 지저분하다느니 하면서...
또 깊은 대화를 하다보면 분석적이고 비판적이고...
특히 나는 남편이 더럽게 밥을 먹고 지저분한 것 때문에 평생 구박을 많이 했다. 한편 많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전에 이것을 알았던 것이다. 데이트하던 시절 밤늦게 만났는데 그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나타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고무신이 검은 고무신이 아니고 흰 고무신이 때가 묻어 검은 고무신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훗날 내 시어머니가 되신 그의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귀찮아서 고무신을 닦지 않으셨구나 하고 너그럽게 봐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새까만 고무신을 아무렇지 않게 신고 나온 지금의 내 남편이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시어머니에게 투사했다. 나의 무의식은 그 사람이 내 기준에 의하면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콩까풀이 씌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끔 나의 느낌을 눈멀게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을 결혼 전에는 몰랐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여자는 결혼하고 나서보니 시가쪽이 경제적인 빚이 많고 매우 힘든 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은 결혼 전에 은행종합신용보증서를 요청했을때 남자쪽에서 소식을 끊은 일이 있었다. 그 후 그런 서류까지 요구하니 자존심이 상할수도 있겠구나하고 없던일로 하고 그냥 넘어간적이 있었다. 그것이 탈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결혼하기위하여 남자의 자존심을 봐주면서 합리화를 했던것인데 무의식은 “뭔가 이상하다”라고 알고 있었다. 또 결혼생활하면서 욕을 잘해 힘들어하는 어떤 아내는 남편이 첫 만남때 대통령을 향해 xxx xxx쌍욕을 하는 것이 좀 남다르고 남자답고 멋있다라는 착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욕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너무 곱게 자랐나? 저렇게 말하니까 멋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욕을 아주 잘하는 남자라는 것을 첫 만남때 알았었다.
결혼해보니 시부모님도 욕을 잘하고, 시누이도 욕을 쉽게 하는 것을 보며 남편이 욕을 잘하는 것이 이 집안의 가풍처럼 보이며 정떨어지게 싫어하고 있다.
무의식이 팔자다.
우리나라는 전국민이 사주팔자의 노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혹자는 나는 사주팔자를 믿지 않는다고 부인할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답답한 일을 당할때는 하느님을 믿던 사람도 부처님을 믿던 사람도 점쟁이한테나 가볼까하고 약한 마음을 어디에든 기대보려한다. 이때 누가 용하다고 하면 돈 아깝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고 쌈지돈이라도 꺼내서 가보면 우선 입구부터가 세련되지 않고 좀 원형적인 인테리어에 마음은 오그라들고 미숙한 어린애처럼 된다. 특히 선거철이면 고귀하시고 위엄 있는 분일수록 또 그분의 사모님들은 하나같이 사주팔자 보는 점집을 찾아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한다. 학문이 높다는 교수도 공부안한 서민도 사주쟁이 말에 귀 기울이고, 현대 학문을 한다는 대학생들도 대학가 앞에 죽치고 앉은 사주쟁이나 사주카페에 줄서서 애정운이나 취업운을 자기보다 무식한 사람한테 의존하려한다. 이러니 어떻게 우리가 전 국민이 사주팔자의 노예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팔자란 4주(株)인 네 기둥에 쓰인 天干과 地支 두자씩 모두 여덟 자를 八字라 하고 네 기둥은 생년월일시의 년 월 일 시 네 기둥을 일컬으며 이를 四株 라 한다. 이 생년월일시의 네 기둥에 쓰인 천간과 지지의 여덟자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니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사람은 사주가 뭔지 팔자가 뭔지 모르면서도 사람에 따라 사주팔자가 내가 태어난 날의 기둥에 쓰여진 여덟 자라는 것도 모르면서 팔자가 있는 것 같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융(C G Jung)이 말한 우리민족의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으로 팔자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 팔자가 개인의 개인무의식인 것은 더더욱 아무도 모른다. 팔자가 궁금하면 개인무의식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지 무슨 글자풀이에 의존한단 말인가. 사주팔자를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은 보지 말고 사는 것이 좋다.
울타리와 공간
아이들은 초등학교 상급학년이 되면서 사춘기로 접어들고 아이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어른의 관심을 받게된다. 이 아이들의 행동이 비행일 경우는 성인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원인을 진단하고 치료책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은 왜 반사회적행동을 하는것일까?
청소년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희망은 부모관심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관심을 다시 조명 받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가정의 해체나 부모사이의 불화가 있을 경우 아이의 정신구조에 아주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 공격적인 생각과 충동이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고, 부모의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삶의 틀을 혼자 떠맡게 된다. 그 결과 충동성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욕구충족으로 자발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되어 불안해진다.
지금까지 초자아의 발달로 발달된 죄책감은 부모의 자아지원이 철수되면 짐이 된다. 실상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무엇을 할 만큼 충분히 힘이 강하지 않기에 순응한다. 이것이 실망의 중립적 상태인데 자아는 희망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환경이 개선되면 다시 희망을 갖고 희망 안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때 반사회적 행동 경향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사람들에게 시간이나 관심 또는 돈 등을 요구하는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도벽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두 번째는 구조적 강력함과 조직화에 대한 기대를 하고 아이가 쉴 수 있고 긴장을 풀며 안정을 느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에 대한 기대를 하거나 또는 강력한 관리를 요구 하는 파괴행동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자아지원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실망의 중립적 상태가 되기 전에 생긴 극도의 불안이나 혼란에 대한 공포를 원상태로 돌릴 수 있는 희망을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갖는다.
컴퓨터 중독>
오늘 9시뉴스에 중학교 2학년부터 컴퓨터게임을 하던 학생이 학교도 중퇴하고 매일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한밤중에 복면을 하고 편의점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사건이 나왔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임상적으로 말하면 컴퓨터 중독이란 아이가 엄마와 대상관계에서 대상결핍이 만든 현상이다. 무슨 뚱딴지 같이 컴퓨터가 좋아서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이지 어떻게 대상결핍이 되어서 그런것이냐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밥도 굶고 학교도 안가고 돈도 잃어가며 비현실의 세계에 빠져 정신착란을 일으키기까지하며 죽게까지 하는 원인이 단순히 게임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독성 성격은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이 가지는 이차적 문제이다. 중독자들의 사고에 의해 나오는 행동은 원시적인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정상을 일탈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중독성 특성을 갖고 있으며 그 특성은 초기 인간관계의 실패에 의한 자구책이다. 인간관계를 실패한 이들의 문제해결은 상실된 양육자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복원해 주는 것이다. 충족 되지 못한 대상 에너지를 다시 공급 받아 대상과 관련된 느낌이 포만감을 갖게 함으로써 대상결핍에 의한 문제로서 나타난 컴퓨터 중독현상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대상관계에서 주도권은 대상에게만 있다. 아이는 다만 환경이 바뀌면 좋아하거나 슬퍼하거나 즐겁거나 할 뿐이다.
나쁜 대상에 의해 양육된 영아는 자폐기, 공생기를 힘들게 괴롭게 보내며 격리개별화기에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에디프스 갈등기를 잘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것이 청소년기에 자폐증, 정신분열증, 우울증을 앓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은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만족스러움에 의한 것이고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도 또한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부족함에 의한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인가 공급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분 또는 괴로운 기분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의 필름에 영상이 맺힌다. 그 영상화된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자신의 느낌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느껴진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의 느낌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갖고 평생 살아간다.
내 브랜드는 내가 지킨다.
내가 내 가치를 만들어가고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명품이 명품을 지키기 위해 OEM 방식이나 로얄티를 대여하지 않아야 진짜 명품으로 오랜 수명을 지킬 수 있다. 에르메스나 샤넬이 루이브똥이나 구찌나 MCM과 차별화 되는 것은 샤넬과 에르메스는 절대 OEM이나 로얄티 대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브랜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다.
내가 브랜드를 지킨다고 할 때 브랜드는 무엇일까?
우리나라가 Korea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삼성이나 현대나 포철이나, LG가 처음에는 값으로 경쟁하다가, 그 다음에는 언제부터인가 질로 승부를 걸다가 이제는 브랜드로 경쟁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삼성TV가 SONY를 앞지르고 애니콜이 노키아를 앞지르고 현대차가 세계5대 메이커가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made in Korea라는 이유로 디스카운트(discount)되어 평가 된다고 하는데 나 자신도 내가 가진 가치보다 평가절하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질도 높이지 않고 브랜드만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질은 당연히 0.1%라도 높이며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브랜드를 지켜야 한다. 브랜드를 지키는 방법은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을 주는 방법은 국가는 국가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가진 것만큼 베풀므로서 위치에 맞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 개인은 고유하고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치가 지닌 위치만큼 행동해야한다.
10여 년 전 나의 남편이 동생들에게서 존경받고 싶은 소망으로 부모님의 유산을 우리는 하나도 갖지 말고 동생들에게 나눠가지게 하자고 해서 아깝지만 흔쾌히 동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남편은 큰형, 큰오빠라는 브랜드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형제들에게서 권위를 갖고 있다. 겉으로는...
