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이 팔자다.
우리나라는 전국민이 사주팔자의 노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혹자는 나는 사주팔자를 믿지 않는다고 부인할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답답한 일을 당할때는 하느님을 믿던 사람도 부처님을 믿던 사람도 점쟁이한테나 가볼까하고 약한 마음을 어디에든 기대보려한다. 이때 누가 용하다고 하면 돈 아깝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고 쌈지돈이라도 꺼내서 가보면 우선 입구부터가 세련되지 않고 좀 원형적인 인테리어에 마음은 오그라들고 미숙한 어린애처럼 된다. 특히 선거철이면 고귀하시고 위엄 있는 분일수록 또 그분의 사모님들은 하나같이 사주팔자 보는 점집을 찾아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한다. 학문이 높다는 교수도 공부안한 서민도 사주쟁이 말에 귀 기울이고, 현대 학문을 한다는 대학생들도 대학가 앞에 죽치고 앉은 사주쟁이나 사주카페에 줄서서 애정운이나 취업운을 자기보다 무식한 사람한테 의존하려한다. 이러니 어떻게 우리가 전 국민이 사주팔자의 노예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팔자란 4주(株)인 네 기둥에 쓰인 天干과 地支 두자씩 모두 여덟 자를 八字라 하고 네 기둥은 생년월일시의 년 월 일 시 네 기둥을 일컬으며 이를 四株 라 한다. 이 생년월일시의 네 기둥에 쓰인 천간과 지지의 여덟자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니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사람은 사주가 뭔지 팔자가 뭔지 모르면서도 사람에 따라 사주팔자가 내가 태어난 날의 기둥에 쓰여진 여덟 자라는 것도 모르면서 팔자가 있는 것 같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융(C G Jung)이 말한 우리민족의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으로 팔자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 팔자가 개인의 개인무의식인 것은 더더욱 아무도 모른다. 팔자가 궁금하면 개인무의식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지 무슨 글자풀이에 의존한단 말인가. 사주팔자를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은 보지 말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림자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는 빛이 시작되는 새벽에 작업을 한다고 한다. 빛이 있으므로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전에 당연히 아무것도 안보여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빛이 생기어 물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그림자이다. 콤플렉스가 공간이 열리는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이 내 정신의 그림자이다.
내가 내 육신의 그림자를 본지도 꽤 오래됐다. 어렸을 때 큰댁에 가서 자정 무렵 제사를 지내고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우리가족은 10리 길을 걸어 왔다. 그때건 지금이건 제사를 자정에 지내는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사를 일찍 지내도 귀신은 귀신같이 알고 일찍 올 텐데 귀신을 믿는 사람들이 귀신을 못 믿고 귀신이 나온다는 자정이 되어서 제사를 지내니 얼마나 아이러닉한 이야기인가? 그 옛날 아주 어두운 밤인데도 어둡게 느끼지 않고 달빛이 매우 푸르고 매우 밝다고 느꼈다. 그래서 산모퉁이의 조그만 물체의 움직임도 다 느껴졌다. 제일 긴 아버지의 그림자와 다음에 엄마 그림자, 내 그림자 그리고 제일 작은 동생의 그림자를 비교해가며 그림자를 늘리려고 앞으로 갑자기 뛰어 나서기도 하고 동생과는 그림자를 서로 밟고 밟히지 않으려고 도망도 다녔다. 훗날 나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우리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 산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묘지자리를 구해서 그렇게 했다. 특히 우리자매가 커가는 모습을 보시며 같이 아파하고 같이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그 후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 그림자가 비취면 무서운 귀신 생각이 들어 놀라곤 했는데... 요즈음은 밤이라도 불빛이 사방에서 비추어져 그림자가 뚜렷하지가 않다. 내 정신의 그림자도 뚜렷하지가 않아 답답하다. 내 그림자란 내 몸뚱이만큼 내육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어두운 그늘이다. 어렸을 때 이 그늘이 내 일부인 것 같아 늘리려 했고 밟히지 않으려 했었다. 그림자도 나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육체의 그림자 외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그림자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내 그림자를 상대방이 갖고 있을 때 질투하며 화를 낸다.
어떤 군인 아내는 남편이 진급에서 누락되자 남편은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렇게 보는 것은 여인의 마음이다. 아내는 자신이 놀기 좋아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정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고 상대방의 특징으로 보고 상대방을 미워한다.
내 정신의 그림자는 내 콤플렉스가 빛을 막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의식속에 있는 바로 나이다.
예술은 사람을 만든다.
예술가는 신이 창조한 것을 가다듬어 사람이 보게 한다.
예술가는 창작활동으로 여러 가지 예술의 언어를 통해 대중과 의사소통한다. 신이 이미 돌 속에, 소리 속에, 창조한 것을 조각을 통하여 음악을 통하여 그 속에 이미 신이 존재했고 지금도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눈이 끄집어내어 우리의 의식세계에 보여줄 때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우리는 감동케 되고 신이 창조한 세계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가를 경애하고 고맙게 느끼고 그를 따른다. 청소년들은 록가수들에게 환성을 지르고 중년의 여인은 젊은 음악가에게 빠지고 노인은 자연을 보며 신의 섭리에 몰입하게 된다. 올해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K-POP의 멜로디와 춤에 젊은이들이 빠졌다. 그래서 대중은 예술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과 연극은 우리로 하여금 신을 만나게 한다. 예술가는 신의 영역인 창조의 영역으로 들어가 대중을 깨운다.
예술가는 우리 보통사람보다 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먼저 느끼고 듣고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저들이 본 것을 무의식속에서 꺼집어내어 의식화 시키면 우리는 예술가가 의식화한 것을 의식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으로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는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화시킴으로 성숙시키는 현자들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천재이다.