국가도 마찬가지다. 5000만 명의 국민이 20,000불의 G.N.P.인 국가가 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세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에 이어 7번째 되는 국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큰 오빠가 브랜드를 지키기 위하여 형제들을 대표해서 성묘에 돈도 내고 만나면 밥값도 내고 제사도 지내야 큰 오빠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옛날 이종사촌언니네 결혼식에 가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어리고 그때는 특히, 남편이 유학생 시절이라 힘들 때 자기네 친형제 결혼식에서 6남매는 가만히 있고 사촌인 내게 그 비싼 호텔 커피 값을 내게 한 후 나는 사촌언니들과 관계를 끊은 적이 있었다. 언니들이 언니노릇을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언니로서 모시기 싫어 관계를 끊었던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20000불의 5000만 인구로서 세계7번째 큰 국가라면 긍지를 갖고 개발도상국을 도와야한다. 우리보다 잘 살던 나라들이 왜 우리보다 못살게 되었는가? 물론 당연히 질도 문제이거니와 브랜드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60년대 우리보다 잘살던 필리핀이 우리나라가 체육관하나 없을 때 장충동에 체육관을 지어 준 것이 장충체육관이고 여기서 대통령선거도 하고 대통령배 농구시합 등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며 유일하게 우리의 실내 스포츠 문화를 이어갔었다.
명품
명품은 가장 고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명품! 여성이면 누구나 명품을 좋아한다고 하면 틀린 이야기일까? 루이비통이 본토 불란서보다도 또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비똥은 국민가방으로 불릴 정도다. 한국의 명품시장은 매년 12%씩 성장하여 2010년에 45억 달러(5조원) 규모라 한다. 가계소득에서 명품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5%로 일본의 4%를 넘어섰다. 명품소비 1위는 미국이고 2위는 일본이다. 1억2000만 인구가 명품의 23%를 소비한다니 한때는 엔고를 무기로 유럽을 누비며 명품을 싹슬이 하여 명품업계를 회생시키더니 그 뒤를 이어 한국이 회생시키고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명품이라는 상표에 매달리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상품의 가치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상표에 매달린다는 뜻이다.
명품중의 명품 샤넬. 한 사람의 여성, 하나의 이름, 하나의 전설, 아우라.
“유행 그것은 나다”라고 불길처럼 나타난 인간 가브리엘 샤넬을 생각해본다. 샤넬이 만들어낸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브랜드 때문에 가짜 브랜드가 생기었다.
정품의 품질은 조악한 싼 물건이 있을 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반상품의 대량생산이 오히려 명품의 희소성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가브리엘 사넬이 내놓은 검은 수트나 인조보석을 상용하고 있다. 이미 사넬의 모조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고 모조품 존재자체가 브랜드 정품의 값어치를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얼마나 갖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들을 위하여 모조품도 인기가 있느냐 말이다. 명품에 대한 모조품은 명품의 인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넬의 상표를 달지 않은 모조품은 이미 우리는 그것이 사넬의 모조품인지도 모르고 일반화하고 있다. 이때는 미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지니지 않은 현시적 낭비가 명성에 버금가는 이유는 그것이 금전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금전적 능력이 명성과 명예에 지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명품이 성공과 탁월한 힘을 입증하기 때문이고 중세나 근대사회의 명가의 명예대신에 오늘날은 돈이 말해주는 세상이 왔다. 돈으로 산 명품이 중세의 명예에 버금가는 능력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치하지 않게 세련되게 자신의 고귀함을 말해준다.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건만 1억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를 찼을 때 그의 명성을 다시 보게 된다. 이것이 명품의 역할이다.
공부하는 이유
동아일보 박상우의 그림일기에서 공부의 목적은 전문성을 얻기 위한 것이고 얻은 후에는 세상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길 읽었다. 공부는 어리거나 나이가 먹었거나 누구나 살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쉽게 말하면 먹고살기 위해서 공부 하는 것이다. 먹고 살 기술을 익히기 위한 것이다. 지역에 따라 따로 공부하지 않고도 먹고 사는 기술을 익히는 곳도 있다. 원시사회는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의 공부는 더더욱 세상 살기 위한 것이다. 공부 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답답해서 못산다. 공부 안하고도 나이 먹을 때까지 잘사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못 알아들어도, 그런 것인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도 그냥 대충 살아가자니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겠는가?
중 고등학교부터의 공부는 적성에 맞고 즐겁게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한 도구적 과정이다. 살자면 도구가 있어야 하기에 우등생은 아니어도 성실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의 공부는 무엇인가?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이다. 멋은 전문적 공부의 산물이다. 멋은 전문가의 특성이다.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가로 키워져야 한다. 별 볼일 없는 음식재료 갖고도 구수한 된장찌개 뿐 아니라 맛있는 푸젼 요리를 만들어 내는 아내는 멋있어 보이고 멋이 있다. 가장 멋있는 사람은 전문적 과학의 세계와 도덕과 철학의 세계를 통합한 사람이다. 특정한 분야를 공부해서 일단 멋있는 사람이 되면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잘하면 멋있다. 일본에 가서 일본어를 잘하면 멋있다. 독일 가서 독일어를 잘하면 멋있다. 디카 동호회에서 작품이 산뜻하면 외모가 지저분해보이던 노인이 멋있는 노신사가 된다. 공부해서 얻은 것은 도둑맞지 않는다. 영원히 내 것이다. 공부한 것을 세상 사람과 나누는 것이 아니다. 공부한 것을 세상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박상우의 말은 틀렸다. 나의 아버지는 공부하라는 이야길 부모가 훔쳐가지 않을 테니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그 때 그 말씀이 장난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공부하라는 이야길 하실 때는 장난처럼 하셨으니까. 어느 분야이든 공부를 하면 맛과 멋을 판정하는 능력이 생기고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모자라는 것이 보이고 그 길로 가다보면 지혜로워진다. 지식과 지혜는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지식이 축적되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디카 공부를 한 삼년 하다 보니 좋은 사진과 평범한 사진을 분별하게 되고 좋은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그는 멋있게 되기까지 부단히 공부를 했음에 틀림이 없다.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새로운 눈이 트인 것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청년의 공부는 환경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넓혀가기 위함이다. 범위가 넓어지면서 생기는 지식이 쌓여서 만들어진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롭고 참 멋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멋을 배우는 것이다. 멋은 낭비 없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이것저것 넣지 않고 맛있는 찌개를 만들고 단 몇 번의 손길로 예쁜 화장을 하고, 고상하고 간결하게 이야기하고 몇 마디 하지 않고 호소력 있는 詩를 쓰듯이. 그러니 경제성이다. 멋을 내는 것은 멋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멋은 맛이다. 사람이 맛이 있어야 한다. 맛이 평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를 왜 하는가?
공부를 하면 깊고 넓은 지식이 쌓이고 지식이 쌓이면 경제적이 되고 따라서 멋있게 되고, 그러면 인생이 맛이 있어진다. 인생이 맛있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잠
내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대라면 나는 당연히 잠을 잘 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잠을 많이 잔다는 의미가 아니다.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잠을 적게 잤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다보면 자동차로 떠나는 국내여행이든 비행기로 떠나는 외국여행이든 출발점에서 떠나는 것조차 모르고 잠이 든다. 고속버스가 터미널을 언제 떠났는지 모르게 곯아떨어지고 비행기에서도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맨다. 잠이 들었을 때 벨트를 매라고 승무원이 깨우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나는 잠이 쉽게 들고 그렇다고 잠에서 깨는 것이 괴로운 편은 아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참 괴로웠다. 나의 아버지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새벽형 인간이셨기에 날이 밝으면 큰소리로 책을 읽으셨고 집안 마당은 물론 골목길까지 귀신이 쓸어놓은 것처럼 큰 길까지 매일 깨끗이 쓸어놓으셨다. 특히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은 더욱 일찍이 그러하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는 것이 당연히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새벽같이 나를 단잠에서 깨우셨고 그때 참말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가 나를 깨워놓으면 나는 동생 방으로 가서 발만 들여 밀고 또 단잠을 잤다. 그러다 내가 세수하러 나오지 않으면 이방 저방 둘러보시고 찾아내어 또 깨우셨고 나는 동생 방에서 끌려 나와서는 또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일어나시고 밥그릇을 묻어 놓기 위해 깔아놓은 조그만 포대기를 이불삼아 덮고 나는 또 단잠을 잤다. 거의 매일아침 아버지와 나는 잠 때문에 숨박꼭질을 하다시피 한 전쟁이 나의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짜증나는 기억이다.
왜 그랬을까? 인생을 돌아보건대 나는 잠을 많이 잔 것 같지는 않다. 소녀시절엔 그 당시에는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 1m는 넘는 큰 궤착의 오디오 세트는 있었기에 한국 가곡과 팝송을 즐겨 들었지만 밤에는 책 읽는다고 잠을 못 잤던 것 같다. 12시가 되면 끊어지는 사설 전깃불 때문에 호야 불을 키고 책을 읽다보면 기름이 떨어질 때는 새벽녘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겠다고 춘천여중 때는 도서위원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춘천서점에서 외상으로 한 달에 열권씩은 샀으니까 시간이 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이 월급날 25일이면 외상술값이 아니라 외생책값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커서는 번역되지 않은 소설책을 영어로, 독일어로 읽는 재미에 잠을 최대한 줄였던 것 같다. 평생 잠을 실컷 못 잤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나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버릇이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닌가한다. 젊어서는 공부하고, 일한다고 나이 들어서는 일하며 운동하려니 잠을 줄일 수밖에. 감기가 들려다가도, 슬픔에 빠지려다가도,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인간관계로 화가 나다가도 잠만 자고 나면 거뜬해지니까 잠은 내게 가장 좋은 보약이었다.
최인호 작가의 사인회에서
여름방학이라지만 퇴직 후 봉사를 위한 한국어 교사 자격 검정고사 과정을 준비 하고 있는 나로서는 토요일이 그리 한가 한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잘 짜야 한다. 가슴이 저리도록 귀엽고 예쁜 20개월 된 손녀 가 오기로 되어 있다. 요즈음 말을 배워 제법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아 빨리 보고 싶다. 누구나 대충 세 살이 되면 말을 하는 것이고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 할 수 있는데 그게 내 손녀가 하니 대단하게 느껴지나 보다. 그래서 모든 할머니는 자기 손자는 천재는 아니래도 수재라고 생각한다.
“안녕하여요.” 나 “아빠! 일어나 여요”를 어설프게 하는 모습도 오히려 똑바로 하는 것보다 더 예쁘니 예쁘다는 기준도 없는 것이다. 남의 아이가 어설프게 하는 것이 예뻐 보이겠는가 말이다.
빨리 보고 싶은 손녀딸도 일요일에 오라고 미루어 놓고 아침부터 서둘러 토요일 하루 일정으로 도시 산책 코스를 정했다. 동대문상가 단골 포목 집에 들러 디자이너 신XX 가 수주한 린넨마 100수에 분홍색과 자주색 동그라미 프린트가 얼마나 멋있게 나왔는지, 그리고 멋있으면 그 천을 끊어 무엇을 만들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요즘 유행인 인조 패션가에 들러 기웃거리다 동대문 상가 식료품 골목에 들러 새로 나온 특별히 손이 가는 먹을거리가 있으면 사고 광화문으로 가는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4시부터 암 투병을 3년째하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3개월이라는 단시간에 써내려간 최인호 작가를 만나는 것이다.
실은 내 마음속에 최인호 작가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일생은 물론이고 그의 작품을 꽤 뚫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실제로는 물론이고 TV에서 조차 본적이 없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나도 나는 그를 단번에 알아볼 자신이 있다.
그 사람이 우선 나와 대학 학번이 같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리고 내 딸 친구 현정이 엄마가 수도여고 때 서울고와 그룹미팅으로 잘 아는 사람이란다. 그래서 나는 최인호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도 하도 들어서 이미 잘 알고 있고 대학 졸업한 후인지 별들의 고향 그 두꺼운 상하권을 하루 한권씩 읽어 제 쳤으니 그의 글 솜씨 나무랄 데 없다. 그의 작품이 영화가 되면 제일 먼저 가서 보곤 했는데 최인호 작가가 아프단다. 설마 그렇지 않겠지만 그가 같은 공간에 오래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의 살아있는 모습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어서 가서 마음으로 격려하고 싶어 광화문으로 갔다. 벌써 3시 15분이다. 낯익은 그의 턱을 괸 얼굴이 책 띠를 두른 위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설레는 마음으로 한 권 집었다. 그리고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판에 신작가가 주인공1인칭을 “너”라는 2인칭 주어로 표현한 문장이 어떻게 번역 되었는지 궁금하여 외국소설 코너에 가보았다.
미국 판은 신경숙 작가의 평범한 얼굴을 예쁘게 꾸며낸 표지의 하드가 32000원, 영국 판은 도시의 많은 사람들을 삽화로 그려내어 매우 도시적인 표지가 23000원 인데 주어 1인칭을 너로 쓴 것이 그대로 “You” 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왠지 이것이 궁금했다.
베스트셀러 쪽으로 가다가 보니 문까지 늘어선 줄이 틀림없이 최인호 작가의 사인회 줄이라 여겨진다. 내 앞에 서서 기다리는 중년의 아저씨는 옛날 40년 전 최인호 작가의 작품 “가족”을 들고 있어 물어보니 40년 전 사인을 받았고 그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든 저렇든 줄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최인호 작가와 연결을 짓는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되어 최인호 작가를 4,50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 줄에 합류하여 조금 전에 구매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으며 연관을 지어보았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 입학 학번이 같다는 것 외에는 연관을 찾을 수 없다. 만나면 건강하시라는 말 대신 다음 작품을 기다리겠노라고 말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 아무 말도 못하고
사 향 첩
사슴은 우리가 오늘날 무스크향으로 알고 있는 사향주머니를 차고 있다. 숫사슴이 암사슴을 홀리기 위해 생식기에 달아둔 사향 때문에 10 리 밖의 포수한테 들켜 총을 맞듯이 사향첩의 주인인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그림을 모아 만든 그림첩에 재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경고로 사향첩이라고 표지 제목을 붙였다 한다. 사향첩이라고 지은 이유는 그림 그리는 이 재주 때문에 죽을 수 있으니 가족 외 에는 사향첩을 보여주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니 내가 진정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얼마큼 겸손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슴의 고유의 향인 정말 기분 좋은 무스크 향 때문에 포수에게 들켜 숫사슴이 죽 듯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죽게 되고 산을 잘 타는 사람은 산 타는 재주로 산에 가서 죽고 돈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강도한테 죽고 힘센 사람은 그 힘 때문에 싸움꾼한테 죽는다. 그래서 단속하는 의미에서 사향첩이라고 책 제목을 붙였다. 사향첩의 자손도 그 사향첩을 자랑하였기에 우리가 오늘 날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기 재주는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명예욕인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랑했으니……. 반대로 명예가 더럽혀지면 죽음을 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도 그러하고 일설에 의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전후 이름이 더렵혀지느니 전장에서 화살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죽음을 택하여 명예를 지킴을 볼 수 있다.
나는 내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내 사향은 있기나 한 것인가?
나이 듦을 찬미
요즈음 우리는 지식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는 넘치고 넘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안 나오는 것이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만도 인터넷을 하는 인구가2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들이 손안에 있는 전자기기로 필요한 정보를 언제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 저들이 지식인인가? 정보가 낱개로 흩어졌을 때 그 정보는 아무리 고급정보라 할지라도 정보일 뿐이지 지식이 되지 못하고 힘을 갖지 못한다.
정보와 정보가 연결이 되어야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축적되어 지혜가 나온다. 지혜는 앎이 수없이 축적되어야 한다. 석탄이 축적되어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말이다. 그것이 내가 나이 먹음을 찬미하는 이유이다. 나이가 먹으면 지식이 축적되어 젊어서 갖지 못하는 지혜가 생기기 마련이다.
초등학생, 중학생이 많은 정보를 접했다고 어느 누구도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뿔뿔이 흩어진 정보를 아무리 창고에 꼭꼭 넣어도 흩어진 진주알이 진주목걸이가 될 수 없듯이 말이다.
요즈음 사회복지 현장에서 특강을 해달라고 하면 굉장히 부담을 느낀다. 나이 먹은 나한테 해달랄 때는 나이 먹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지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 과연 나는 그러한 지혜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어대던 20대에는 겁도 없이 기억하는 것을 따발총처럼 다 쏟아내려 했다. 30대에도 특히 그러했다. 40대에는 지식을 나만이 아는 양 가능한 많이 전하려고 했고 50대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을 전하려 했던 것 같다. 60대에는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도움이 되는 것만 전하려고 노력한다. 요즈음 나는 강의는 지식전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을 전하려한다.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에는 가치관이 바탕이 되어있다. 가치관이 없는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다. 강의는 가치관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낱개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준이 낮은 학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낱개의 지식을 받아먹으려 한다. 장기기억도 못하고 의미도 모르면서 말이다. 학생이 이해 못하는 것은 전할 필요가 없고 시간낭비다. 내가 말하는 이해는 깨달음의 수준이다. 그들이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그들을 어려워하고 살피게 된다. 이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기탄이다. 小人은 무기탄인데 기탄이어야 한다. 기탄이란 마음의 거리낌이다. 우리는 “기탄없이 이야기 하자”는 이야기를 할 때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자는 의미인데 다 털어놓고 마음의 거리낌 없이 하다보면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한다. 그래서 기탄이 없으면 안 된다. 나만이 전할 수 있는 지혜를 저들이 알아들어 저들이 행복하고 저들이 만드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되도록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특히 젊어서는 깨닫지 못한 지식이 지혜가 되어 나를 기쁘게 하고 이 세상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 신세진 것을 남은 생 동안 갚아가는 과정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지구라는 별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을 먹어치우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내놓았는가! 내가 버린 쓰레기로 지구 무게가 무겁게 되지 않았을까.
청소년의 비행은 비타협적 방식으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이다. 청소년의 미성숙 안에 신명 나는 창조적 사고가 있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과 새로운 삶을 위한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청소년기에 청소년이 자신의 정체성문제에 대한 거짓해결은 행동화(acting out)이다. 거짓해결이라 함은 올바른 해결방법이 아니라 잘못된 해결방법이기 때문이다. 행동화는 성인의 경우에도 많이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성인이 비도덕적 반사회적 폭력적 행동을 하는 모든 것이 행동화이다. 청소년이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행동화하는 경우가 많다. 성적으로 조숙한 행동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가출이나 반사회적 행동을 한다.
청소년기 특징은 자아 지원의 박탈이전으로 되돌아 가고싶은 의존뿐 아니라 행동화를 포함한 반항이기도 하다.
청소년은 성장단계에 있으므로 청소년의 미성숙은 인정되고 허용되어야 하고 미성숙을 위한 치료는 충분한 시간이 경과되어야 하므로 서둘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의 도전을 이해하기보다 정면으로 대면하므로 보복적이거나 변론적이지 않도록 하며 성인이 자체의 힘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이다. 성인이 버티고 서서 막고 있으므로 청소년의 비행은 청소년이 자신은 자신의 관점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반사회적 비행자체가 도움을 받으려는 해결방법이며 의사소통방법이다.
청소년의 반사회적 행동은 관심이 박탈되었거나 통제가 박탈되었을 경우이다. 관심이 박탈되었으면 관심을 무한히 주고 통제가 박탈되었으면 통제를 주므로 반사회적 행동을 중단시킬 수 있다. 사실 바꾸어 말하면 통제가 박탈된 경우도 주어야 할 통제를 주지 않은 것이고 주어야 할 통제도 역시 관심이므로 관심의 박탈이다. 그러나 치료의 가닥을 잡기 위해서는 관심의 박탈인지 통제의 박탈인지 구별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심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위험이 없는 한 무조건적 허용적 사랑을 의미한다. 관심과 통제를 주거나 철수하는 것이 청소년 비행을 막을 수 있는 원리이다.
울타리와 공간
아이들은 초등학교 상급학년이 되면서 사춘기로 접어들고 아이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어른의 관심을 받게된다. 이 아이들의 행동이 비행일 경우는 성인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원인을 진단하고 치료책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은 왜 반사회적행동을 하는것일까?
청소년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희망은 부모관심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관심을 다시 조명 받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가정의 해체나 부모사이의 불화가 있을 경우 아이의 정신구조에 아주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 공격적인 생각과 충동이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고, 부모의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삶의 틀을 혼자 떠맡게 된다. 그 결과 충동성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욕구충족으로 자발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되어 불안해진다.
지금까지 초자아의 발달로 발달된 죄책감은 부모의 자아지원이 철수되면 짐이 된다. 실상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무엇을 할 만큼 충분히 힘이 강하지 않기에 순응한다. 이것이 실망의 중립적 상태인데 자아는 희망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환경이 개선되면 다시 희망을 갖고 희망 안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때 반사회적 행동 경향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사람들에게 시간이나 관심 또는 돈 등을 요구하는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도벽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두 번째는 구조적 강력함과 조직화에 대한 기대를 하고 아이가 쉴 수 있고 긴장을 풀며 안정을 느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에 대한 기대를 하거나 또는 강력한 관리를 요구 하는 파괴행동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자아지원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실망의 중립적 상태가 되기 전에 생긴 극도의 불안이나 혼란에 대한 공포를 원상태로 돌릴 수 있는 희망을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갖는다.
자아 지원이 박탈된 아이의 대다수가 가정에서 회복될 수 있다. 자아 지원의 박탈로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아이의 부모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아이의 좀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행동도 허용하면서 정신적 아기 돌봄이라고 생각하고 심적 상처로부터 회복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상대적 박탈은 신뢰를 형성하고 내적 실체를 풍성하게 한다.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르는 시기에 적절한 도움이 이루어져야 2차적 부산물(Secondary gain)이 우세하지 않도록 되며 그렇지 않으면 도움을 받으려는 청소년의 충동을 방해한다. 청소년이 비행을 하는 충동은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치료되지 않는 비행으로 발전되어 상습적이 된다.
청소년의 비행은 비타협적 방식으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이다. 청소년의 미성숙 안에 신명 나는 창조적 사고가 있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과 새로운 삶을 위한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최인호 작가의 사인회에서
여름방학이라지만 퇴직 후 봉사를 위한 한국어 교사 자격 검정고사 과정을 준비 하고 있는 나로서는 토요일이 그리 한가 한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잘 짜야 한다. 가슴이 저리도록 귀엽고 예쁜 20개월 된 손녀 가 오기로 되어 있다. 요즈음 말을 배워 제법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아 빨리 보고 싶다. 누구나 대충 세 살이 되면 말을 하는 것이고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 할 수 있는데 그게 내 손녀가 하니 대단하게 느껴지나 보다. 그래서 모든 할머니는 자기 손자는 천재는 아니래도 수재라고 생각한다.
“안녕하여요.” 나 “아빠! 일어나 여요”를 어설프게 하는 모습도 오히려 똑바로 하는 것보다 더 예쁘니 예쁘다는 기준도 없는 것이다. 남의 아이가 어설프게 하는 것이 예뻐 보이겠는가 말이다.
빨리 보고 싶은 손녀딸도 일요일에 오라고 미루어 놓고 아침부터 서둘러 토요일 하루 일정으로 도시 산책 코스를 정했다. 동대문상가 단골 포목 집에 들러 디자이너 신XX 가 수주한 린넨마 100수에 분홍색과 자주색 동그라미 프린트가 얼마나 멋있게 나왔는지, 그리고 멋있으면 그 천을 끊어 무엇을 만들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요즘 유행인 인조 패션가에 들러 기웃거리다 동대문 상가 식료품 골목에 들러 새로 나온 특별히 손이 가는 먹을거리가 있으면 사고 광화문으로 가는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4시부터 암 투병을 3년째하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3개월이라는 단시간에 써내려간 최인호 작가를 만나는 것이다.
실은 내 마음속에 최인호 작가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일생은 물론이고 그의 작품을 꽤 뚫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실제로는 물론이고 TV에서 조차 본적이 없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나도 나는 그를 단번에 알아볼 자신이 있다.
그 사람이 우선 나와 대학 학번이 같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리고 내 딸 친구 현정이 엄마가 수도여고 때 서울고와 그룹미팅으로 잘 아는 사람이란다. 그래서 나는 최인호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도 하도 들어서 이미 잘 알고 있고 대학 졸업한 후인지 별들의 고향 그 두꺼운 상하권을 하루 한권씩 읽어 제 쳤으니 그의 글 솜씨 나무랄 데 없다. 그의 작품이 영화가 되면 제일 먼저 가서 보곤 했는데 최인호 작가가 아프단다. 설마 그렇지 않겠지만 그가 같은 공간에 오래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의 살아있는 모습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어서 가서 마음으로 격려하고 싶어 광화문으로 갔다. 벌써 3시 15분이다. 낯익은 그의 턱을 괸 얼굴이 책 띠를 두른 위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설레는 마음으로 한 권 집었다. 그리고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판에 신작가가 주인공1인칭을 “너”라는 2인칭 주어로 표현한 문장이 어떻게 번역 되었는지 궁금하여 외국소설 코너에 가보았다.
<자기표상>
모든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세상사를 보는 눈의 각도가 다르고 보는 대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를 본다면 어떤 사람은 만든 원리가 무었인지 보려고 한다.
대상표상의 세계에 각인된 과거의 경험이 세상사와 사물에 대한 준거 틀이 된다. 성인이 되어 의식의 세계에서 이미지의 질을 결정해야 할때 영아가 커서 어른이 되어도 표상의 세계에 설치되어 있는 감별기능을 하는 여과기를 거쳐 어렸을 때 그 사물을 본 엄마가 결정한 결정대로 지금 성인이 된 사람이 결정한다면 어떠할까? 그런데 그렇다.
결정을 잘못하여 문제를 만들어 내는 머릿속의 귀신이 바로 양육자의 이미지이다. 영아시절의 이미지의 상 즉 파지와 용전과 향전에 인색했던 이미지를 치료자가 새로운 파지와 용전과 향전을 통해 새로운 함입과 감별. 통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치료다.
더 이상 자괴감에 의한 자학적 사고와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 항구성을 정립할 수 있는 자아의 현실거래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치료다.
향전의 우회는 공향을 일으킨다.
영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 안에 원하는 만큼 주는 것이 용전인데 그렇게 하지 않을때 용전의 왜곡이 생긴다.
용전의 왜곡은 자신을 못 믿는 불신의 씨가 된다.
비판보다는 지지를, 거절 보다는 수용을, 좌절 보다는 희망을 갖도록 왜곡을 바로 잡는것이 치료다. 치료는 지지와 수용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파지란 한알의 밀알이 썩어 한말의 밀알이 나올 수 있는 새싹이 되듯이 부모가 썩어 그 힘으로 아이가 새싹처럼 자랄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다.
아이가 속썩인다고 할 것이 아니라 부모는 썩어주어 좋은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를 속썩이는 것은 영양분을 달라는 것이다.
파지의 결핍은 사람을 오그라들게 하는 두려움을 야기한다.부모가 썩으며 즐겁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파지이고 그러면 아이는 그 에너지를 받아 잘 자랄수 있다. 동식물이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잘 자라듯이 말이다.
성정체감
요즈음 서울 장안에 화두인 학생인권조례에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참 좋은 굉장히 진화된 인권에 관한 원칙이다.
10여 년 전 미국의 미시간 주립대학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어린 대학원학생들이 나이 먹은 나를 설득해서 동성애를 인정한다는 푸른 리본을 내게 달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인정은 하지만 지지를 보낸 것은 아니다. 동성애의 현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성, 남성은 생물학적 사실이지만 남성, 여성으로서 자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것은 심리적인 것이며 어린시기에 배운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가 반대성을 원했다면 시작부터 잘못된 시작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의 성을 받아들이지만 경우에 따라 자녀의 성에 실망을 극복하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아이는 태어난 성을 깍아내리는 메시지를 받는다.
부모로부터 성을 거부당한 어린이는 자신의 성을 거부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제 성별을 동일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희생하고 부모가 기대하는 성을 따라 살고자한다.
백화점에 가서 “니가 여자애라면 예쁜 드레스를 살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면 이 아이는 성정체감을 갖지 못한다.
동성애로 키워지는 경향은 천성적 아동자아에서 근본적인 감정이 잘못되었거나 이성과의 부적절한 적응에서 온다.
태어날 때 영아는 단지 자신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충동을 만족시키길 원한다.
천성적 아동자아는 성별을 구별 안한다.
그래서 단지 성에 대해서는 어린시기의 부모에 의한 경험으로 영향 받는다.
20여년전 고향친구 명자가 서울로 시집 와서 가난한 기공사 월급으로 맏딸노릇한다면서 공부하는 동생들을 다 데리고 살다가 간암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명자의 동생들은 언니덕에 서울서 명문대학 나오고 자기생활을 잘하고 있지만 명자네는 명자가 간 후 명자딸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명자가 동생들에게 부모가 해야 할 또 부모가 기대하는 맏딸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아내 역할, 엄마 역할만 했더라면 지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 것같다. 사람은 주위에서 기대하는 많은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역할만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설교만을 선택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는 말타를 마리아는 예수님께 일러바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에게 말타는 가장 좋은것을 선택했다고 칭찬하시는 마리아와 말타의 이야기도 있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
참새가 세 마리 앞마당에 날아왔다. 참 겁도 없이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더니.... 왜 그럴까? 뻔한 이치다. 날이 추워지니 날아다니는 날벌레도, 기어다니는 애벌레도 땅속으로 꼭꼭 숨었을테니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겁이 없이 용감해질 수 밖에....
방글라데쉬의 호랑이 밀림지역 순나르반스에선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사는 밀림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겁도 없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어느날은 반대로 호랑이가 굶어 죽지 않고 살려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지붕위에 웅쿠리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새가 날이 추워지면 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해 잡힐 각오까지는 안하더라도 겁을 먹으며 사람들 앞으로 나오듯이 이 지역에서는 사람도 호랑이도 겁을 먹으며 서로 침범을 한다. 그래서 사람한테 막대기로 맞아서 다리를 다친 어미 호랑이가 다리를 절며 갓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했고, 사람도 호랑이한테 머리를 물려 머리통이 찌그러진 큰 상처를 갖고 살거나 팔다리를 호랑이한테 물려 한 개씩 뜯긴 사람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 호랑이굴 앞에서 물고기를 잡아 우리 돈으로 하루 7000원에서 9000원 정도 번 돈으로 대 여섯식구가 몇일을 연명해야 하는 방글라뎃시 사람들을 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은 자제능력으로 종족보존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겁을 극복하고 고통을 견디며 경쟁사회에서 자기스스로 살아남는다. 종족보존의 성향으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는 그 유전자를 유전받고 그 유전자가 성공하게 만든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라 희생하지 못하나 살아남기 위해 희생을 조율해가며 성공한다. 자녀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견디는 자제력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이를 이기적 희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파랑새 증후군도 있다. 마테를링크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힘들면 직장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통을 피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본인들은 더 많은 돈과 인기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직장을 옮긴다고 하지만 결국 직장을 옮겨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능력이 확장되여야하고 능력확장을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노력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나면 저절로 능력확장이 되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게된다.
조급하게 본인은 노력하지 않고 이리저리 직장과 때로는 직업까지 바꾸어가며 방황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내 마음의 스승
왜 저는 선생님을 꼭 뵈어야 했는지요? 41년 전 여학교 영어 선생님과 여고생이 만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를 만나면 점심을 잘 대접해 주려 했는데,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네가 궁금해 해서, 이리로 왔다”며 큰 대로변 장어구이 집으로 안내하셨지요. 그리고 이 음식점의 4층이 살림집이고 옆 건물 4층이 서재 겸 연구실이라고 하셨어요. 이만하면 제자가 찾아오면 맛있는 점심을 대접할 수 있다고요. 8년 전 북한산 언덕의 호텔 커피숍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을 때 저는 선생님을 맞으러 뛰어나갔고, 선생님은 30년도 넘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제자의 이름을 똑똑히 불러 주셨습니다.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는 선생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했습니다. 워낙 제 무의식에 선생님이 크게 자리 잡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청량리에서 고물상을 하신다는 헛소문을 듣고 청량리 고물상을 다 뒤지기도 했어요.”라고 저는 말씀드렸지요. 선생님께서는 제 수첩에다 선생님의 연락처를 친히 적어 주셨어요. 그 후에는 선생님을 만나면 어색하면 어떻게 하나, 할 말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그만 불안이 같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5월 15일 스승의 날이면 더욱 선생님이 그립고, 찾아뵈어야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선생님께서 적어주신 연락처는 대학교 재직 시의 연락처였는데 제가 선생님이 계시던 대학원에 강의를 맡게 되면서 선생님께서 정년 퇴직하셨다는 소식을 4년 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렵게 구한 전화번호를 손에 쥐고 어쩌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할 때 전화 저편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는 40여 년 전의 바로 그 목소리 그대로였습니다. “선생님, 저 춘천여고 3학년 때 선생님 담임 반에 있던 안향림 이에요. 기억하세요?” 혹시 선생님이 그 사이에 “누구던가”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괜한 조바심도 들더군요.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
프랑스 소설가 샤를 페로(1628-1708)가 유럽에 전해오는 전래동화를 상드리용(cendrillon)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 쓰다는 뜻으로 항상 부엌 아궁이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일을 하는 여자라는 의미이다. 신데렐라 동화는 계모와 이복언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마음씨가 착해서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구전동화로 전래된 이 프랑스 동화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면서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매스터슨(James Masterson)은 모자 관계인 대상관계에서 자신의 친 엄마를 나쁜 계모로 느끼는 것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명명하였다. 사실은 모든 유아의 엄마가 계모가 아닌데 모든 유아는 자신의 엄마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나쁜 계모로 여긴다는 것이다. 모든 엄마가 항상 다 좋은 엄마일 수 없다. 엄마가 잘해주면 좋은 엄마이고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나쁜 엄마로 보는 유아는 제1 분리개별화기(18개월-36개월)에 대상을 좋은 엄마 나쁜 엄마로 자아분화(ego spiriting)한다. 대상이 한 가지가 좋으면 모두 좋은 사람이고, 한 가지가 나쁘면 모두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로 자아분열 방어기제이다. 모든 사람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데 나한테 잘해주면 모든 것이 좋고 나쁜 면을 보지 않으려는 all good. 나한테 잘 못해주면 all bad로 보려는 방어기제는 대상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이는 물론 잘못된 방어기제이다. 이 잘못된 시각이 유아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가 자아분열(ego splitting)을 통해 사람을 이분법으로 분류한다. 이분법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또 어떤 이는 예쁘냐 안 예쁘냐, 또 공부를 잘하냐. 잘못 하냐, 하다못해 키가 크냐 안 크냐, 일류대학을 나왔냐 아니냐, 토머스 울프를 읽었냐 안 읽었냐로 구분하려든다. 이 모든 것이 자기만의 잣대로 분류하는 자아분열(ego splitting)이다.
자아분열은 대상을 전체로 보지 않고 일면만 보는 것이고 이는 물론 잘못된 시각이다. 예를 들면 미국을 모든 문화가 융화된 합리적이고 다양한 나라라고 보지 않고 총 쏘고 무법자의 나라로, 일본을 일본의 질서 정연하고 안정되고 예의 바른 면을 보지 않고 한국을 짓밟은 나라로 보면 큰 오류가 생기듯이 사람도 한 면만 보면 보는 사람이 잘못 본 그 책임을 면치 못한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잘못 보게 만드는 자아분열은 유아가 엄마와 공생에서 분리 개별화되는 과정 속에 자기의 엄마인 대상을 좋은 엄마 또는 나쁜 엄마로 보면서 대상을 모든 것이 좋은 사람, 모든 것이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게 된다.
잠
내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대라면 나는 당연히 잠을 잘 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잠을 많이 잔다는 의미가 아니다.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잠을 적게 잤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다보면 자동차로 떠나는 국내여행이든 비행기로 떠나는 외국여행이든 출발점에서 떠나는 것조차 모르고 잠이 든다. 고속버스가 터미널을 언제 떠났는지 모르게 곯아떨어지고 비행기에서도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맨다. 잠이 들었을 때 벨트를 매라고 승무원이 깨우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나는 잠이 쉽게 들고 그렇다고 잠에서 깨는 것이 괴로운 편은 아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참 괴로웠다. 나의 아버지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새벽형 인간이셨기에 날이 밝으면 큰소리로 책을 읽으셨고 집안 마당은 물론 골목길까지 귀신이 쓸어놓은 것처럼 큰 길까지 매일 깨끗이 쓸어놓으셨다. 특히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은 더욱 일찍이 그러하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는 것이 당연히 즐겁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새벽같이 나를 단잠에서 깨우셨고 그때 참말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가 나를 깨워놓으면 나는 동생 방으로 가서 발만 들여 밀고 또 단잠을 잤다. 그러다 내가 세수하러 나오지 않으면 이방 저방 둘러보시고 찾아내어 또 깨우셨고 나는 동생 방에서 끌려 나와서는 또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일어나시고 밥그릇을 묻어 놓기 위해 깔아놓은 조그만 포대기를 이불삼아 덮고 나는 또 단잠을 잤다. 거의 매일아침 아버지와 나는 잠 때문에 숨박꼭질을 하다시피 한 전쟁이 나의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짜증나는 기억이다.
왜 그랬을까? 인생을 돌아보건대 나는 잠을 많이 잔 것 같지는 않다. 소녀시절엔 그 당시에는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집에 1m는 넘는 큰 궤착의 오디오 세트는 있었기에 한국 가곡과 팝송을 즐겨 들었지만 밤에는 책 읽는다고 잠을 못 잤던 것 같다. 12시가 되면 끊어지는 사설 전깃불 때문에 호야 불을 키고 책을 읽다보면 기름이 떨어질 때는 새벽녘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겠다고 춘천여중 때는 도서위원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춘천서점에서 외상으로 한 달에 열권씩은 샀으니까 시간이 나는 대로 책을 읽어댔다.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이 월급날 25일이면 외상술값이 아니라 외생책값 갚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커서는 번역되지 않은 소설책을 영어로, 독일어로 읽는 재미에 잠을 최대한 줄였던 것 같다. 평생 잠을 실컷 못 잤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나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버릇이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닌가한다. 젊어서는 공부하고, 일한다고 나이 들어서는 일하며 운동하려니 잠을 줄일 수밖에. 감기가 들려다가도, 슬픔에 빠지려다가도,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인간관계로 화가 나다가도 잠만 자고 나면 거뜬해지니까 잠은 내게 가장 좋은 보약이었다.
사 향 첩
사슴은 우리가 오늘날 무스크향으로 알고 있는 사향주머니를 차고 있다. 숫사슴이 암사슴을 홀리기 위해 생식기에 달아둔 사향 때문에 10 리 밖의 포수한테 들켜 총을 맞듯이 사향첩의 주인인 아버지가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그림을 모아 만든 그림첩에 재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경고로 사향첩이라고 표지 제목을 붙였다 한다. 사향첩이라고 지은 이유는 그림 그리는 이 재주 때문에 죽을 수 있으니 가족 외 에는 사향첩을 보여주지 말라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니 내가 진정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얼마큼 겸손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슴의 고유의 향인 정말 기분 좋은 무스크 향 때문에 포수에게 들켜 숫사슴이 죽 듯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죽게 되고 산을 잘 타는 사람은 산 타는 재주로 산에 가서 죽고 돈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강도한테 죽고 힘센 사람은 그 힘 때문에 싸움꾼한테 죽는다. 그래서 단속하는 의미에서 사향첩이라고 책 제목을 붙였다. 사향첩의 자손도 그 사향첩을 자랑하였기에 우리가 오늘 날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기 재주는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명예욕인가? 죽음을 무릅쓰고 자랑했으니……. 반대로 명예가 더럽혀지면 죽음을 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도 그러하고 일설에 의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전후 이름이 더렵혀지느니 전장에서 화살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죽음을 택하여 명예를 지킴을 볼 수 있다.
나는 내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내 사향은 있기나 한 것인가?
나이 듦을 찬미
요즈음 우리는 지식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는 넘치고 넘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안 나오는 것이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만도 인터넷을 하는 인구가2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들이 손안에 있는 전자기기로 필요한 정보를 언제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 저들이 지식인인가? 정보가 낱개로 흩어졌을 때 그 정보는 아무리 고급정보라 할지라도 정보일 뿐이지 지식이 되지 못하고 힘을 갖지 못한다.
정보와 정보가 연결이 되어야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축적되어 지혜가 나온다. 지혜는 앎이 수없이 축적되어야 한다. 석탄이 축적되어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말이다. 그것이 내가 나이 먹음을 찬미하는 이유이다. 나이가 먹으면 지식이 축적되어 젊어서 갖지 못하는 지혜가 생기기 마련이다.
초등학생, 중학생이 많은 정보를 접했다고 어느 누구도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뿔뿔이 흩어진 정보를 아무리 창고에 꼭꼭 넣어도 흩어진 진주알이 진주목걸이가 될 수 없듯이 말이다.
요즈음 사회복지 현장에서 특강을 해달라고 하면 굉장히 부담을 느낀다. 나이 먹은 나한테 해달랄 때는 나이 먹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지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 과연 나는 그러한 지혜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떠들어대던 20대에는 겁도 없이 기억하는 것을 따발총처럼 다 쏟아내려 했다. 30대에도 특히 그러했다. 40대에는 지식을 나만이 아는 양 가능한 많이 전하려고 했고 50대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을 전하려 했던 것 같다. 60대에는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도움이 되는 것만 전하려고 노력한다. 요즈음 나는 강의는 지식전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을 전하려한다.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에는 가치관이 바탕이 되어있다. 가치관이 없는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다. 강의는 가치관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낱개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준이 낮은 학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낱개의 지식을 받아먹으려 한다. 장기기억도 못하고 의미도 모르면서 말이다. 학생이 이해 못하는 것은 전할 필요가 없고 시간낭비다. 내가 말하는 이해는 깨달음의 수준이다. 그들이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그들을 어려워하고 살피게 된다. 이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기탄이다. 小人은 무기탄인데 기탄이어야 한다. 기탄이란 마음의 거리낌이다. 우리는 “기탄없이 이야기 하자”는 이야기를 할 때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자는 의미인데 다 털어놓고 마음의 거리낌 없이 하다보면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한다. 그래서 기탄이 없으면 안 된다. 나만이 전할 수 있는 지혜를 저들이 알아들어 저들이 행복하고 저들이 만드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되도록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특히 젊어서는 깨닫지 못한 지식이 지혜가 되어 나를 기쁘게 하고 이 세상 태어날 때부터 자연에 신세진 것을 남은 생 동안 갚아가는 과정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지구라는 별에 와서 얼마나 많은 것을 먹어치우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내놓았는가! 내가 버린 쓰레기로 지구 무게가 무겁게 되지 않았을까.
울타리와 공간
아이들은 초등학교 상급학년이 되면서 사춘기로 접어들고 아이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어른의 관심을 받게된다. 이 아이들의 행동이 비행일 경우는 성인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원인을 진단하고 치료책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은 왜 반사회적행동을 하는것일까?
청소년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희망은 부모관심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관심을 다시 조명 받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가정의 해체나 부모사이의 불화가 있을 경우 아이의 정신구조에 아주 심각한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 공격적인 생각과 충동이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고, 부모의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삶의 틀을 혼자 떠맡게 된다. 그 결과 충동성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욕구충족으로 자발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되어 불안해진다.
지금까지 초자아의 발달로 발달된 죄책감은 부모의 자아지원이 철수되면 짐이 된다. 실상 자아지원이 박탈된 아이는 무엇을 할 만큼 충분히 힘이 강하지 않기에 순응한다. 이것이 실망의 중립적 상태인데 자아는 희망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환경이 개선되면 다시 희망을 갖고 희망 안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 이 때 반사회적 행동 경향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사람들에게 시간이나 관심 또는 돈 등을 요구하는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도벽같은 것이 대표적 예이다.
두 번째는 구조적 강력함과 조직화에 대한 기대를 하고 아이가 쉴 수 있고 긴장을 풀며 안정을 느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에 대한 기대를 하거나 또는 강력한 관리를 요구 하는 파괴행동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자아지원의 박탈의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실망의 중립적 상태가 되기 전에 생긴 극도의 불안이나 혼란에 대한 공포를 원상태로 돌릴 수 있는 희망을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갖는다.
자아 지원이 박탈된 아이의 대다수가 가정에서 회복될 수 있다. 자아 지원의 박탈로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아이의 부모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아이의 좀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행동도 허용하면서 정신적 아기 돌봄이라고 생각하고 심적 상처로부터 회복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상대적 박탈은 신뢰를 형성하고 내적 실체를 풍성하게 한다.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르는 시기에 적절한 도움이 이루어져야 2차적 부산물(Secondary gain)이 우세하지 않도록 되며 그렇지 않으면 도움을 받으려는 청소년의 충동을 방해한다. 청소년이 비행을 하는 충동은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다.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치료되지 않는 비행으로 발전되어 상습적이 된다.
청소년의 비행은 비타협적 방식으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이다. 청소년의 미성숙 안에 신명 나는 창조적 사고가 있고 새롭고 신선한 느낌과 새로운 삶을 위한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컴퓨터 중독>
오늘 9시뉴스에 중학교 2학년부터 컴퓨터게임을 하던 학생이 학교도 중퇴하고 매일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한밤중에 복면을 하고 편의점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사건이 나왔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임상적으로 말하면 컴퓨터 중독이란 아이가 엄마와 대상관계에서 대상결핍이 만든 현상이다. 무슨 뚱딴지 같이 컴퓨터가 좋아서 컴퓨터 중독에 빠진 것이지 어떻게 대상결핍이 되어서 그런것이냐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밥도 굶고 학교도 안가고 돈도 잃어가며 비현실의 세계에 빠져 정신착란을 일으키기까지하며 죽게까지 하는 원인이 단순히 게임이 좋아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독성 성격은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이 가지는 이차적 문제이다. 중독자들의 사고에 의해 나오는 행동은 원시적인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정상을 일탈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중독성 특성을 갖고 있으며 그 특성은 초기 인간관계의 실패에 의한 자구책이다. 인간관계를 실패한 이들의 문제해결은 상실된 양육자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복원해 주는 것이다. 충족 되지 못한 대상 에너지를 다시 공급 받아 대상과 관련된 느낌이 포만감을 갖게 함으로써 대상결핍에 의한 문제로서 나타난 컴퓨터 중독현상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대상관계에서 주도권은 대상에게만 있다. 아이는 다만 환경이 바뀌면 좋아하거나 슬퍼하거나 즐겁거나 할 뿐이다.
나쁜 대상에 의해 양육된 영아는 자폐기, 공생기를 힘들게 괴롭게 보내며 격리개별화기에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에디프스 갈등기를 잘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그것이 청소년기에 자폐증, 정신분열증, 우울증을 앓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은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만족스러움에 의한 것이고 아이가 괴로워하는 것도 또한 어머니에 의해 공급된 부족함에 의한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인가 공급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분 또는 괴로운 기분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의 필름에 영상이 맺힌다. 그 영상화된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자신의 느낌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느껴진 어머니의 느낌을 아이는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의 느낌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갖고 평생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마음, 성격, 운명이 이미 타고났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나의 어머니의 것이다. 그래서 하려고 해도 안 되고, 하면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마음대로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참을 수 있으며 해서는 안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다. 자아의 원형이 결정되는 시기에 엄마가 영아를 아무렇게나 다룬다면 영아의 자아는 엄마가 영아를 아무렇게나 다룬 것처럼 자신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대하는 자아를 갖게 된다. 이 자아가 반사회적이거나 병적인 자아가 되어 아이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아무렇게나 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아무렇게나 대하게 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아무렇게나 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아무렇게 대하며 컴퓨터 중독에 빠지거나 비행을 저지른다. 새로운 대상관계에서 귀하게 대함으로서 아이가 자신을 귀하게 대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컴퓨터 중독된 청소년을 위한 치료방법이다.
갓길(god gil)
20여년을 자동차로 장거리를 출퇴근하다보니 경기남부의 고속도로는 내 동네가 되었다. 10여 년 전에는 고속도로와 관련된 명칭이 나도 알아듣지못할정도로 어렵더니 언제부터인가 쉬운 한국말로 아름답게 변했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은 노견이었는데 어깨길이라는 뜻의 일본식 명칭이고 후에 갓길로 변했고 진출입로는 나들목으로 바뀌었다. 순수한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고속도로에서 음악듣고, 고속도로에서 전화받고 고속도로에서 한끼 때우기는 다반사고 고속도로에서 생각도 하고 심지어 어깨길이 순수우리말로 바뀐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글도 쓴다. 내 상념이 달아나기전에 붙잡아 글로 옮겨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식속으로 빠져버리면 언제 나타날지 아니면 내가 살아있는동안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갓길을 어떤 개그맨이 god gil이라며 갓길에 차를 세우면 god이 데려간다고 그래서 갓길이 되었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갓길에 주 정차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에게 갓길은 무의식으로 빠져드는 나의 상념을 잡아주는 게르베로스이다. 나의 무의식을 잡아채서 의식화하는 것이 신에게 가는 것을 무릅쓸 만큼 귀중한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도(道)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의 무의식은 내가 나를 알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보물창고이다. 보물창고의 문이 조금 열리는 것 같으면 나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조금 더 열려고 한다.
짜증쟁이 아줌마.
나는 왕십리역사에 붙어있는 동네에 살기에 왕십리 대형마트가 가까이 있다. 특히 우리 동네는 E마트로 난 쪽대문이 있기에 E마트 접근성이 좋은데도 나는 멀리 재래시장을 찾는다. 내가 재래시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대형마트보다 웰빙 식단 마련을 쉽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가지 다양한 나물이나 해산물 또는 전통 음식 재료를 원자재 그대로 볼수있고 성인병에 나쁜 식자재의 유혹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는 아무래도 다양하고 맛있는 그러나 달고 기름지고 가공된 식품이 많아 하나씩 집어넣다보면 나의 몸이 병들게 될 것이다. 또 한편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보다 영세한 재래시장상인을 나는 생각한다. 재래시장에는 여러 가지가 다 있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성향의 상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중에 가장 친절한 한과주인은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한과 좀 먹어보라고 대형마트에서 하는 것처럼 시식을 시키는 맘 좋은 아줌마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꼭 사야하는 북어조림이나 팥죽 등 맛있는 음식을 팔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장사하는 아줌마도 있다. 살 때 마다 소비자에게 옆에서 남편이 빠릿빠릿하지 못해서 자신이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려고 애쓰는 이 아줌마를 나는 보기 싫어 꼭 필요하지 않으면 안 가려한다.
왜 보기 싫은 것일까? 짜증내는 모습은 내게 무엇을 연상시킬까?
내 성장기동안에 아버지인가? 누군가?
모든 소비자가 짜증내는 아줌마에 예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짜증과 연관된 내 무의식이 있기에 나는 짜증쟁이 아줌마에게서 자극 받지 않기 위해 그 집을 될 수 있으면 안 간다.
그러니 자연히 장사가 잘 안되어 짜증은 심해지기 마련이다.
짜증부리는 사람이 내 가까운 사람 중에 있었기 때문에 짜증에 민감한 모티브가 있다.
나도 일이 많거나 신체적으로 힘들 때면 짜증을 부리게 되고 나의 딸이 또 짜증을 부리는 엄마를 보며 컸고 내가 저 아이를 키우면서 짜증부리는 모습을 보여 줬을 테고 저 아이는 그것을 보고 배워서 내게 짜증을 부리는 것이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실감한다.
짜증쟁이 부식가게 아줌마가 나를 깨닫게 해준 것이니 공자는 도처에 모든 사람이 스승이라더니 짜증쟁이 아줌마는 나의 스승인데 내가 나를 알도록 하는 것이 괴로워 그를 피했던 것이다.
성정체감
요즈음 서울 장안에 화두인 학생인권조례에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참 좋은 굉장히 진화된 인권에 관한 원칙이다.
10여 년 전 미국의 미시간 주립대학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어린 대학원학생들이 나이 먹은 나를 설득해서 동성애를 인정한다는 푸른 리본을 내게 달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인정은 하지만 지지를 보낸 것은 아니다. 동성애의 현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성, 남성은 생물학적 사실이지만 남성, 여성으로서 자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것은 심리적인 것이며 어린시기에 배운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가 반대성을 원했다면 시작부터 잘못된 시작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의 성을 받아들이지만 경우에 따라 자녀의 성에 실망을 극복하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아이는 태어난 성을 깍아내리는 메시지를 받는다.
부모로부터 성을 거부당한 어린이는 자신의 성을 거부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제 성별을 동일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희생하고 부모가 기대하는 성을 따라 살고자한다.
백화점에 가서 “니가 여자애라면 예쁜 드레스를 살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면 이 아이는 성정체감을 갖지 못한다.
동성애로 키워지는 경향은 천성적 아동자아에서 근본적인 감정이 잘못되었거나 이성과의 부적절한 적응에서 온다.
태어날 때 영아는 단지 자신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충동을 만족시키길 원한다.
천성적 아동자아는 성별을 구별 안한다.
그래서 단지 성에 대해서는 어린시기의 부모에 의한 경험으로 영향 받는다.
성적 자아정체감은 특히 이성부모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만일 아버지가 아내를 학대하거나 여자를 무시하거나 좋지 않게 보면 여아는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부인하기 쉽다. 아버지의 눈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옳지 않게 본다.
반대로 남아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눈을 통해 여성이 보는 남성의 틀로 자기의 성을 보는것이다. 어머니는 아들 앞에서 아들의 아버지를 비난하지말고 존중해야 멋있는 남성이 되고 성정체감을 갖게된다.
그리고 아들딸 모두 어머니가 아버지를 비난하면 아이들의 인성이 좋지않은 인성으로 발달하게된다. 인성의 근본바탕은 성정체감이다.
동성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성모델로서 중요하다.
모델로서 모방하고 행동과 태도를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적절하게 딸아이의 여성스러움을 인정하고 엄마 역시 자신의 여성으로서 ok로 느끼는 부모를 가진 여아는 여자로서 승자의 느낌을 갖는다.
현대 핵가족에서 이성과의 관계가 제한된 어린이는 성 기준을 또래에서 찾거나 대중매체에서 찾는다.
돈쓰는 애
벌써 이번학기도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다.
나의 가족복지 마지막시간은 전이의사소통 실습시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 어느곳에서도 나의 이런 수업을 하는곳은 없을 것이다.
나는 팀별로 장난감보따리를 풀어 그속에서 각자의 가족을 표현할수 있는 캐릭터를 선택하게 하고 앞에 나와 자기가족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물론 의무는 아니지만 용기를 갖고 자기가족을 소개하는 지원자에게는 많은 점수를 준다. 그래도 40명 중 15명은 요지부동 플러스 점수를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25명만이 가족구성원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갖고 가족을 이삼분간 설명한다. 열다섯명은 가족의 비밀을 공개할 자신감이 없어서이다.
2~3분간 이러한 방법으로 내놓는 정보는 치료자가 최소한 30분 이상 혹은 열 번 이상 질문해야 나올수 있는 정보량이다. 그리고 각자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족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에 치료자 입장에서는 일거양득으로 쉽게 가족의 문제에 접근하기 쉽다.
이 전이의사소통을 통하여 가족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이미 죽은 사람도 빼놓을 수 없거나 빼놓기 싫어 표현하기도 하고, 동거가족을 이야기하며 집나간 사람을 이야기하고 이혼하거나 별거는 당연히 나타나고 심지어 조그만 쥐새끼가 있는 집에서는 쥐새끼나 또는 강아지나 큰개도 표현된다.
어떤 친구는 자신을 뺀 나머지 가족을 다 표현하고 나서 “나의 존재는 없어요.” 라며 끝낸다.
무슨 뜻이냐고 더 물어들어가면 가족들은 자기를 돈쓰는 애로 본다며 돈 쓰는 애는 있어도 자기는 없다며 울기 시작한다.
학교 다니는 학기 중에는 용돈을 타 쓰고 방학이면 아르바이트하며 등록금을 벌기에 돈도 별로쓰지않고 옷도 안 사입는데도 가족들 눈에는 학교나 다니며 돈만 쓰는 애로 보니 억울하다고 한참을 울고나서 들어갔다.
간단한 치료개입기술이 공개적으로 도입되어 굉장한 집단치료효과를 본것이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
참새가 세 마리 앞마당에 날아왔다. 참 겁도 없이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참새는 겁이 없어진다더니.... 왜 그럴까? 뻔한 이치다. 날이 추워지니 날아다니는 날벌레도, 기어다니는 애벌레도 땅속으로 꼭꼭 숨었을테니 굶어 죽지 않고 살려면 겁이 없이 용감해질 수 밖에....
방글라데쉬의 호랑이 밀림지역 순나르반스에선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면 호랑이가 사는 밀림으로 들어가야 한단다. 겁도 없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어느날은 반대로 호랑이가 굶어 죽지 않고 살려니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지붕위에 웅쿠리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새가 날이 추워지면 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해 잡힐 각오까지는 안하더라도 겁을 먹으며 사람들 앞으로 나오듯이 이 지역에서는 사람도 호랑이도 겁을 먹으며 서로 침범을 한다. 그래서 사람한테 막대기로 맞아서 다리를 다친 어미 호랑이가 다리를 절며 갓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데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했고, 사람도 호랑이한테 머리를 물려 머리통이 찌그러진 큰 상처를 갖고 살거나 팔다리를 호랑이한테 물려 한 개씩 뜯긴 사람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면서 호랑이굴 앞에서 물고기를 잡아 우리 돈으로 하루 7000원에서 9000원 정도 번 돈으로 대 여섯식구가 몇일을 연명해야 하는 방글라뎃시 사람들을 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은 자제능력으로 종족보존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겁을 극복하고 고통을 견디며 경쟁사회에서 자기스스로 살아남는다. 종족보존의 성향으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는 그 유전자를 유전받고 그 유전자가 성공하게 만든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라 희생하지 못하나 살아남기 위해 희생을 조율해가며 성공한다. 자녀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고 고통을 견디는 자제력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이를 이기적 희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파랑새 증후군도 있다. 마테를링크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힘들면 직장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통을 피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본인들은 더 많은 돈과 인기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직장을 옮긴다고 하지만 결국 직장을 옮겨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능력이 확장되여야하고 능력확장을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노력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나면 저절로 능력확장이 되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게된다.
조급하게 본인은 노력하지 않고 이리저리 직장과 때로는 직업까지 바꾸어가며 방황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그림자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는 빛이 시작되는 새벽에 작업을 한다고 한다. 빛이 있으므로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전에 당연히 아무것도 안보여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빛이 생기어 물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그림자이다. 콤플렉스가 공간이 열리는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내 정신의 그림자이다.
내가 내 육신의 그림자를 본지도 꽤 오래됐다. 어렸을 때 큰댁에 가서 자정 무렵 제사를 지내고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우리가족은 10리 길을 걸어 왔다. 그때건 지금이건 제사를 자정에 지내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사를 일찍 지내도 귀신은 귀신같이 알고 일찍 올 텐데 귀신을 믿는 사람들이 귀신을 못 믿고 귀신이 나온다는 자정이 되어서 제사를 지내니 얼마나 아이러닉한 이야기인가? 그 옛날 아주 어두운 밤인데도 어둡게 느끼지 않고 달빛이 매우 푸르고 매우 밝다고 느꼈다. 그래서 산모퉁이의 조그만 물체의 움직임도 다 느껴졌다. 제일 긴 아버지의 그림자와 다음에 엄마 그림자, 내 그림자 그리고 제일 작은 동생의 그림자를 비교해가며 그림자를 늘리려고 앞으로 갑자기 뛰어 나서기도 하고 동생과는 그림자를 서로 밟고 밟히지 않으려고 도망도 다녔다. 훗날 나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우리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 산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묘지자리를 구해서 그렇게 했다. 특히 우리자매가 커가는 모습을 보시며 같이 아파하고 같이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그 후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 그림자가 비취면 무서운 귀신 생각이 들어 놀라곤 했는데... 요즈음은 밤이라도 불빛이 사방에서 비추어져 그림자가 뚜렷하지가 않다. 내 정신의 그림자도 뚜렷하지가 않아 답답하다. 내 그림자란 내 몸뚱이만큼 내육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어두운 그늘이다. 어렸을 때 이 그늘이 내 일부인 것 같아 늘리려 했고 밟히지 않으려 했었다. 그림자도 나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육체의 그림자 외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그림자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질투하며 화를 낸다.
어떤 군인 아내는 남편이 진급에서 누락되자 남편은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여인의 마음이다. 아내는 자신이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정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고 상대방의 특징으로 보고 상대방을 미워한다.
내 정신의 그림자는 내 콤플렉스가 빛을 막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의식속에 있는 바로 나이다.
친정에서 부모역할을 하며 집안을 돌보던 아내가 늘 불행했다. 그래서 남편이 결혼함으로서 구해줬는데 친정이 멀리 이사하고 아내는 가축을 돌보며 아내가 행복해 하니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줄 일이 없어졌다. 남편은 아내가 불행으로부터 구원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여긴다. 남편이 구원자가 되려면 아내가 불행해야 하고 아내가 불행하려면 남편이 술이라도 먹어야 불행해지므로 술을 안 먹던 사람이 술을 먹게 된다. 남편은 처음 아내를 만날 때 아내로부터 기대받는 역할을 착실히 하려고 한것이다. Jay haley는 이 때 친정이 멀리 갔으므로 남편의 역할이 없어졌으면 이 때 아내가 남편에게 불행으로부터 구원해주길 기대하는 역할을 끊게 하는 것이 치료라고 했다. 기대하는 역할이 내 그림자이다. 남편의 그림자는 아내가 남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다. 내 그림자가 상대방이 기대한다고 착각한 그림자일 수 있는데 이 때 내 그림자를 과감히 버리어야 한다. 정신의 그림자인 나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난 후 빛 앞에 당당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